결국 최하준은 뻣뻣하게 굳은 채 아무 말도 못 했다.사진사는 속으로 멀쩡하게 생겼는데 안면신경마비라니 안 됐다고 생각했다.사진을 찍고 나서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가 서류를 작성했다.최하준이 신분증을 내밀었다. 여름은 그때서야 남자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었다.‘최하준’‘선우 오빠네 어머니는 양 씨인데, 외삼촌이면 양 씨여야 하는 게 아닌가?’여름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최 씨네요?”“네.”하준은 고개를 숙인 채 이름을 적느라 여름의 말에 담긴 다른 뜻을 눈치채지 못하고 대충 대답했다.“어머니 성을 따랐습니다.”“아~.”여름은 이 남자가 한선우의 외삼촌이라서 결혼을 하자고 덤빈 것인데, 사람을 잘못 안 줄 알고 놀라서 기절할 뻔했다.어쨌든 뭔가가 찜찜했다.혼인신고는 10분 만에 끝났다.약간 슬프기는 했지만, 신기하기도 했다.어릴 때부터 한선우와 결혼할 줄 알았는데, 겨우 얼굴 한 번 본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될 줄이야.“제 연락처입니다.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하준은 종이에 전화번호를 적어주더니 가려고 했다. “잠깐만요⋯.”여름은 정신을 차리고 급히 최하준을 잡았다.“이제 부부인데 같이 살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최하준이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다른 사람이랑 사는 건 불편합니다.”“다른 사람이 아니라 합법적인 아내죠. 이혼할 때 하더라도 정식 부인이라고요.”여름이 혼인신고서를 흔들어 보이고는 불쌍한 척을 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다.“오랫동안 헤어졌던 언니가 돌아오더니 엄마 아빠가 날 버려서 이제 살 곳도 없어요.”“월세를 알아보시죠.”최하준은 눈도 깜짝 않고 가려도 했다.“여보, 날 버리지 말아요!”여름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최하준의 팔을 잡고 늘어졌다.“난 이제 당신 말고는 아무 것도 없어요.”목소리가 점점 커지자 접수처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봤다.어쩌자고 함부로 이런 여자와 혼인신고를 했을까 생각하며 최하준은 후회했다.“컨피티움에 삽니다. 알아서 가 있어요.”참다 못한 최하준이 여름을
여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이런 망할! 사람이 아니라 고양이라고 말해줬으면 오죽 좋아.’새엄마가 될 생각에 고민했던 것을 생각하니 울고 싶었다.어쨌거나 고양이는 귀여웠다. 털도 반질반질하고 토실토실했다.다가가서 한 번 만져보려고 했더니 고양이는 홀랑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여름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그 안방.답답함에 한숨을 내쉬고는 집을 둘러보았다. 방이 세 개였다.안방, 작은방, 서재.북유럽풍에 인테리어는 대부분이 무채색이었다. 깔끔하니 보기는 좋은데 좀 썰렁했다.‘선우 오빠네 외삼촌이 이런 집에 산단 말이야?유망한 사업가라고 하지 않았던가?’번듯한 별장이 아닌 건 그렇다 치고 호화로운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게다가 서재에는 , , 같은 책뿐이었다.아무래도 이상했다.‘선우 오빠네 외삼촌이 아닌 거 아냐?아냐,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윤서가 어리바리하기는 해도 이런 큰일을 두고⋯.착, 각, 한, 건, 아, 니, 겠, 지!생각할수록 당황스러웠다. 여름은 결국 윤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 남자가 선우 오빠네 외삼촌인 거 확실하지?”“뭐래, 우리 오빠가 직접 말해줬다니까. 같이 술도 먹고 밥도 먹었다던데.”여름이 가슴을 탁탁 쳤다.“결혼 잘못했을까 봐 그래.”“맙소사, 진짜로 신고했어?”윤서가 비명을 질렀다.“그 사람이 진짜로 왔디?”‘으응’하는 대답을 듣자 윤서는 울먹거렸다.“우리 서로 수호천사 해주기로 했잖아. 날 버리고 가면 난 어떡하라고.”여름은 속마음을 다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어쨌든 집들이는 한 번 할 거지?”“그게, 사실은 아직 나한테 다 넘어온 게 아니라서⋯.”여름은 결국 자초지종을 말했다.“네 연애 팔자는 어쩜 그렇게도 기구하냐.”윤서가 위로했다. “그래도, 괜찮아. 너라면 반드시 그 남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거야.”“그래, 나도 날 믿어!”통화를 끝내고 여름은 근처의 마트에 갔다. 아무래도 집이 너무 썰렁해서 조치를 취해야 했다.****
