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이 한참을 걷던 그때, 소은정이 웃으며 다가갔다.“오빠, 선물 다른 걸로 주면 안 돼?”“뭔데?”“요즘 회사에서 맡은 프로젝트가AI분야에 관한 거거든? 오빠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소은찬은 모든 나라에서 욕심내는 천재 학자, 기업의 연구원으로 있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인물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좋은 인맥을 두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소은찬은 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근데 휴가를 1달밖에 못 받았는데. 괜찮겠어?”“괜찮지 그럼.”목적을 달성한 소은정은 장난스레 웃으며 카드를 흔들었다.“뭐 이것도 일단 받아둘게. 고마워, 오빠.”한편, 박수혁과 강서진도 누군가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공항에 도착한 상태였다.이리저리 고개를 빼들던 강서진은 누군가를 발견하고 박수혁의 옆구리를 찔렀다.“와, 여기서 또 보네. 소은정이잖아?”소은정 옆에는 단정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분위기의 또 다른 남자가 있었다. 고개를 든 박수혁의 시야에 소은정의 얼굴이 들어왔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와 우아한 블랙 원피스, 그녀는 낯선 남자를 향해 애교 섞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소은정을 발견한 박수혁은 뭔가에 홀린 듯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 소은정과 소은찬의 대화가 그대로 들려왔다.“그런데 왜 이혼한 거야?”“죽었어.”소은정이 덤덤한 말투로 대답했다.“아, 그래.”소은찬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소은정의 대답에 박수혁과 강서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박수혁은 멀어져 가는 그녀가 다시 돌아봐주길 바라는 마음에 소은정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그만 봐. 형은 이미 죽었다잖아.”강서진이 웃으며 박수혁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때, 비서가 보낸 사진이 도착하고 박수혁에게 더 중요한 일 얘기를 하려던 순간, 강서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비서가 보낸 사진은 바로 오늘 두 사람이 스카우트하려던 남자의 사진, 그리고 그 사진의 얼굴은 분명 방금 전 소은정의 옆에 있던 그 남자였다.“으악!”깜짝 놀란 강서진이 소리를 지르고 미간
“끝났네. 소은정과 아는 사이일 줄이야. 아주 그냥 베프처럼 보이더구만!”강서진이 혀를 찼다. 소은찬이 귀국했다는 소식은 극비, 거금을 들여 겨우겨우 스케줄을 알아냈는데 눈앞에서 빼앗기다니. 강서진의 말에도 박수혁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한편, 본가에 도착한 소은정과 소은찬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소은해의 비명소리와 소찬식의 분노 어린 고함을 듣고 자리에 멈춰 섰다.멈칫하던 소은찬이 말했다.“집 하나만 얻어줘. 조용한 곳으로.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없으면 더 좋고.”두 눈을 깜박이던 소은정이 장난스레 물었다.“흉가는 어때?”“뭐 상관없어.”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간 순간, 소은해가 소은정에게 안기며 말했다.“드디어 왔네. 나 좀 살려줘.”소은정이 질색하며 오빠를 밀어내려던 순간, 소은찬을 발견한 소은해가 소리쳤다.“형!”소은찬도 보기 드문 미소를 보여주며 대답했다.“꼬마야.”“젠장!”소은찬의 말에 소은해는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꼬마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내 나이가 몇 살인데!”“누군데?”사람들 목소리에 역시 현관으로 나온 소찬식도 소은찬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달려갔다.“은찬아...”뒤를 따라온 소은호도 다시 모인 가족들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오랜만에 돌아온 도련님의 모습에 집사도 기뻐하며 직원들에게 음식들을 준비하고 도련님이 지내실 방을 정리하라고 분부했다.3년 만에 돌아온 소은찬은 엉망이 된 집안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뭐 전쟁이라도 났어요?”방금 전까지 상봉의 기쁨에 활짝 웃고 있던 소찬식이 바로 미간을 찌푸렸다.“은해 이 자식이 글쎄 요리를 하겠다더니 그 귀한 능지 버섯을 아주 다 망가트렸어! 안 되겠다. 너 오늘 좀 맞자!”소찬식은 자연스레 골프채를 들고 소은해를 향해 달려갔다.쫓고 쫓기는 소찬식과 소은해를 뒤로하고 소은호는 여유롭게 소파에 앉았다.“아예 들어오기로 한 거야?”소찬식은 집사가 건넨 탄산수를 한 모금 마시고 대답했다.“한신연구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 거기서
