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

제10화 실버

신연지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좋아하는 사람을 3년이나 방치해? 그런 사랑이면 난 사양이야!”

진유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건 그러네. 하지만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널 집에 가두려는 의도가 뭘까? 어차피 3개월 지나면 이혼하고 그 집에서 나오게 될 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신연지도 그 점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그날 저녁 그들은 밖에서 샤부샤부를 먹었다.

신연지는 가장 매운 소스를 주문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섭취했다.

그날 밤, 남자에게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그녀는 아예 핸드폰을 꺼버렸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난 그녀는 캐리어를 들고 어제 계약한 새 집으로 향했다.

간단히 짐을 정리한 뒤, 그녀는 새로 취직한 곳으로 향했다.

경원 작업실.

허 원장은 이곳 담당자였다. 60세가 넘은 노인은 신연지를 보자마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진유라 씨가 얘기하던 복원사 실버가 자네였어?”

신연지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최근 몇 년 사이, 신연지가 작업한 작업물은 그리 많지 않지만 매번 극악 난이도의 작업물만 작업했기에 업계에서 꽤 유명해져 있었다.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았기에 실버라는 가명을 썼다.

허 원장은 직전에 그녀의 작품만 보고 대단한 실력자라고 평가했다. 몇몇 작품은 심지어 업계의 원로들마저 자신 없어 하던 작업이었는데 실버라는 신인 복원사가 해냈다는 소리를 듣고 높은 평가를 주었다.

그래서 허 원장은 실버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젊은 처자였을 줄이야!

“자네가 복원한 작품을 봤어. 상당한 실력을 가졌더군!”

신연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배울 것이 많아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허 원장은 그녀를 이끌고 자리로 갔다.

“이곳이 자네가 일할 곳이야!”

그는 직원 한 명을 자리로 불렀다.

“경수 씨! 가서 작업해야 할 골동품들 좀 가져와 봐.”

골동품 복원사로서 그 골동품이 존재했던 시대와 특징, 그리고 진위를 가려내는 건 복원사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자신이 직접 스카우트한 사람이라 이런 번거로운 과정은 생략할 수 있었지만 신연지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에 한번 지켜보기로 했다.

이경수라는 직원이 각기 다른 시대에 존재했던 골동품 몇 가지를 들고 오더니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직원들도 구경하러 몰려왔다.

“대단한 실력자 한 명 온다고 하지 않았어? 나이가 너무 어려 보이는데?”

“대충 시간만 때우려고 지원했다가 허 원장님한테 잘못 걸린 거 아니야?”

“허 원장님이 저 사람 데려온다고 사방을 쑤시고 다녔다던데 실망하시게 되었네.”

그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신연지는 작업대에 놓인 골동품들을 시대와 출토지에 맞게 분류하고 각각의 특징까지 세분화해서 설명했다.

이경수는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걸 해낸다고?”

그는 허 원장의 수석 제자였다. 대학교 때부터 고고학에 입문하여 허 원장 밑에서 일을 배운지 어언 10년이나 흘렀지만 그런 그조차도 이렇게 빠른 시간에 이 많은 골동품들을 정리해 낸다는 건 쉽지 않았다.

허 원장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은 합격이었지만 아직 실전이 남았다.

신연지가 직접 작업하는 걸 보지 못했기에 진품을 바로 맡길 수는 없었다. 그는 이경수를 시켜 테스트용 모조품을 가져와서 복구작업을 진행하게 했다.

“너무 서운해 하지 마. 이건 우리 작업실 들어오기 전에 다들 겪는 과정이야. 고대의 골동품들은 망가지면 다시 재생이 불가능하지. 그래서 더 직원 심사에 엄격할 수밖에 없어.”

신연지는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골동품 복원 작업은 단조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작업이었다. 사람들은 신연지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았기에 곧바로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퇴근하기 직전에 신연지는 작업한 작품을 허 원장에게 제출했다. 작업물을 확인한 사람들은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 금방 입사할 때 조각 하나 복원하는데 3일이 걸렸는데….”

사람들은 신연지의 빠르면서도 완벽한 작업 결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허 원장은 돋보기를 끼고 부서진 석판 조각을 들고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자세히 보면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고개를 든 허 원장은 착잡한 눈빛으로 신연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자네 혹시 최여진 씨를 아나?”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신연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이내 감정을 수습하고 대범하게 대답했다.

“들어본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건 아닙니다.”

최여진.

그녀는 골동품 복원 업계에서 가장 주목 받았던 신인이었다. 신들린 기법으로 최단 시간 안에 파손된 골동품을 복원해 내는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얼마 못 가 종적을 감췄다.

허 원장이 물었다.

“하지만 아까 복구 작업을 하는 것을 지켜봤을 때 최여진 씨가 쓰는 기법이랑 많이 닮았어.”

“외할아버지가 이 업계에 오래 종사하셨습니다. 기술은 외할아버지께 배웠어요.”

허 원장은 실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신연지의 실력은 이미 증명되었기에 허 원장은 근엄한 표정으로 직원들에게 선포했다.

“이쪽은 실버, 앞으로 같이 일하게 될 동료이니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이들 챙겨주게.”

이경수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실버? 제가 아는 그 실버 맞아요? 엄청 선배로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실버의 본모습이 이렇게 예쁘장한 어린 여자일 줄이야!

허 원장은 이경수에게 닥치라는 눈빛을 보냈다.

“연지 씨, 저 녀석 말은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

신연지는 담담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그 뒤로 허 원장은 작업실 동료들을 한명 한명 소개해 주었다. 작업실에는 그녀를 포함해서 여덟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는데 다들 성격 좋고 신연지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는 분위기였다. 예전에 재경에서 일할 때와 비교하면 천지 차이였다.

신연지는 새로 찾은 이 직장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작업실 직원들은 경원의 전통이라면서 신입이 오면 꼭 회식을 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회식 장소는 번화가의 한 삼겹살집으로 정했는데 그 맞은편에는 고급 레스토랑이 있었다.

레스토랑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고연우가 삼겹살집으로 들어가는 신연지 일행을 발견하고 박태준의 옆구리를 툭 쳤다.

“저기 봐. 저 사람이 신연지 씨 아니야?”

박태준은 친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신연지가 몇몇 남자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고기집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관련 챕터

최신 챕터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