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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어딜 가나 있는 사람

객실로 도망쳐 온 이진은 이미 정리된 침대 위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뭐라도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더니 이내 옷 벗는 소리와 물줄기 소리가 쏴아아 흘러나왔다.

저녁 내내 남자의 품에서 잤다는 생각만 하면 이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방금 남자의 손이 턱에 닿았다는 게 너무 싫었다.

한참 뒤 욕실에서 나온 이진의 턱은 이미 벌겋게 되어 있었다. 남자의 스킨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샤워 덕에 조금 진정을 되찾아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진은 짐을 대충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케빈에게 전화를 했다.

물론 다시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지만 앞으로 3개월 동안 더 이 곳에서 지내려면 짐은 정리해야 했다.

그러던 끝에 전화 건너편에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스, 무슨 일이에요?”

“전에 말했던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일정 앞당길 수 있어?”

“보스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그거 말하는 거예요? 전에 거절했잖아요?”

“일정 잡고 티켓 예약해 줘.”

케빈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진은 명령조로 말했다.

건너편의 케빈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명령을 받들고 전화를 끊었다.

사실 전에는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 그녀는 전혀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콩쿠르 사이트에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이영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씩 올라갔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 시각 윤이건의 비서가 스케줄 일정과 비행기 시간을 그의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윤 대표님, 이번에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대표님께서 후원자로 참석하셔야 합니다.”

…….

이틀 뒤, 이진이 비행기 일등석에 탄 순간 익숙한 얼굴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

“윤 대표님은 참 이상하게 어딜 가나 항상 보이네요.”

이진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하지만 이진을 보는 순간 놀란 건 윤이건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탑승한 비행기는 중간에 경유하는 곳이 따로 없었기에 목적지가 같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배제하고 난 뒤 윤이건이 끝내 떠보듯 입을 열었다.

“혹시 이진 씨도 콩쿠르 참석해?”

사실 윤이건이 말하기 전에 이진은 그의 출장지가 어디인지 몰랐다. 그런데 이 한마디를 들은 순간 마음이 싸늘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목적지가 같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피아노는 언제 배웠어? 왜 한 번도 말한 적 없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던 이진은 옆에서 들려오는 끊임없이 조잘거리는 질문에 어쩔 수 없이 천천히 눈을 떴다.

보아하니 이번 여정은 몸과 마음이 피곤한 여정일 듯 눈에 선했다.

임시 출장을 가기로 결정한 것도 윤이건 한테서 벗어나려던 목적이었는데 오히려 호랑이 굴에 제 발로 들어선 꼴이니…….

대답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내내 끊임없이 물어올 거란 생각에 이진은 끝내 입을 열었다.

“그게 뭐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고.”

이진은 윤이건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게다가 윤 대표님이 저에 대해 모르는 건 아직 많아요. 바쁘신 분 잡고 제 일을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잖아요.”

“아니야 괜찮아. 난 들을 준비 다 되어있어.”

이진은 윤이건의 자존심에 더 이상 묻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알고 보니 그녀도 윤이건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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