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유연서요?”차에 오른 이진은 마침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더니 귀에 익은 이름을 듣는 순간 입꼬리를 씩 올렸다.만약 그녀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유연서는 윤이건이 사랑하는 상대다. 그녀와 결혼한 지난 몇 년간 윤이건이 매일이다시피 병원에 찾아갔던 그의 빛과도 같은 존재.그런데 그 유연서가 자기가 맡을 환자가 됐다니 세상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방금 전 아직 이혼 서류에 사인하지 않았다고 말하던 윤이건의 말이 생각나 이진은 몸을 떨었다.‘윤이건의 옛사랑을 구해주라고?’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리던 이진은 뭔가 좋은 수라도 생각난 듯 눈을 반짝였다. 상대에게 이혼을 요구할 좋은 수가 떠오른 것이다.그리고 무심결에 백미러로 그녀의 모습을 본 케빈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보스가 이렇게 웃는다는 건 누군가 재수 없을 거란 예고인데 그 불쌍한 상대가 누구일지 궁금했다.그 시각 병원.빠른 걸음으로 유연서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도착한 윤이건은 지금껏 본 적 없는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이건 오빠, 왔어?”침대에 누워있던 유연서는 윤이건을 보는 순간 가슴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거렸다.그리고 순간 뭔가 생각난 듯 입술을 꽉 깨물며 팔을 들어 올렸다. 넓은 환자복이 쭉 흘러내리며 드러난 팔에는 흉측한 화상 자국이 보였다.“움직이지 마.”그 모습에 윤이건은 가슴이 아팠는지 다급히 다가오며 수척한 유연서를 위해 이불을 덮어주었다.눈에 드리운 차가움도 그 화상 자국을 보는 순간 미안함으로 뒤바뀌었다.그때 유연서가 그를 구해주려고 나서지만 않았어도 이런 흉측한 상처가 나지는 않았을 텐데.“의사 선생님이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너 아직 몸이 약한데 이렇게 갑자기 움직이면 안 돼…….”나직한 소리와 걱정 가득한 눈빛에 윤이건이 아직도 미안해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자 유연서는 그제야 윤이건 몰래 입꼬리를 씩 올렸다.“다른 사람이라면 내가 이러지도 않아…… 오빠라서 이러는 거지…….”윤이건이 병문안 온 이 기회에 더 가까워져
병원 관계자들은 이진의 성격을 모두 잘 알고 있다. 평소에 다가가기 쉬운 성격이 매번 일에 열중할 때면 차갑게 변하곤 했으니.유연서가 뭐라도 말을 꺼내 분위기를 호전시키려던 그때 이진의 축객령을 받은 윤이건은 눈을 번뜩이더니 이내 몸을 돌려 나갔다.곧이어 수술 예약 시간에 맞춰 유연서는 수술실로 옮겨졌다.그 뒤를 따라 들어간 이진은 아무런 잡생각도 하지 않았다. 수술 과정은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매번 봐도 놀라운 실력에 이번에도 어시와 간호사들은 모두 감탄을 자아냈다.그리고 그 시각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틈에 윤이건은 다른 간호사들에게 이진에 관해 캐묻고 있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 때문에 결국 참지 못했다.“평소 병원에 오시지 않으세요. 하지만 해결하지 못하는 건만 있으면 언제나 제일 먼저 달려와서 해결하십니다.”윤이건의 잘생긴 얼굴을 본 간호사들은 한마디라도 더 해보려는 듯 아주 상세하게 설명했다.하지만 이진을 입에 올리는 순간 오히려 더 기뻐하는 눈치였다. 마치 좋아하는 연예인 이야기라도 하는 듯 눈이 반짝였다.“맞아요. 의술이 뛰어난 건 두말할 것도 없고 평소에도 저희한테 얼마나 잘해주는데요. 저희하고 다 친해요.”몇몇 간호사들은 윤이건의 물음에 대답하는 듯싶더니 저들끼리 신나서 대화했다.그리고 그 시각 윤이건은 수술실 앞에 쓰인 글을 빤히 쳐다봤다.[집도의: 이안.]순간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두 사람이 결혼한 3년 동안 그는 이진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공기처럼 대했다.하지만 고작 하루 사이에 그 상대가 외모와 성격 심지어는 신분까지 완전히 바뀐 사람으로 나타났다.‘대체 나한테 얼마나 더 숨기고 있었던 거야?’수술은 장장 5시간 동안 지속됐다. 수술실 불이 켜진지 한참이 지나서야 수술실 문이 천천히 열렸다.그리고 수술실 안에서 나온 이진은 마스크와 일회용 수술복을 벗은 뒤 지친 얼굴을 드러냈다.순간 요동치는 마음을 진정하면서 앞으로 다가간 윤이건은 지금 자기가 느끼는 감정이 뭔지조차 몰랐다.“고생했어.