“⋯⋯.”최하준은 이마를 문지르다 톡 요청을 수락했다.곧 강여름이 톡을 보냈다.“여보,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예요?”하준 : 안 갑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시죠.하여간 love : 그래요? 그럼 쭌이라고 할게요, 쭌 좋네요.하준 : ⋯⋯.‘아, 반품해 버릴까?’******그날 밤.고색창연한 한옥에 사람들이 모여 식사 중이었다.변호사들이 새로 들어온 의뢰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최하준은 그저 듣는 시늉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때 톡이 울렸다.여름이 사진을 보냈다. 따스한 조명 아래 토실토실한 고양이가 바닥에 엎드려 행복한 얼굴로 멸치를 물고 있는 사진이었다.하여간 love : 쭌, 걱정 말고 식사 모임 잘 하고 오세요. 지오는 제가 잘 돌보고 있답니다.어이없다는 표정이 드러났다. ‘정말 어쩔 수 없는 식탐냥이라니까. 벌써 매수당한 거냐?’******9시 반.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오던 최하준은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집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까만 소파는 청록색 덮개가 깔려 있고 하얀 식탁에는 초록색 물결 무늬 식탁보가 덮여 있고, 그 위에 분홍 수국을 꽂은 유리 화병이 놓여 있었다. 집에 화초와 꽃이 가득했다. 발코니에는 주렁주렁 화분이 걸려있었다.‘잘못 들어왔나?다른 집인가?’“왔어요, 쭌?”작은 방에서 여름이 걸어 나왔다. 치맛자락에 하얀 토끼 무늬가 있는 와인색 실크 잠옷을 입고 있었다.풍성한 브라운 헤어가 어깨에서 찰랑거렸고, 치맛자락 아래로 눈처럼 새하얀 두 다리가 보였다.그야말로 요정 같은 자태였다.최하준이 인상을 찡그렸다.“누가 이런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까?”“이게 뭐 어때서요?”여름이 천연덕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았다.“가슴이 보이길 하나, 배가 드러나길 했나, 무릎이랑 종아리밖에 안 보이잖아요. 나가 봐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입고 다니나. 이렇게 입는 것도 안 된다고요?”골치가 아팠다. 물론 노출이 심한 건 아니지만 속에 아무것도 안 입질 않았는가 말이다. 최하준은 얼른 시선
“따끈한 밥에다 조기를 얹으면, 캬~ 이게 또 짭짤하고 고소하니 갓 지은 밥하고는 궁합이 딱이지~”여름은 먹방을 계속했다.귀여운 얼굴로 열심히 먹으며 종알거리니 요즘 인기 있다는 먹방보다 더 식욕을 자극했다.이제 최하준은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마침 이때 지오가 식탁으로 폴딱 올라와 꼬리를 살랑거렸다.지오도 배가 고프다는 것을 알아채고 최하준이 일어나서 서랍에서 사료를 꺼내 그릇에 담아 지오 앞에 놓아 주었다.지오는 냄새를 한 번 맡아보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더니 여름을 빤히 쳐다보았다.최하준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여름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조기 살을 발라서 건네자 얼른 받아 맛있게 먹었다.“아유, 착하지.”여름은 지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아빠보다 품위 있구나.’민망해진 최하준은 조기 살 먹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으로 명란 계란말이가 쏙 들어오자 확 인상을 썼다.“아니⋯.”여름은 얼른 명란 계란말이를 상대의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화가 나서 뱉으려는데 고소한 냄새가 입안에 퍼졌다. 저도 모르게 씹기 시작했는데 보드라우면서도 탄탄한 식감이 일품이었다.이런 명란 계란말이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본가의 주방장이 별별 요리를 다 할 줄 알아도 이렇게 맛있게 하지는 못했다.대체 어떻게 한 건지 버터처럼 고소한 향이 나는데 느끼하지도 않았다.“맛있죠?”여름이 아래턱에 손을 받치고는 자신 있다는 듯 물었다.맞은 편에 앉은 여자의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고 최하준은 얼른 정색을 했다.“그냥 그렇군요.”그러고는 계란말이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한 조각으로는 부족했다.여름이 눈을 깜빡였다.“그저 그렇다면서요?”“이렇게 많이 만들었는데 혼자서 다 먹을 수 있습니까? 음식 남기는 거 질색입니다.”최하준이 침착하게 답했다.뭐가 말하려고 여름이 막 입을 여는데 말을 막았다.“식사 시간에 시끄럽게 떠들지 맙시다.”“⋯⋯.”‘이런 걸 두고 바로 염치가 없다고 하는 거지.’여름이 속으로 생각했다.‘아침에
