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계란이가 큰 증조할아버지한테 배신을 당했다고?기화는 지극히 순수한 눈빛으로 복잡한 심경이 고스란히 드러난 우문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기화는 순간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생겨 우문호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사실 견역.... 그러니까 안풍친왕 전하는 본질적으로 늙은 여우 입니다. 그 점은 두 분다 알고 계시죠? 안풍친왕의 말은 1할만 믿어야 해요, 물론 1할도 안 믿는 게 최고지만요.”우문호가 조용히 이를 갈며 매서운 눈빛으로 물었다. “내 딸을 제자로 삼겠다고 하는데, 뭘 가르칠 수 있는가?”기화가 다소 의혹의 눈길로, “제가 못 가르칠 게 뭐죠? 전 뭐든 다 할 수 있는데요.”기화는 자세를 단정하게 고쳐 앉더니 엄숙한 태로도 답했다. “태자 전하, 저를 그저 전문성 없는 인간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이래봬도 수많은 일에 종사해 와서 경찰, 운전기사, 마술사, 도박꾼, 심부름꾼, 판매원, 보표 등 각종 분야 각종 업계를 두루 누비고 다녔습니다. 옅든 깊든 다 관여해 봤고 전에 사업도 했었는데.... 그런데 좌판도 사업은 사업이죠? 제자가 뭘 배우고 싶든 다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태생이 정직해서 안풍친왕 전하처럼 그렇게 뒤에서 인신매매같은 일은 절대로 하지 않지요. 이 점은 안심하셔도 됩니다.”‘이게 무슨 소리지?’ 우문호는 문득 울고 싶어졌다.사실 기화와의 말싸움에 성공할리는 없다. 기화가 북당을 위해 그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이제 와서 싸우면 배은망덕한 놈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싸운다고 해도 이길 승산이 없는 게, 정말 기화가 계란이를 안고 가는 날엔 계란이가 놀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했기 때문이다. 우문호는 잠시 생각해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렇게 큰 일을 아내와 상의하지 않을 수 없으니 상의한 뒤에 확실하게 답하도록 하지.”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자비 마마 의견을 존중해야죠. 어서 가서 물어보세요. 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우문호는 탕양에게 원경릉을 부르라고 하고 바로 소월각으로 갔다.원경릉도
기화가 우문호에게 얘기했다. “아내 분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수많은 에너지가 있죠.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물질도 많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그걸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런 물질을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 있어요. 예를 들면 불 같은 걸 말이죠. 우리는 불을 볼 수 있지만 많은 물질이 불꽃으로 전환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호흡하고 있는 공기 같은 것도 안에 연소가 가능한 기체 즉 산소나 수소 같은 게 있거든요. 공기 중에서 그 기체들을 뽑아내기만 하면 불을 붙일 수 있어요. 계란이는 그런 불씨를 구별해낼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가졌어요. 불씨에 재빨리 불을 붙여 기체를 연소시킬 수 있죠. 그래서 불씨를 제거한 거예요. 그럼 계란이는 기체를 제어하게 되도 쉽게 불을 붙여 커다란 화재를 일으킬 리는 없게 되죠. 계란이가 자라서 마음이 성숙해지면 이 능력은 다시 돌려줄 겁니다.”우문호는 눈을 멀뚱멀뚱 뜨고 당황한 채 물었다. “무슨 뜻이지? 계란....이가 공기 중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그게 뭐가 이상한데요? 우주에 에너지 물질이 이렇게 많은데 바람, 전기, 우뢰 등등등을 제어하는 사람도 있다고요.”“계란이는 왜 할 수 있지? 나는 제어 못 하는데?” 우문호가 묻자 기화가 우문호에게 말했다. “옆에 잔을 들어보세요.”우문호는 옆에 잔을 보고는 천천히 손을 뻗어 들어올렸다.기화가 만족스럽다는 말투로 설명했다. “보세요, 태자 전하는 컵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잖습니까? 전하의 대뇌가 구별해 낼 수 있는 에너지예요. 전하께서 어떤 물질을 제어할 수 있는지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건 후천적인 노력으로도 가능하죠. 예를 들어 무공을 수련하면 담을 뛰어 넘고 솜이나 낙엽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죠. 전하의 모든 행위는 전부 전하의 대뇌가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전하 대뇌의 발육 정도에 달려 있는 거죠.”우문호는 기화를 한참 쳐다보다가 벌떡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기다리게. 자네 말을
