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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강의건은 마음속으로 이미 계획하고 있었고 전 집사도 뭔가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번에 알아보라고 하셨던 심장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연아가 구급상자를 들고 오자 전 집사는 바로 입을 닫았다.

소파에 앉아 있던 강의건은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송연아를 보며 말했다.

“이쪽으로 따라와.”

강의건은 서재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고 송연아는 구급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곧바로 뒤따라 걸아갔다.

강의건은 의자에 앉더니 슬픈 표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세헌이 부모는 어릴 때 돌아가서 내가 세헌이를 키운거나 다름없었어. 학창 시절에는 기숙사 생활했고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회사를 인수받으며 바쁜 생활을 보냈지. 그래서 집은 거의 안 와.”

강세헌의 아버지는 그의 큰아들이었다. 자식 잃은 슬픔은 역시나 수십년이 지나도 치유되기 힘들었고 목소리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강세헌이 돌아오기를 꺼리는 것도 이유가 있었다.

강의건은 자신이 죽으면 강세헌이 둘째네 가족을 어떻게 대할지 이미 예상할 수 있었다. 그가 지금껏 참고 있었던 것도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강의건은 강세헌 옆에서 그의 감정을 이해하고 원한 감정이 사라지게끔 마음을 헤아려줄 수 있는 여자가 필요했다.

가족 사이에 서로 피 다투며 싸우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는 없었다.

“할아버지.”

송연아는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송태범의 욕심 때문에 시집온 건 맞으나 강의건은 단 한 번도 그녀를 깔보지 않았고 줄곧 잘해줬다.

강의건은 걱정하지 말라며 손짓했다.

“네가 좋은 애란걸 알고 있으니까 이 결혼을 허락한 거야. 너희 할아버지는 참 충직하고 착한 사람이었어. 네가 그런 사람 손녀니까 반드시 좋은 인품을 물려받았을 거로 생각해. 그래서 난 네가 옆에 남아서 세헌이를 돌봐줬으면 좋겠어.”

“할아버지, 사랑하는 여자가 옆에 있는 게 세헌 씨한테 제일 좋지 않을까요...”

송연아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으나 강의건 귀에는 강세헌을 떠날 핑계를 찾는 것처럼 들렸다.

지난 세월 산전수전 다 겪었던 강의건한테 그녀를 상대하는 건 식은 죽기나 다름없었다.

“네가 많이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강의건은 서랍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며 그녀에게 말했다.

“너희 어머니가 앓고 있는 병 심장 이식해야 한다며? 마침 적합한 심장을 찾아서 지금 병원으로 이송 중이야. 네가 이 서류에 서명만 한다면 어머니는 바로 수술할 수 있고 수술비와 치료비 전부 내가 지원할게.”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깨달은 송연아는 다시 서류를 살폈다.

강세헌과 이혼하지 않겠다는 합의 보증서였다.

“어머니 상황이 안좋다고 하던데, 심장이식 안 하고 계속 지체하게 된다면 아마 오래 버티지 못하실 거야. 돈이 많다고 해도 심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게 아닌데, 넌 돈도 없잖아.”

강세헌 옆에 남게 하려면 그녀의 약점을 손에 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송연아는 손에 서류를 든 채 마음이 착잡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갈피를 못 잡았다. 이제야 강의건이 그녀를 이곳에 부른 진정한 목적을 알아챘다.

“왜 제가 세헌 씨를 잘 돌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말했잖니. 넌 네 할아버지의 손녀니까, 난 널 믿어.”

송연아는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어머니의 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고 수술을 빨리 할수록 회복 능력도 좋아진다.

이미 결혼했으니, 어머니를 위해서 서명하기로 결심했다.

“할게요.”

“그래, 난 널 믿어. 넌 반드시 세헌이를 행복하게 만들 거야.”

엄숙하던 강의건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기가 돌았고 송연아는 입술을 굳게 깨문 채 아무 말도 못했다.

강의건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은 강세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은 최지현인데...

“병원 쪽에 연락해서 최대한 빨리 어머니 수술 진행하라고 할게.”

강의건은 핸드폰을 들었고 송연아는 잔뜩 긴장한 채로 옆에 서 있었다.

강의건이 통화를 마치자 곧바로 물었다.

“할아버지, 병원에 다녀와도 될까요?”

효심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 강의건도 허락했다.

“그래, 다녀와.”

오늘 이렇게 소란을 피웠으니, 앞으로 강세헌은 절대 그녀를 방에 못 들어 가게 할 게 뻔했고 그 생각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진심으로 고맙다고 인사했고 강의건은 손사래를 치며 문밖의 전 집사한테 말했다.

“전 집사, 차 준비시켜.”

“사모님, 이쪽으로 가시죠.”

송연아는 전 집사를 따라 밖으로 나왔고 지금 일어난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병원에 도착하고 나서 강의건이 준비한 모든 것을 보고 나서야 이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걸 깨달았다. 정말 수술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하룻밤 동안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이제 남은 건 오랜 관찰 기간과 회복 기간뿐이었다.

수술 후 병실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제 살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을 느꼈다.

밤새 한숨도 자지 않은 채 과로 복귀하려는 그녀를 누군가 불러세웠다.

“송 쌤.”

고개를 돌려보니 같은 과 주 간호사가 보였고 다가와 그녀에게 말 걸었다.

“어제 일찍 들어가셔서 최 쌤 말씀하는 거 못 들었죠? 믿는 구석이 있어서 그런지 어찌나 잘난 척을 하던지.”

최지현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표정이 굳어졌고 더는 그녀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전 송 쌤이 훨씬 이쁜데, 도대체 강 대표님은 어디가 마음에 든대요?”

뒷담화하는데 끼고 싶지 않았던 송연아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최닥도 이쁘시잖아요. 강 대표님이 좋아할 만한 뭔가가 있겠죠. 이렇게 뒷담화하는 건 별로인 것 같아요.”

주 간호사는 입을 삐쭉 내밀었다.

“말이 송별회였지, 그냥 자랑하고 싶어서 저런 자리 만든 거잖아요. 그게 원래 송 쌤 건데...”

“주 선생, 전 바쁜 일 있어서 그런데 먼저 가볼게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분 나쁠 수도 있는 얘기였기에 송연아는 그녀의 말을 끊고 자리를 피했다.

주 간호사는 그녀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걸 느끼고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아침은 환자가 진찰받으러 오는 가장 바쁜 시간이었기에 그들 모두 일찌감치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업무 준비를 했다.

송연아는 오전에 수술이 잡혀있었고 두 시간 동안 잠깐 쉬다가 수술실로 들어갔다. 두 차례 수술에 어젯밤 한숨도 못 잔 탓에 피곤해서 탈진 직전이었다. 마침 점심시간이어서 잠깐 자려고 눈을 감았는데 간호사 한명이 그녀를 불렀다.

“원장님이 잠깐 사무실로 오라는데요?”

“무슨 일 있어요?”

“저야 모르죠. 선생님이 직접 가보셔야 할 것 같아요.”

간호사는 웃으며 말했고 그녀의 말에 곧장 원장 사무실로 향했다.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문 앞에서 노크한 후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원장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던 원장은 송연아가 들어오자, 손에 있던 일을 잠깐 멈춘 후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송 선생, 혹시 강 대표한테 미움 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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