누군가 심장을 꽉 움켜쥔 것 같았다. 여름은 아파서 숨도 쉴 수가 없었다.특히나 한선우의 그 싸늘한 시선이 쓱 훑고 지나가자 견딜 수가 없었다.이민수가 허둥지둥 강여경에게 다가갔다.“본부에서 공지 받았어. 이번 프로젝트는 여경이에게 맡긴다면서?”움찔하더니 여름의 시선이 강여경에게 꽂혔다.“화내지 마라, 얘.”강여경이 놀랐다는 듯 주춤주춤 몇 걸음 물러섰다. 한선우가 얼른 강여경의 허리를 받쳤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열불이 뻗쳤다.“강여경, 남자도 뺏어 가고, 내가 따온 프로젝트도 강탈하고, 뭘 어쩌고 싶은 건데? 그렇게 남의 손에 든 것만 보면 뺏고 싶어?” “아니 선우가 언제부터 자기 남자친구였다고⋯.”이민수가 비웃었다. “그냥 혼자서 죽자 살자 따라다닌 거지.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는 선우가 호텔 사장님과 친분이 있어서 받아온 거 사람들이 다 아는데⋯.”“오빠, 그만 해요.”강여경이 급히 이민수에게 눈짓했다.“할 말은 해야지. 이제 네가 선우 약혼녀인데, 프로젝트는 네가 맡는 게 당연한 거 아니냐.”“오빠도 그렇게 생각해?”강여경이 가만히 있는 한선우를 빤히 쳐다보았다.애초에 한선우가 주 대표와 인사를 시켜줘서 프로젝트를 받게 된 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사실 주 대표와 한선우는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여름이 매달 주 대표를 찾아가 밥 사고, 술 사고, 디자인을 열 번도 넘게 수정해 가며 간신히 따온 프로젝트였다.한선우가 눈썹을 슥 올리더니 말했다.“뭐, 주 대표가 내 얼굴 봐서 일을 준 건 맞지..”이민수가 비아냥거렸다.“개나 소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믿을 수가 없어. 내가 직접 아빠한테 가볼 거야.”여름은 회사로 차를 몰아 강태환을 찾아갔다.“왜 강여경에게 호텔 프로젝트를 주신 거예요? 내내 제가 책임지고 있었는데요. 이번 프로젝트에 제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아시잖아요?”한창 업무 중인데 여름이 벌컥 들어오자 강태환은 기분이 언짢았다.“너한테는 따로 맡길 일이 있다. 진 대표네 별장 일을 네가 맡아
여름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자신은 입사해서 한 번도 ‘회장님댁 아가씨’ 노릇을 한 적이 없다. 그저 부지런히 일했을 뿐이다.다른 사람들이 다들 퇴근해도 자신은 남아서 야근을 하고 누구에게나 다정하게 대했다. 그런데 이런 엔딩을 맞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회사에서 나와 바람을 쐬며 혼자 걸었다.한선우가 몇 번인가 전화를 걸어왔지만 받고 싶지 않았다.마트에 가서 간식거리와 식자재를 사서 그대로 컨피티움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지오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뛰어나왔다.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지오를 내려다보았다.“인제 날 좋아해 주는 건 지오 밖에 없네.”지오가 ‘야옹~’하며 편안한 듯 눈을 감고 여름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지오가 웃었다.“멸치가 먹고 싶구나? 알았어, 해주지.”점심에 최하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름은 지오와 간단히 끼니를 해결하고 소파에 앉아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최하준은 10시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아직 집이 환했다.여름은 소파에 앉아서 지오 입에 소시지를 넣어주고 있었다.“내가 없으니 애한테 그런 정크푸드를 먹이는 겁니까?”쌀쌀맞은 최하준의 시선이 테이블에 있는 각종 간식거리로 향했다. 감자 칩, 닭발, 닭꼬치, 쥐포⋯.지오의 입가에 뭔가 양념이 묻어있는 것도 같았다.“그냥 맛만 보여준 거예요. 아주 조금만.”여름이 소심하게 손가락으로 아주 작은 양을 재보이는 시늉을 했다.“지오가 너무 덤벼서 어쩔 수 없⋯.”“고양이가 뭘 압니까. 다 사람이 알아서 조절해 줘야지.”최하준은 화가 나서 테이블의 간식거리를 싹 치웠다.“앞으로 집에서 이런 정크푸드 금지입니다. 이런 냄새도 싫습니다.”여름은 속상했다. ‘세상에 간식 냄새 싫다는 사람이 다 있네.변태인가⋯.’그러나 여름은 어쩔 수 없이 비위를 맞추며 웃었다.“당신 말이 맞네요, 쭌. 앞으로는 이런 거 안 먹을게요.”“거울이나 보시죠. 얼마나 가증스러운지⋯.”최하준은 꼴도 보기 싫다는 듯 고양이를 안고 안방으로 가버렸다.“배고프지 않아요? 국