기화는 태자 부부에게 아이를 안으라고 했다. “전 이제 가보겠습니다. 이제 이 아이가 세살이 될 때부터 매년 한 달씩 와서 성년이 될때까지 제가 배운 걸 전부 가르쳐 주도록 하죠.”우문호가 딸을 안고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그럼 계란이가 지금도 여전히 불을 낼 수 있는 건가?”기화가 웃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제가 방금 말씀드렸을 텐데요, 불꽃숭이는 쉽게 연소하는 물질을 완전 장악하고 제어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의식에 의존해 불을 낼 수 없습니다. 만약 불꽃숭이 손에 부싯돌을 쥐고 있거나 초를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원하면 초왕부를 다 태워버릴 수도 있지요.”기화는 원경릉에게 예를 취하고, “태자비 마마 어딘가에서 곧 다시 뵙겠습니다.”기화는 말을 마치고는 바로 돌아서 나갔다. 그러자 우문호가 궁시렁거렸다. “어딘가는 뭐가 어딘가야? 3년 후에 오는 거잖아? 3년 후에 여기서 보자면 되는 거 아냐? 웬 신비주의 컨셉이야!”하지만 원경릉은 가슴이 철렁했다. 전에 주진이 한 말에 따르면 어쩌면 그날이 멀지 않았다. 원경릉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경호가 열릴 때까지만 버텨주기를 바랄 뿐이었다.어쩌면 이건 뇌 줄기세포 괴사의 조짐일지도 모른다. 만일 원경릉이 생각하는 최악의 사태가 나타날 경우를 대비해 미리 대비를 해야 했다.원경릉은 양여혜를 찾아가 시공간의 왜곡을 계속 지켜봐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시공간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면 경호가 제대로 작동할 게 틀림없기 때문이다.원경릉은 양여혜에게 만약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먼저 가서 원경릉을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양여혜는 원경릉을 데리고 간다고 해도 위험계수는 경호에 뛰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문제가 발생한 건 경호가 아니라 전체 공간으로 공간과 공간의 연결에 왜곡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전에 원경릉 일행이 갔을 때 다른 공간에 끌려들어갈 위험이 있었던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때는 양여혜 자력으로 억지로 끌고 올 수 있었지만 다음 번에도 시공간이 왜곡된 상황에서 사람을
원경릉이 진찰하기도 전에 할머니가 먼저 맥을 짚어보고는 원경릉을 보더니 가볍게 한숨을 내쉬셨다.원경릉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아 청진기를 들고 갔다. 사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진단뿐으로 증상에 따른 치료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할머니와 얘기 끝에 분명 주재상 스스로 내공을 운용하다가 혈관을 터트려 뇌경부에 압력이 다시 높아진 것 같았다. 터진 혈관을 통해 나온 피가 덩어리져 신경을 압박해 다시 실명한 것으로 일련의 증상이 더한 것으로 볼 때 핏덩어리가 압박하는 곳이 이미 상당히 전진해 신경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매우 커졌고, 바로 뇌 줄기세포의 괴사를 일으킬 것이다.어르신들의 퇴임 후 삶이 막 자리를 잡아가던 참으로 이런 큰 문제에 부딪히자 그야말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그런데 주재상은 오히려 긍정적으로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물러난 뒤로 희야랑 같이 있으면서 매일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지, 밤 늦게까지 일하다가 잠들 필요도 없지, 일출 보고 일몰 보고 꽃이 피는 걸 보고 꽃이 지는 걸 보고. 긴 시간 느긋하고 편하게 식사하고 차를 마셨으니 난 더이상 여한이 없다.”주재상의 말에 원경릉은 하마터면 정신이 무너져내릴 뻔 했다.태상황은 잿빛으로 타들어간 얼굴로 주재상을 위로하려 헀으나 자신에게 도울 힘이 아무것도 없는 지라 무슨 말을 해도 전부 허망할 뿐이었다.희상궁은 주재상 곁에 앉아 계속 손을 꼭 쥐고 있었다. 눈물이 눈에 그렁그렁 맺혔지만 죽을 힘을 다해 흘리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원경릉과 할머니가 각자 약을 처방해 한방과 양방을 혼합해 잠시라도 병세를 완화시킬 수 있는지 살폈다.하지만 수술말고는 정말 다른 방법이 없었다.게다가 시간을 언제까지나 끌 수 없어서 만약 병세가 심각할 경우, 금방이라도 일이 터질 지도 모른다.원경릉은 초왕부에 돌아와 대성통곡하며 울었다. 우문호는 괴로워하는 그녀 곁에 가만히 있을 뿐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원경릉은 산후조리중에 크게 마음을 상한 나머지 원기를 많이 잃게
