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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병원, 남지훈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낯익으면서도 낯선 환경에 그는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지훈 씨, 드디어 깨어났네요!"

남지훈이 정신을 차린 걸 확인한 남자가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지훈의 직장 동료 이현수였다.

"어떻게 된 거예요?"

남지훈이 이현수를 멀뚱멀뚱하게 바라보았다.

이현수가 입을 열었다.

"지훈 씨, 죽다 살아난 거 알아요?. 대표님 사무실에서 감전돼서 쓰러졌잖아요. 바로 병원으로 이송돼서 다행이었어요.”

그 말에 방금 전 발생했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르며 남지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김명덕을 죽이려 했으나 예상치 못하게 김명덕과 주먹다짐을 한 꼴이 되다니.

남지훈을 힐끗 바라보던 이현수가 말했다.

"지훈 씨 깼으니까 전 회사로 돌아갈게요. 지훈 씨, 오늘 있었던 일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이현수는 병원을 떠났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니. 알쏭달쏭한 말이었지만 그것에 대해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까.

‘부모님... 아직 병원에 계실 텐데?’

벌떡 일어난 남지훈이 부랴부랴 수술실로 달려갔다. 남지훈의 어머니와 누나 남가현이 수술실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

“어머니! 누나!”

수술 중이라는 불이 켜진 걸 본 남지훈이 부랴부랴 달려갔다.

아들의 얼굴을 확인한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지훈아, 미안해... 부모가 돼선 너한테 폐만 끼치네.”

“어머니,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는요?”

남지훈의 질문에 눈물을 훔친 어머니가 대답했다.

“의사 선생님이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셨으니 믿어야지. 그런데 수술비는 어쩌면 좋겠니? 네 누나가 180만 원은 보탰는데...”

이에 남지훈이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어떻게든 마련할 테니까 어머니랑 아버지는 몸만 잘 챙기세요! 누나, 급한 불이라도 꺼줘서 고마워.”

빠듯한 살림살이에 180만원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 돈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남지훈은 누나가 안쓰러웠다.

잠시 후, 비상계단으로 향한 남지훈이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네. 나 지훈이.”

남지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쳤다.

어떻게든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쉬운 소리를 이어갔지만 친구의 거절로 결국 통화 종료.

그 뒤로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화를 돌려봤지만 모두 같은 답변만 돌아왔다.

그렇게 한참 휴대폰을 뒤적거리던 그는 저장만 했지 단 한 번도 걸어본 적 없는 번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남지훈의 고등학교 동창, 소연.

지난 번 동창회에서 예의상 연락처를 교환하긴 했지만 통화 한 번, 문자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이다.

기억 속의 소연은 도도한 성격의 전형적인 부잣집 아가씨였다.

평소 연락 한 번 안 하던 동창의 부탁을 들어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남지훈은 결국 그 번호를 터치했다.

몇 번의 연결음이 들리고 차가운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깊은 한숨을 내쉰 남지훈이 대답했다.

“혹시... 소연이?”

“맞는데 누구시죠?”

“나야, 남지훈.”

대답을 마친 남지훈의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솔직히 소연이 그를 기억하고 있을지 조차 미지수였으니까.

“남지훈? 아, 무슨 일로 전화했어?”

‘하, 다행이다.’

애꿎은 입술만 깨물던 그가 조심스레 말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지? 그게... 내가 지금 집안 사정 때문에 급전이 좀 필요한데. 돈 좀... 빌릴 수 있을까?”

말을 마친 남지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같은 반이긴 했지만 말 몇 번 나눠본 적 없는 사이, 학창시절에도 그랬으니 졸업하고 나서 서로 연락을 주고 받았을 리 만무했다.

말이 좋아 고등학교 동창이지 그저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는 사람의 금전적인 부탁에 어느 누가 흔쾌히 응할까?

영겁 같은 침묵이 흐르고 소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가 필요한데?”

‘설마...?’

그녀의 한 마디에 남지훈의 눈이 반짝였다.

“천... 천팔백만 원...”

“그래. 너도 J시에 있다고 그랬지? S그룹 로비에서 기다려.”

소연은 남지훈이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리고 그는 병원 벽을 따라 스르륵 내려앉았다.

