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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8 화

송미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조수아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육문주의 대답은 한순간에 그녀의 7년이나 이어온 감정을 엉망으로 짓밟았다.

“나 이 비서한테 그 영상을 복제해달라고 했지 삭제하라고 한 적 없어.”

육문주는 표정 변화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증언이랑 물증이 완벽한데 그래도 변명할 생각이야?”

변명이라니, 그건 육문주가 자신을 믿어줄 가능성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무릇 송미진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면 육문주는 무조건 송미진의 편이었다.

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를 맡기든지. 내가 한 적도 없는 일인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울 생각하지 마. 조 씨 가문을 다 걸어서라도 난 내 결백을 되찾아야겠으니까!”

언제나 얌전하고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조수아의 모습을 육문주는 처음 겪었다.

“입만 살아서는.”

“나 법학과 출신이라는 걸 잊지 마. 애당초 당신의 돈이 탐난 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 뛰어난 변호가 되어 있었을 거야.”

조수아는 일부러 ‘돈이 탐났다’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남들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비춰진다는 걸 이미 습관 됐다는 듯 말이다.

육문주는 작게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럼 행운을 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수아의 집을 나온 육문주는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영택이 다가오던 육문주를 발견하고 튀어내리며 말했다.

“대표님, 조 비서님한테 주려고 사신 선물 두고 가셨더라고요. 지금 다시 가져다 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가서…”

진영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문주의 호통이 날아왔다.

“갖다 버려!”

입가에 커다란 멍을 달고온 육문주에 진영택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대충 알겠다는 듯 좋게좋게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대표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직접 신경 써서 고른 선물들인데 버리면 어떡합니까. 조 비서님도 그냥 잠시 삐져서 그런 거지 잘 달래주시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만약 제 여자친구를 데리고 전여자친구한테 헌혈하라고 데리고 갔다가 나중에 챙겨주지도 않고 그러면은 제 가죽을 벗기려고 들걸요? 그거에 비하면 대표님 얼굴에 멍은 별 거 아니에요. 이제 조 비서님 화가 좀 풀리면 제가 나중에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육문주는 생각에 빠진 듯 미동도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지금 온통 방금 전에 봤던 핏기 하나 없어 보이던 조수아의 얼굴로 가득했다.

‘고작 피를 400CC 뽑았다고 비실비실거리다니, 전에 온갖 산해진미를 먹인 게 다 어디로 간 거야.’

미간을 찡그린 육문주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감시카메라 영상 어떻게 된 건지 가서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대표님도 조 비서님이 그랬을 거라고 안 믿으시는 거죠? 원래 처음부터 일도 잘하고 대표님한테 인정 받는 조 비서님들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번 사건도 아마 조 비서님을 쫓아내고 본인이 그 자리를 꿰차려고 꾸민 일일 수도 있어요.”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육문주가 천천히 담배를 연기를 뱉었다. 하얀 연기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흐릿하게 감쌌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으면 절대 가만 안 둬.”

담배를 다 태운 뒤 차에 탄 육문주는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자애로운 목소리가 사무실 안쪽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우리 장손, 갑자기 할머니 보니까 반갑지?”

단아한 복장을 갖춰입은 육문주의 할머니 황애자 여사가 천천히 다가오며 웃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황애자 여사는 백발의 파마 머리에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인의 나이보다 족히 열몇 살은 어려보이는 정정한 모습이었다.

잔뜩 굳어있던 육문주의 표정도 할머니를 본 순간 부드럽게 풀렸다.

“할머니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서 편하게 화분이나 가꾸고 계시지.”

“그런걸 가꾸는 것보다 네가 하루빨리 나한테 증손을 안겨주는 게 더 재밌지 않겠니?”

사무실을 둘러보던 황애자가 눈을 휘며 말했다.

“네 수석비서가 얼굴도 예쁘고 일도 잘한다고 그러던데, 왜 안 보여?”

“사직했어요.”

별다른 해명없이 덤덤한 답변이 들려왔다.

황애자가 혀를 끌끌 차며 손주를 나무랐다.

“그렇게 참하고 예쁜 아가씨를 붙잡지 못해 떠나보낸 거야? 으이그, 쯧쯧! 내 손주며느리로 삼으려고 했더니만.”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다 굴러들어온 손주며느리도 이대로 도망가겠네?

황애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육문주는 쓰게 웃었다.

참한 아가씨라고?

그것도 다 옛말이지, 지금의 조수아는 가시 돋친 장미 그 자체였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가시로 사람을 찔러버리는 그런 장미 말이다.

육문주는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편, 조수아는 자세히 알아본 후에야 이 비서가 중간에서 말을 바꾸는 바람에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이 비서가 개인적인 일로 돈이 급하다고 해서 조수아가 2억 가까이 되는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랑 결혼을 준비하는데 집 사고 인테리어 할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조수아가 흔쾌히 빌려준 돈이었다.

이 비서는 바로 그 계좌이체 내역을 증거로 들며 자신은 조수아의 지시를 받아 감시카메라 영상을 지웠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좋은 마음에 빌려줬던 돈이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지불한 돈으로 탈바꿈 되었을 줄이야.

조수아는 차디찬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요즘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정말 말 그대로였다.

죽을 다시 덥혀서 나온 연성빈을 마주하고 조수아가 입을 열었다.

“선배, 도와주겠다고 한 건 고마운데 지금 모든 증거들이 다 나한테 너무 불리해. 괜히 이 사건을 맡았다가 선배 명성에 먹칠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연성빈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웃었다.

“증거는 내가 알아서 찾아볼 테니까 걱정 마. 내가 그랬지. 아무도 너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라고. 넌 다른 생각은 말고 당분간은 건강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 써. 알겠지?”

“저도 같이 찾을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비서가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을 바꾸진 않았을 것 같아요.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어요.”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조수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그녀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곧장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 너 지금 당장 본가로 들어와!”

전화를 건 사람은 조수아의 할머니 장현숙으로 매번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호출하고는 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본가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조수아의 면전으로 찻잔이 날아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의 이마로 찻잔이 정확히 날아와 깨지면서 순식간에 살갗이 찢어져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감싼 조수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맞이하죠?”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우리 조한 그룹이랑 육엔 그룹이 추진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스탑이 걸렸는데 그게 네가 저지른 짓이 아냐? 잘 하고 있던 비서직을 대체 왜 그만두는데! 이제 봐봐. 육 대표님이 우리 가문한테 손을 쓰기 시작했어. 이제 조한 그룹이 네 손에서 끝장나는 거라고!”

장현숙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쳤다. 손녀를 향한 애틋함이라고는 일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마의 상처도 잊은 채 조수아는 방금 들은 말을 천천히 되새김했다.

육엔 그룹에서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해 왔다고? 역시 육문주는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조수아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할머니 뜻은 저한테 문주 씨 곁에서 명분 따위 신경쓰지 말고 계속 그의 욕구를 풀어주는 섹스파트너로 남아있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육 대표님 침대에 올라갔으면 됐지 너 따위가 명분을 요구할 자격이나 돼? 원래 애초부터 내가 널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너한테 이런 좋은 기회가 차려지기나 했을 것 같아?”

조수아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장현숙에게로 고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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