“알겠어!” 우문호는 아마 만두에게 외할머니네 가서 주재상의 병세를 어떻게 치료할지 물어보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킬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우문호는 먼저 만두에게 갔다가 할머니를 부르러 갔다.만두와 경단이가 주머니에 약과를 넣어와 원경릉의 침대에 기어 올라가 건넸다. “엄마, 나 먹을 거 있는데 엄마 줄까?” 원경릉은 피곤했지만 애써 웃으며 말했다. “엄마는 안 먹어도 돼. 만두랑 경단이가 먹어. 엄마 머리 좀 봐.”만두가 손뼉을 치고 원경릉의 얼굴을 들고 이리저리 보더니 안색이 순식간에 어두워지고 목소리가 떨렸다. “엄마, 조금밖에 안 남았어... 거의 없어져 가니까.”경단이도 얼른 보더니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약과를 떨어뜨렸다. “어떡해? 거의 다 사라졌어.”“왜 이렇게 빠르지?” 만두가 중얼거리며 원경릉의 얼굴을 받쳐든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원경릉은 그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쩐지 행동이 너무 느렸던 게 연결이 끊어지며 생기는 문제였을 것이다. “엄마, 어떡해? 경호는 아직 갈 수 없는데.” 경단이는 무서워서 맨발로 침대에 기어올라와 원경릉 곁에 엎드려 입술만 삐죽거렸다. 당장이라도 울고 싶었지만 자신의 엄마가 슬퍼할게 분명했기에 그럴 수 없었다.원경릉은 심호흡을 하고 애써서 미소를 지으며 아이들을 다독거렸다. “당황하지 마, 방법이 있을 거야.”원경릉은 자신을 애써 진정시켰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만두에게 말했다. “넌 어서 밥 먹고 나서 자러 가렴. 주진에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물어봐.”만두가 정신없이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지금 가요, 지금 갈래요! 나 배 안 고파요!”만두가 이 말을 하며 얼른 밖으로 달려갔다가 문 앞에서 다시 돌아와 원경릉의 목을 끌어 안고 볼에 뽀뽀하며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먹거렸다. “엄마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 아무일도 없을 거예요. 기다리세요.”“우리 만두 착하지!” 원경릉은 만두가 이렇게 당황한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재상과 공부한 뒤로 줄곧 침착했던 만두
원경릉은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을 지으려는 듯, “한기가 도나봐요. 할머님, 얼른 감기약 지어주시면 될 것 같아요.”“맥 좀 먼저 짚어보고!” 할머니는 한동안 원경릉의 맥을 짚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우문호가 옆에서 보면서 할머니의 안색이 평소와 다르자 얼른 경단이를 내보내고 물었다. “할머니, 왜 그러세요?”할머니가 손을 바꿔 계속 맥을 짚으며 되는 대로 우문호의 말에 답했다. “며칠은 걸려야 나아지겠는 걸.”“그럼 계속 약을 먹어야 겠네요.” 우문호가 가슴 아파했다.할머니가 약간 어색한 목소리로, “넌 가서 손난로 가져오라고 해. 이불 속 좀 따듯하게 해주게. 두 손이 어찌나 찬지.. 원.”“네!” 우문호가 재빨리 뛰쳐 나갔다.할머니는 원경릉의 두 손을 이불 속에 넣고 원경릉의 경동맥을 만지더니 청진기로 심장 소리를 듣고는 살짝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왜요?” 원경릉도 자신의 맥이 이상하다는 걸 진작에 눈치챘으나 만두쪽에서 아직 소식이 없어서 일단 모르는 척 해야 했다.“심장박동도, 맥도 아주 엉망이야. 게다가 조금 멈추기까지 해. 너도 의사니 왜 그런지 알지? 네 대뇌의 약품이랑 관련이 있는 거니?” 할머니가 물었다.원경릉은 움찔움찔 움츠러들었다. 이쪽 방면으론 할머니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아서 이렇게 말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도 몰라요, 만두에게 자러 가서 주진에게 상황을 물어보라고 했어요.”“돌아갈 수 있니?” 할머니도 조금 당황하셨다.“경호로는 아직 못 가요. “ 원경릉이 한숨을 내 쉬었다.“그럼 다른 방법은 있고?” 할머니가 원경릉의 손을 잡고 물었다.원경릉도 할머니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 마세요. 주진한테 다른 방법이 있을 거예요.”할머니는 그다지 믿음이 가지 않지만 이 일에 할머니가 도울 수 있는 게 없었다.“우문호한테는 일단 모른척 해주세요. 만두가 주진에게 물어본 뒤에 어떤 상황인지 알면 그때 말하기로 해요.” 원경릉이 속삭이자 할머니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사위를 내
