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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화 두려울 게 없어

면접을 보기 전에 먼저 필기시험을 봐야 했다.

필기시험은 그녀가 자신 있는 분야였다. 시험지를 바치고 연설아의 옆을 지나가던 그녀는 연설아가 아직도 시험지의 대부분 문제를 답하지 않은 걸 발견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조급한 기색이라곤 없이 방금 한 네일을 감상하고 있었다.

심지안은 왠지 이번 면접을 통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이 문득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기시험 결과 그녀는 합격하지 못했고 거의 최저점을 맞았다.

“말도 안 돼. 내가 이렇게 낮은 점수를 받았을 리가 없어!”

심지안은 면접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시험지를 공개하고 틀린 부분을 정확히 짚어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앉은 면접관 연봉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면접관마다 합격 기준이 다르긴 하지만 같은 건 하나 있어요. 과정이 어떻든 점수가 낮으면 불합격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소란 피우지 말고 당장 보광 그룹에서 나가요. 다른 면접자들의 귀한 시간을 뺏지 말고요.”

“전 단지 공정과 공평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다른 면접자들의 시간이 귀한 건 맞지만 저의 시간도 함부로 낭비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심지안은 허리를 곧게 펴고 진지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옆에 있던 면접자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다들 그녀가 왜 이토록 과하게 흥분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연설아는 입이 귀에 걸린 채 재미난 구경거리를 기다렸고 동영상을 촬영하여 심연아에게 보내려고 했다.

심지안은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연설아의 짓이라는 걸 알아챘다. 심지안을 내쫓은 면접관과 그녀에게 점수를 준 면접관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컸다. 만약 면접관이 그녀가 받아들일 만 한 이유나 문제점을 제대로 짚어줬더라면 못 이기는 척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녀는 프랑스에서 2년을 살았고 프랑스어 C2 등급까지 땄다.

보광 그룹에 인재가 많아 면접까지 통과하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그녀에게 최저점을 줬다는 건 그야말로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연설아가 중간에서 음모를 꾀하는 건 그렇다 쳐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면접관이 왜 그녀에게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고작 이런 방식으로 그녀를 난감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아니, 절대 난감해할 그녀가 아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으면 두려운 것도 없다고 차라리 일을 크게 벌여서 다른 담당자를 불러올 작정이었다. 이 큰 그룹에 다른 담당자가 없을 리 없다!

“보광 그룹을 의심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죠.”

그녀가 뭔가 알아챘다는 걸 눈치챈 연봉기는 다급하게 경비원을 불렀다.

“우리 업무에 방해되니까 당장 저 여자를 쫓아내요.”

보광 그룹의 경비원이 난진 그룹의 경비원보다 훨씬 더 힘이 셌다. 심지안이 피하려 애를 썼지만 결국 그대로 끌려 나갔고 팔과 종아리에 긁힌 자국까지 생겼다. 심지안은 너무도 아파 연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그녀는 잔뜩 구겨진 이력서를 내려다보며 억울하기도 하고 화도 났다. 어쩔 수 없이 화를 참아가며 이력서를 쓰레기통에 던졌지만 명중하지 못하고 쓰레기통 밖에 떨어지고 말았다.

밖에 떨어지든 말든 심지안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환경까지 생각할 기분이 아니었다.

전에 유명한 대기업 내에서 신입사원을 괴롭히고 따돌리는 뉴스를 자주 봤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21세기 문명사회에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제대로 느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밤을 새우면서 면접 준비를 하지 않았을 텐데... 차라리 면접 보러 가지 말 걸 그랬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몸의 상처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발목 쪽의 찰과상이 심해 계속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침 맞은편에 약국이 있는 걸 발견한 그녀는 아픔을 참고 절뚝거리며 횡단보도에서 길을 건너길 기다렸다.

“언니, 넘어졌어요? 발에서 피가 나요.”

횡단보도에 서 있던 한 여자애가 아주머니의 손을 잡고 심지안을 천진난만하게 쳐다보았다. 울분으로 가득 찼던 심지안의 표정이 민망함으로 바뀌었다.

“응. 실수로 그만 넘어졌어.”

“그럼 언니 엄마는 왜 옆에 없어요? 우리 엄마는 내가 넘어지면 엄청 걱정해요. 날 병원에도 데려가고 밥도 먹여줘요.”

“다른 사람한테 함부로 그런 질문 하지 말라고 했지? 사람마다 프라이버시가 있다고 했잖아, 잊었어?”

아주머니가 나지막이 한마디 하자 아이는 혀를 날름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을게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래도 안 돼. 다음에 또 이러면 일주일 동안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할 거야.”

심지안은 멀어져가는 모녀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거리가 멀어져 두 사람의 대화 내용도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리웠다.

심지안이 떠난 지 10분도 채 되지 않아 롤스로이스 한 대가 보광 그룹 문 앞에 멈춰 섰다.

성연신이 차에서 내렸다. 갑자기 바람이 휙 불어오더니 잔뜩 구겨진 뭔가가 그의 발밑으로 날아왔다.

그와 동행한 비서 실장 정욱은 어이가 없었다.

‘대체 누가 쓰레기를 함부로 버린 거야? 치우는 사람도 없고. 하필 걸려도 대표님한테 걸리냐.’

그가 허리를 숙여 주워보니 누군가의 이력서였다.

“심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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