“아아니, 수건을 당기면 어쩝니까!”눈앞의 광경에 당황한 여름은 얼른 눈을 가렸다. 그런데 손에 하얀 수건이 들려있는 게 아닌가!‘설마⋯⋯ 당황한 나머지 내가 수건을 잡아당겼나?’“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상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강여름 씨, 당신처럼 후안무치한 사람은 내가 본 적이 없습니다.”여름은 울고 싶었다.“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러그에 걸려서 미끄러진 거라고요.”“저는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었습니다만. 핑계가 너무 빈약한 거 아닙니까?”최하준은 여름의 말을 믿지 않았다.여름은 자포자기한 듯 털어놓았다.“너무 퍼펙트한 바디를 보니까 뇌 정지가 와서 그만⋯.”최하준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이렇게 대놓고 말을 한다고!“그래서 지금 날 탓하는 겁니까?“아니, 그게 아니고요. 내가 아직 ⋯.”“언제까지 쳐다보고 있을 겁니까. 나가세요.”최하준의 태양혈이 벌떡거렸다. 최대한 화를 참는 중이었다.“아, 알겠어요. 나가요. 나가면 되잖아요.”여름이 허둥지둥 나가려고 했다.“잠깐!”뒤에서 짜증이 폭발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건은 주고 가시죠.”손을 내려다보니 수건이 들려있었다. 쥐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여기 있습니다.”정신을 차리고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돌아와 수건을 최하준의 품에 안겼다.여름의 시선을 보고 최하준은 할 말을 잃었다.‘정말 뻔뻔하다니까.’여름은 문을 ‘쾅’ 닫고 나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귀까지 빨개졌던데 부끄러워 하는 건가?어쨌든 귀엽네.’그런 일을 겪고 나자 계속 거실에 있을 수가 없었다. 여름은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마음이 진정되질 않았다.얼마나 있었을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숨을 고르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자는 중이에요. 내일 얘기 해요.”“잔다면서 어떻게 대답합니까?”상대의 저음이 들렸다.“억지로 열기 전에 문 여시죠.”밀려드는 수치심에 두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다가
여름은 곧 집으로 올라가서 방에 있는 물건을 챙겨 나왔다.새벽 2시였다.한밤중에 친구를 깨울 수가 없어서 차를 끌고 근처의 5성급 호텔로 갔다.로비에서 여름은 카드를 내밀었다. 그러나 직원은 곧 카드를 돌려줬다.“죄송합니다만 이 카드는 안 되네요.”당황한 여름은 곧 다른 카드를 꺼내 건넸다.몇 장을 내밀어 보았는데도 모두 쓸 수가 없었다.그제야 집에서 카드를 모두 정지시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그동안 여러 프로젝트를 하면서 돈은 꽤 벌었지만 모두 착실히 어머니에게 드리고 있었다.그리고 평소에는 강 회장의 카드를 썼는데 그 카드가 모두 정지된 것이다. 이제 월급 통장에 연동된 현금카드밖에 남지 않았다.직원은 좀 퉁명스러워졌다.“고객님, 호텔에서 나가서 왼쪽으로 300m 정도 가시면 모텔이 있습니다.”여름은 화가 났다.“이 호텔은 사람을 이렇게 대하라고 교육받나요?”“사실대로 말씀드린 겁니다. 5성급 호텔은 비싸답니다.”여름은 분노했다. 이런 모욕은 처음 당했다.“돈 없다고 누가 그래요? 내가⋯.”여름은 현금 카드를 내밀다가 멈칫했다.이 호텔에서 가장 저렴한 방이라고 해도 40만원은 줘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직장도 없고 살 곳도 없는데 몇 푼 안 되는 돈을 다 써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그냥 그리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딱딱한 직원의 말이 돌아왔다.여름은 굴욕감에 목이 메었다. 할 수 없이 고개를 떨군 채 트렁크를 끌고 발길을 돌렸다. 모텔마다 만실이었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겨우 2만 원짜리 싸구려 모텔에 들어갈 수 있었다.여름은 누군가가 이런 모텔에 들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찍어 고등학교 동문 단톡방에 올린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한편, 최하준은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장이 직접 나와서 진찰을 했다.입술을 꾹 다물고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대충 결혼해 버린 것이 너무나 후회됐다.15분 뒤 응급 진료실 문이 열렸다.안에서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