해동 과정이 이미 시작되어 원경릉의 신체가 탔을 경우 현대의 원경릉이든 북당의 원경릉이든 전부 생존이 불가능할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불안한 생각에 휩싸여 주진은 자신의 뺨을 몇 번이고 세게 때려댔다.“주진씨, 주진씨!” 정신없는 가운데 누군가가 빠르게 달려와 그를 애타게 외쳤다.주진이 얼른 일어나 보니 원경주가 흰 가운을 입은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주진은 또다시 눈물을 참을 수 없어 주저앉아 펑펑 울었다.원경주는 주진을 일으켜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동생은 구하셨나요?”주진이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아뇨. 아직 안에 있어요.”원경주가 경악하며 주진을 버려두고 불길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바로 소방대원들에게 막히자 원경주는 미친사람처럼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이거 놔. 내 동생이 안에 있어… 내 동생이 안에 있다고. 당장 이거 놔!”그러자 소방대원 얼굴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뭐요? 안에 아직 사람이 있다고요?”그러고는 서둘러 무전기를 들고 화재 현장에 있는 다른 소방원들에게 외쳤다. “긴급 상황, 긴급 상황. 화재 현장에 아직 사람이 있다. 어서 찾......”원경주는 소방대원이 얘기하는 사이에 그의 손을 뿌리치고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위험해요! 들어가면 안 됩니다.....!” 뒤에서 보안요원과 소방대원이 막으러 달려갔지만 원경주는 이미 안으로 뛰어든 뒤였다.모든 연구실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었고, 바닥에 불 탄 잔해들과 불을 끈 시커먼 물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동쪽 편은 아직 불이 타고 있어 소방대원이 높은 사다리에 올라 아직까지도 물을 뿌리고 있었다.원경주는 다른데 주의를 기울일 틈 없이 안으로 돌진했는데 소방대원이 와서 원경주를 잡자 원경주가 뿌리치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내 동생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으니 당신들은 어서 날 따라와요!”사람을 구하는 게 우선이고, 원경주가 이렇게 다급한 것을 보고는 소방대원 세 사람을 같이 보냈다.냉동실이 있는 12층에 들어서자 그야말로 눈
왕비 합방하다북당(北唐), 초왕부(楚王府) 봉의각(鳳儀閣)일렁이는 촛불에 방안 곳곳에 붙여 놓은 낡은 붉은 ‘희(喜, 축 결혼)’종이가 비치고, 금박의 대조가 어슴푸레한 느낌을 떨쳐내는 가운데 벽에 한 쌍의 그림자가 떠오른다.원경릉(元卿淩)은 원하지 않는 것을 참고 또 참는 얼굴이다.결혼한지 어언 1년, 그는 원경릉의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제 입궁했을 때 태후(太后)가 원경릉의 밋밋한 배를 보고 실망한 기색으로 후궁(侧妃)을 들이는 것에 대한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태후께 하는 수 없이 둘이 결혼한지 1년이 되었지만, 아직 합방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원경릉은 울고불고 고자질하는 것이 싫었다. 그러니까 그냥,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13살에 처음 그를 본 이래, 마음을 온통 그에게 빼앗겨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해 결국 그의 정비가 되었다. 제 아무리 차가운 돌덩이라도 뜨겁게 타오르게 하리라 믿었건만, 그건 단단히 착각한 거였다.서로 부부이고, 낭군이 분명했지만, 그의 눈빛에는 단 한 가닥 연민조차 없이, 오히려 집착에 가까운 증오만 있을 뿐이었다.“윽……”마음 속에 알 수 없는 원망이 솟구치며 그녀는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었다.선혈이 배어 나와 비릿한 피가 입안으로 방울져 들어갔다.그는 낮게 깔린 눈빛으로 훤칠한 몸을 일으켜, 한 손을 그녀의 얼굴 옆에 바짝 댄 채 얼음같이 냉정하게, “원경릉, 네가 바라던 대로 짐이 너와 합방했으니, 이제부터 짐은 너와 일체 타인이다.”원경릉은 절망과 슬픔의 웃음을 띄우며, “당신은 결국 절 미워하는군요.”푸른 옷자락 아래 초왕(楚王)의 건장한 몸매와 늘씬한 다리로 쭉 걷어차니, 탁자고 의자고 우당탕탕 넘어지며 물건이 사방에 떨어지고 깨지는 가운데 그는 경멸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미워한다고? 당치도 않은 소릴. 짐은 네가 혐오스러워. 짐의 눈에 너는, 더러운 벌레만도 못한 존재야. 사람을 증오심에 불타게 한다고. 아니면 짐이 약의 힘까지 빌려 너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