윤이건의 표정을 보아하니 오늘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도 타지 못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5시간 동안 이어진 수술 때문에 이진은 설명할 힘조차 없어 귀찮은 듯 옷을 위로 들어 허리에 난 큰 화상 자국을 훤히 드러냈다.“윤 대표님, 제 의술을 의심하지 마세요. 뜨거운 물에 데인 것과 불에 탄 화상은 엄연히 다릅니다. 제가 그걸 헷갈릴 가능성은 더욱 없고요.”충격을 받은 윤이건의 표정을 무시한 채 이진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이제 아시겠어요? 대비가 선명하죠? 이거야말로 불에 탄 화상이에요. 유연서 씨 상처는 뜨거운 물에 데인 거고요.”이진은 말하면서 허리에 나 있는 화상 자국을 가리켰다.“이 화상은 언제 생긴 거지?”윤이건의 뇌리에 갑자기 뭔가 언뜻 스쳐 지났다.“어릴 적에 생긴 상처예요. 윤 대표님이 제 어린 시절에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네요.”생각하고 나니 웃음이 났다. 눈앞의 남자와 부부로 지냈는데 그 앞에서 살을 드러내는 것이 오늘이 처음이라는 게.그 시각 윤이건은 이진의 얼굴을 보고 있던 눈빛을 그녀의 허리 쪽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 흉터를 보는 순간 눈을 떼지 못했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로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의술의 의자도 모르는 그가 봐도 두 상처가 다르다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유연서의 흉터가 불에 탄 화상이 아니라니. 그날의 불길 속에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절규가 아직도 명확한데, 그때 맡았던 옷 타는 냄새와 피부가 타는 냄새가 아직도 명확해 마음이 미어질 듯 아픈데. 그때의 여자애를 설마 착각했었나 라는 생각마저 들었다.방금 전 봤던 유연서의 모습과 지금 눈앞에 있는 이진의 모습을 보자 이상한 무언가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이 일을 어떻게 헷갈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을 착각할 수 있을까? 그는 반드시 그때의 일을 다시 알아봐야 했다. 그때 목숨을 바쳐 자기를 구해주던 여자애가 누구인지.이진은 윤이건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아무런 흔들림도 없었다.“설명 끝났으니 전
이진은 윤이건에게 더 이상 말 할 기회도 주지 않고 곧바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녀가 향한 곳은 윤씨 가문 별장이었다.오늘 아침 너무 기쁜 나머지 집을 나서기 전 짐도 열어보지 않은 터라 떨어트린 물건이라도 있나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이진이 돌아오자 집사는 환한 표정으로 그녀를 맞았다. 하지만 그녀가 짐을 가지러 왔다는 걸 알자 곧바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작은 사모님, 저희 도련님과는 정말…….”“김 집사님, 그렇게 얘기하셔도 소용없어요.”이진은 집사에게 싱긋 웃고는 2층 객실로 향했다.그래도 3년간 살았던 공간이라서 그런지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이러한 아쉬움이 고작 짧은 한순간 사라질 감정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그런데 그녀가 남은 물건을 정리하려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어디 가는데?”체념한 듯 몸을 돌린 그녀 눈에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윤이건이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그녀를 보고 있었다.“평소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시던 분이 이 시간에 집에 나타날 줄은 몰랐네요.”이진의 냉소를 무시한 채 윤이건은 아까 전에 했던 얘기를 계속했다.“지금 우리의 혼인 관계가 끝난 게 아니기에 나갈 수 없어.”그 말에 이진은 자기 귀를 의심했다.하루 사이에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윤이건이 낯설기까지 했다.“그리고 객실 짐이 모두 빠진 걸 확인했을 테니 오늘은 침실에서 자.”윤이건의 담담한 표정을 보자 이진은 어이없는 듯 풉- 웃음을 터뜨렸고 이내 손에 든 물건들을 빈 침대 위에 던져버렸다.3년을 참았는데 겨우 3개월을 못 참을까!하지만 그날 밤, 침실 침대에 누워있던 이진은 윤이건이 욕실에서 걸어 나오는 걸 보는 순간 자기 결정을 후회했다.젖은 머리에서 떨어진 물방울은 남자의 근육을 따라 천천히 흘러 내리다가 허리에 두른 타월 사이로 스며들며 사라졌다.“옷, 옷 좀 입어요.”무심하게 머리를 털던 윤이건은 그 말을 듣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진의 눈길을 따라
