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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6 화

육문주는 잠시 의문이 담긴 눈빛을 했다가 차갑게 답했다.

“목숨 안 아까우면 직접 실험해 보든지.”

조수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못해봤을 거라 생각하는데? 만일 내가 얼마 전에 방금 2000CC의 피를 흘렸다고 하면, 그래도 나더러 헌혈하라고 강요할 거야?”

“조수아, 억지부리지 마. 생리를 해봤자 고작 60CC의 피를 잃는 게 다야.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

조수아는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에 한숨만 나왔다.

만약 육문주가 자신한테 조금의 관심이라도 더 있었으면 분명 이상함을 눈치채고 캐물어 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성정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더라면 자신이 위험에 빠진 사람들 못 본 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차이겠지.

송미진의 작은 상처에는 그렇게나 허둥지둥 대면서, 자신은 유산해서 수술까지 받아야 했던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였었는데도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가슴이 아파 고개를 떨구었던 조수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병실 문가에서 그 사람의 인영을 보게 되었다.

순간 멍해진 조수아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날 정신이 혼미해져 가던 와중에 조수아의 시선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었다. 그리고 귓가에 한 남성이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던 소리가 들렸었다. 겨우 눈을 뜬 조수아가 보게 된 사람이 바로, 지금 저 문가에 서 있는 남자였다.

조수아는 그날의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낸 그녀는 두 손으로 남자의 팔을 꼭 붙잡은 채 거의 꺼져가는 목소리로 애원했었다.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조수아가 깨어났을 때 한지혜가 말하길 안경 낀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왔다고 알려줬다.

조수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송학진의 곁으로 걸어간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송미진 씨 오빠 되시죠?”

송학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조수아 씨 혹시 몸이 편찮으시면 저...”

세상도 참 무심하지. 조수아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은혜를 보답하고 싶었던 생명의 은인이 송미진의 오빠였다니. 조수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송학진 씨, 혹시 잠깐 자리 옮겨서 얘기 가능할까요?”

고개를 끄덕인 송학진을 데리고 옆에 있는 비상구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육문주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학진이한테는 무슨 일로? 할 얘기 있으면 내 앞에서 해.”

조수아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문주 씨 앞에서 얘기하라고? 당신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어?”

“조수아,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막무가내가 됐어.”

“내가 막무가내인 거야, 아니면 당신이 인정이 없는 거야?”

육문주의 반응을 기다리기도 전에 조수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송학진과 함께 비상구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막만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 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든 조수아는 맞은편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날 저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빨리 보답할 기회가 찾아왔네요. 걱정 마세요. 송학진 씨 동생분께 헌혈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날 일은 다른 사람한테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미간을 구긴 송학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아이, 문주 거 맞죠?”

“누구 아이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이제 없어졌으니까. 다만 이 일이 저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요.”

육문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수아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육문주의 곁을 한시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송학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수아의 담담한 미간에서 그는 마치 어머니의 모습을 본 듯했다.

멈칫한 송학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날 피도 많이 흘린 걸로 알고 있고, 이제 그일이 지난지 며칠도 안 됐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조수아의 입꼬리가 자조 섞인 웃음을 그려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지금은 저 그냥 송학진 씨한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이제 이 일만 끝나면 저희는 서로 빚진 게 없게 되겠네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무리해서 그렇게 하실 필요 없어요. 아직 몸이 편찮으신 거면 조수아 씨한테 헌혈을 강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요. 제가 원체 남한테 빚지는 걸 싫어해서요. 특히 송미진 씨와 관련된 사람한테는 더욱이요. 송학진 씨, 부디 저와 한 약속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조수아는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 마침 그녀를 부르기 위해 나온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

“이제 헌혈하러 가죠.”

“조수아!”

육문주가 그녀를 잡아세우며 흉흉한 눈빛으로 다그쳤다.

“너 학진이한테 뭐라고 했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조수아는 차가운 눈빛을 돌려주며 옅게 웃었다.

“왜, 내가 벌써 다른 물주를 물었을까 봐서 그래? 걱정 마. 아무리 굶었어도 나 당신 친구들한테는 손 안 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친 조수아는 어깨를 당당하게 편 채 간호사를 따라 채혈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육문주는 누군가가 심장에 대고 주먹을 친 것처럼 묵직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20분 후, 채혈실에서 나오는 조수아의 조막만한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탐스럽게 촉촉했던 입술마저도 혈색을 잃은 채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로 벽을 더듬으며 비틀거린 조수아는 간신히 문틀을 짚으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를 발견한 육문주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아들며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쪽에 병실을 잡아놨어. 거기 가서 잠시 좀 쉬자.”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송미진의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 하나가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송미진 씨 보호자분, 환자분께서 지금 정서가 매우 불안정하고, 보호자분을 계속 찾고 계세요. 지금 계속 울고 계시니까 빨리 와보셔야 될 것 같아요.”

조수아의 덤덤한 눈동자가 육문주에게로 향했다. 굳게 다문 입가에 조소가 얼핏 떠올랐다.

방금 전 채혈을 마치고 간호사가 혈액팩을 챙길 때부터 조수아는 이미 눈앞이 까매지며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채혈실을 나서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육문주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자그마한 기대를 품었었다.

조수아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곳에서 자신을 데리고 떠나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호사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헛된 망상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송미진과 자신을 두고 육문주가 선택할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잠시 망설인 육문주는 조수아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조수아는 차분하게 남자가 자신을 내려놓고 바삐 조수아의 병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숙여 젖어든 눈가를 감췄다.

“조수아 씨,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송학진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자 조수아는 이를 거부하며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학진 씨, 앞으로 저희 누구도 서로한테 빚진 게 없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겨우겨우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고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조수아는 끝까지 악으로 깡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송학진의 시선에서 벗어나 육문주가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안심이 된 모양인지, 조수아는 얼마 못 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앞이 까매지며 바닥으로 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얼굴부터 먼저 바닥에 부딪치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한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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