쥐꼬리 같은 월급에 그나마 남은 돈은 전부 이효진을 위해 써왔던 남지훈에게 모아둔 돈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었다.

1800만 원, 남지훈에겐 태산처럼 느껴지던 거금을 선뜻 빌려주겠다고 말하다니.

기쁘면서도 이게 두 사람의 경제적 차이를 말해 주는 듯해 어딘가 씁쓸하기도 했다.

엄마와 누나에게 대충 둘러댄 남지훈은 급히 병원을 나서 S그룹으로 향했다.

T그룹과 함께 J시에 최고의 그룹이라 불리는 S그룹.

‘한때 나도 여기 이력서를 넣었었지. 물론 다 떨어졌지만...’

상위 0.01% 엘리트들만 다니는 대기업,

우뚝하게 솟아오른 사옥을 본 남지훈의 얼굴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다.

‘하긴, 소연인 공부도 잘했으니까 이런 데서 출근할 만도 하지.’

잠시 후 또각또각 하이힐 소리와 함께 늘씬한 여자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도도하고 차가운 분위기에 남지훈은 왠지 주눅이 드는 기분이었다.

“남지훈?”

소연의 우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연아... 그게...”

하지만 남지훈이 말을 끝내기 전에 소연이 말을 잘랐다.

“됐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어. 네가 오죽 급했으면 나한테까지 전화를 했겠어. 돈은 내가 얼마든지 빌려줄 테니까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말해. 뭐,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아버지의 목숨값이나 다름없는 수술비 1800만원을 선뜻 내놓은 소연의 부탁이라면 하나가 아니라 10개, 100개도. 아니, 그냥 노예로 부려먹겠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남지훈을 힐끗 바라보던 소연이 물었다.

“너 결혼은 했어?”

하지만 예상치 못한 질문에 남지훈의 사고가 순간 정지되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묻는 거지?’

“아직. 여자친구는 있는데... 헤어져야 할 것 같아.”

이상했지만 남지훈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럼 됐네.”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낸 소연이 말을 이어갔다.

“바로 헤어질 수 있는 거지? 두 사람 감정 싸움에 끼게 될 일은 없겠네. 서류 내용 확인해 봐. 문제 없으면 사인해. 그럼 1800만 원, 바로 쏴줄 테니까.”

여전히 의아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아든 남지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결혼... 계약서?’

이혼 합의서는 들어봤어도 결혼 계약서는 처음인 남지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3년 사이에 가짜 부부 사이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스킨십 같은 건 안 되고 계약 기간이 종료되면 이혼 합의금 명목으로 한 몫 두둑히 챙길 수도 있었다.

3억...

지금 그가 받는 월급으로 십 년 넘게 먹지도 쓰지도 않고 모아야 모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그런데 왜 나한테 이런 제안을 하는 건데?”

남지훈이 바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내뱉었다.

3억을 척척 내놓을 수 있는 걸 보아하니 부자인 건 분명할 테고 외모에 능력에 모자랄 것 없는 그녀다.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달려들 남자들이 줄을 설 텐데 왜 굳이 이런 조건까지 달아가며 계약 결혼을 하려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게다가 왜 하필 나야?’

그래도 나름 몇 년간 직장생활로 잔뼈가 굵은 남지훈은 사람들은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아버지 수술비는?

더 이상 손 벌릴 데도 없었던 남지훈이 결국 이를 악물었다.

“그래!”

3년, 3년만 견디면 아버지 수술비는 물론 거액의 합의금까지 챙길 수 있다. 게다가 소연은 어디 내놔도 부족한 여자는 아니었으니. 남지훈이 손해 볼 일은 없는 거래였다.

남지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소연이 시간을 확인했다.

“주민등록증은 챙겼지? 한 시간 뒤에 구청에서 보자. 오늘 혼인신고 끝내는 거야. 나 바쁘니까 늦지 마.”

이 말을 마지막으로 소연은 홱 돌아서고 남지훈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 시간 뒤.

“띵동.”

돈이 입금되었다는 문자 알림에 멍한 얼굴로 혼인신고서와 스카이팰리스 키를 든 남지훈이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게... 지금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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