“작은 사모님…….”2층에서 내려오는 사이 메이드들을 지나칠 때마다 이진은 꼭 이 호칭을 한 번씩 들었다. 발로 생각을 해도 그들이 누구 명령을 따랐는지 알고는 있었지만 아무 잘못도 없는 메이드들한테 화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그저 주방에서 달걀 프라이를 하면서 그 달걀을 윤이건이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미쳤어! 미쳐도 아주 단단히 미쳤어.”“왜? 어제 안고만 자서 실망했나?”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진은 화들짝 놀라 펄쩍 뛰었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프라이팬에 있는 달걀프라이를 떨굴 뻔했다.“이봐요! 좀 그렇게 갑자기 사람 뒤에 나타나지 않으면 안 돼요?”몸을 돌리자 눈앞에 보이는 윤이건의 얼굴에 이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분명 둘 다 원했던 이혼이었는데 그 당사자가 하루 이틀 미루며 이혼서류에 사인하지 않는 것도 모자라 매번 이렇게 예측할 수 없는 이상한 행동을 해대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자기야 섭섭하네. 내가 뒤에 있는 게 나빠 아니면 자기가 나 없는 틈에 내 흉을 보는 게 더 나빠?”윤이건은 이진을 빤히 쳐다봤다.널찍한 잠옷 차림에 대충 묶어 맨 머리 그리고 화장기 하나 없는 뽀얗고 맑은 피부.그는 이진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지금껏 이렇게 맑고 깨끗한 사람도 본 적 없었다.게다가 그녀가 턱을 쳐들고 앙큼하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자기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방금 다 들었잖아요. 그러면 뒤에서 흉본 게 아니죠.”‘음, 성격도 까칠하네.’윤이건의 행동에 짜증이 난 이진은 홱 몸을 돌렸다. 하지만 무의식 적으로 달걀 프라이 하나를 더 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결국 두 사람의 아침이 준비됐다.식탁에 앉은 윤이건은 화가 난 듯 샌드위치를 사각사각 써는 이진을 보자 피식 웃었다.그리고 포크와 칼로 천천히 샌드위치 모퉁이를 베어 입에 넣었다.하지만 약 2초 정도 흐른 뒤 갑자기 멈칫 동작을 멈췄다.“왜요? 입에 넣고 나서야 제가 독이라도 탔을까 겁나세요? 반
객실로 도망쳐 온 이진은 이미 정리된 침대 위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그리고 뭐라도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욕실로 달려가더니 이내 옷 벗는 소리와 물줄기 소리가 쏴아아 흘러나왔다.저녁 내내 남자의 품에서 잤다는 생각만 하면 이진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방금 남자의 손이 턱에 닿았다는 게 너무 싫었다.한참 뒤 욕실에서 나온 이진의 턱은 이미 벌겋게 되어 있었다. 남자의 스킨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 수 있었다.하지만 샤워 덕에 조금 진정을 되찾아 그나마 다행이었다.이진은 짐을 대충 정리하면서 핸드폰을 꺼내 케빈에게 전화를 했다.물론 다시 이 집에 들어와 살아야 한다는 게 싫었지만 앞으로 3개월 동안 더 이 곳에서 지내려면 짐은 정리해야 했다. 그러던 끝에 전화 건너편에서 케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무슨 일이에요?”“전에 말했던 국제 피아노 콩쿠르 일정 앞당길 수 있어?”“보스가 심사위원으로 참가하는 그거 말하는 거예요? 전에 거절했잖아요?”“일정 잡고 티켓 예약해 줘.”케빈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진은 명령조로 말했다.건너편의 케빈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명령을 받들고 전화를 끊었다.사실 전에는 초대장이 날아왔을 때 그녀는 전혀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콩쿠르 사이트에 올라온 참가자 명단을 확인하는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이영 그 이름을 보는 순간 그녀의 입꼬리는 자신도 모르게 씩 올라갔다.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그 시각 윤이건의 비서가 스케줄 일정과 비행기 시간을 그의 핸드폰으로 보내왔다.“윤 대표님, 이번에 열리는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대표님께서 후원자로 참석하셔야 합니다.”…….이틀 뒤, 이진이 비행기 일등석에 탄 순간 익숙한 얼굴이 그녀 눈에 들어왔다.“윤 대표님은 참 이상하게 어딜 가나 항상 보이네요.”이진은 화가 난 듯한 말투로 자리에 털썩 앉았다.하지만 이진을 보는 순간 놀란 건 윤이건도 마찬가지였다.그들이 탑승한 비행기는 중간에 경유하는 곳이
이진은 끝내 체념했다. ‘이 사람 진짜 미친 건가?’하지만 아쉽게도 상대방이 미쳤다는 사실이 불쌍하다거나 그의 미친 짓에 함께 동참할 생각은 없었다.“윤 대표님이 이야기에 이렇게 관심이 있는 줄 몰랐네요. 그런데 제가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기도 하고 좀 피곤해서요.”말을 마친 이진은 상대가 대답하기도 전에 거짓 웃음을 짓더니 의자를 뒤로 젖혀 누워버렸다.윤이건은 눈 앞에 벌어진 황당한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그는 단 한번도 살면서 누군가에게 먼저 나서서 이야기를 들어주겠다며 말해본 적도 없었고 더욱이 이렇게 단칼에 거절당한 적도 없었다.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이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본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그리고 그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전화벨이 울렸다.귀찮은 듯 눈살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손에 든 순간 액정에 뜬 이름이 눈에 들어왔고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리고 전화를 받았다.“윤 대표님…….”“이영 씨, 무슨 일이죠?”한번도 이영의 이름을 부르지 않던 그는 일부러 이진에게 들려주기 위해 다정하게 이름 세 글자를 불렀다.하지만 그 상황을 알리 없는 전화 건너편의 이영은 부드러운 목소리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이건 오빠…….”아예 대담하게 호칭을 바꾸면서도 긴장되긴 했는지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하지만 윤이건은 그 호칭을 들은 순간 낯빛이 어두워졌다.“이건 오빠, 오빠가 이번 피아노 콩쿠르 후원자라는 거 알아요. 혹시 제가 그 콩쿠르에 나간다는 거 알고 있어요?”솔직히 이영이 콩쿠르에 나가는지 윤이건은 몰랐다. 혹은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하지만 목적을 위해 전화를 끊으려는 충동을 눌러 참았다.“그래요, 알아요.”“그러면 혹시 저한테 힘 좀 실어주면 안 돼요? 저한테 이번 콩쿠르가 엄청 중요해서요.”현재 방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이영의 손은 이미 땀으로 흥건했다.예전 같았으면 윤이건한테 전화를 걸면 윤이건은 아예 받지 않거나 그녀 혼자 한참 동안 떠들어댈 때 대충 몇 마디 하다가 인사도
처음 받아보는 대접이라 새로워서 그런지 윤이건은 이진한테 더욱 이끌렸다.그는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뻗어 이진의 얼굴을 살짝 만졌다. 순간 온기가 그의 손에 느껴졌다.지난번 병원에서 이진 허리에 있는 흉터를 보는 순간 그는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그리고 일부러 물에 데인 화상과 불에 탄 화상에 대해 알아봤다. 물론 이진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 사실이 그에게 있어서 너무 중요하기 때문이었다.그가 한참 동안 기억 속에 빠져 있을 때, 이진이 잠꼬대를 하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에 놓인 손을 꽉 붙잡았다.그 감촉에 윤이건의 눈은 한층 어두워졌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복잡한 심정을 애써 숨겼다. 이혼서류에 사인을 하고 난 뒤 180도로 변해 있는 이 여자를 깊은 눈으로 바라봤다.“대체 나한테 뭘 더 숨기고 있는 거야?”이진한테 잡힌 손을 천천히 빼낸 그는 이진의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정리해 주고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요즘 들어 그는 종종 어릴 적 겪었던 그 화재 현장을 꿈에서 본다.코를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와 활활 타오르며 일렁거리는 불길 속에서 그는 여기서 죽는구나 라고 생각했었다.그런데 그 순간 그보다도 더 마른 어린 여자애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잡고 화재 현장에서 몸을 피했다. 그러던 그때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불길이 세게 번졌고 귓가에 귓가에서 아이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아!”윤이건은 그때 어린아이가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얼마간 지난 뒤 두 사람은 겨우 불길 속에서 도망쳐 나왔다.그때의 하늘은 이미 어두워져서 어둑어둑했지만 윤이건은 여자애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한다.연기 때문에 군데군데 검게 그을리긴 했지만 여자애는 여전히 예뻤다.“너 이름이 뭐야…….”갈라지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물었지만 그는 아쉽게도 여자아이의 대답을 듣기 전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병원에 누워 있었고 그 여자아이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