“신나리 씨, 오빠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호랑이도 오빠가 마음에 든 건 가봐. 참, 신나리 씨도 거성그룹 연구팀에 있어. 오늘 곧 만나게 될 거야.”소은찬은 어깨를 으쓱한 뒤 소호랑을 다시 소은정에게 넘겨주었다.“호랑아, 우리 나리 씨 만나러 갈 거야...”“엄마, 나 잘생긴 삼촌한테 안기면 안 돼요?”소호랑이 소은정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렸다.“오빠...”소호랑의 부탁에 소은정도 소호랑의 표정을 따라 하며 소은찬을 바라보았다.세계 최고의 물리학자인 소은찬에게 소호랑은 그에게 소호랑은 그저 로봇 작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지만 동생의 부탁에 말없이 소호랑을 한 손으로 받아들었다.잠시 후, 거성그룹, 직원들은 바로 소호랑 주위에 몰려들었다.“배신자, 우리 보고 싶지 않았어?”하지만 소호랑은 고개를 홱 돌리더니 대답했다.“누구세요?”도도한 소호랑의 모습에 소은정이 어색하게 웃던 그때, 연구팀 직원과 임춘식이 다가왔다. 두 사람은 임춘식의 안내를 받아 프로젝트가 진행될 장소로 도착했다.소은찬을 눈여겨보던 임춘식이 말했다.“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요...”소은정이 소개를 하기 전에 소은찬이 먼저 대답했다.“글쎄요. sunner이라고 합니다.”조금은 무례하게 여길 법도 하지만 임춘식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어려 보이는데 갓 졸업한 학생인가 봐요? 뭐, 소 대표님이 추천하신 분이니 안심하겠습니다.”여기서 소은찬의 신분을 밝힌다면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임춘식이 바로 거성그룹으로 스카우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거성그룹의 핵심 기술을 손쉽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어차피 소은정이 원하는 건 이번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것뿐, 임춘식이 소은찬의 정체에 대해 모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해 별말 하지 않았다.프로젝트 사무실 앞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 선두에 선 사람은 바로 박수혁이었다. 소은정이 미간을 찌푸리자 임춘식이 미간을 찌푸렸다.“태한그룹 쪽에서는 박수혁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박수혁도 이 말을 끝으로 능숙하게 화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1시간 정도 진행된 회의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하늘에서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Manolo Blahnik 하이힐을 신은 소은정은 물이 고인 계단을 바라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문 어귀에 놓인 우산통에 작은 우산 하나만 남은 걸 발견한 소은찬은 자연스럽게 소은정에게 씌워주며 말했다.“가자.”소은정은 신발을 바라보다 아쉽다는 듯 말했다.“에이, 이 신발, 물에 닿으면 안 되는데.”소은정의 말에 소찬식은 동생을 훑어보았다. 치마를 입은 그녀를 안을 수도 없는 노릇, 소은찬은 정장 재킷을 벗어 계단에 펼친 뒤 소은정을 향해 손을 뻗었다.“옷 젖겠다. 어서 내려와.”“그래.”소은정이 자연스레 소은찬의 손을 잡고 롤스로이스 차량으로 쏙 들어갔다.뒤에서 이 모든 걸 바라보고 있던 임춘식이 감탄했다.“두 사람 참 잘 어울리네요.”임춘식을 살짝 노려보던 박수혁이 이를 악 물었다. 소은찬은 천재 물리학자로서 웬만한 거물급 정치가들도 예의를 갖추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소은정을 보살피는 모습이 아주 눈에 거슬렸다.친구? 친구 사이는 넘어선 것 같은데...“언니!”이때, 신나리가 소호랑을 안은 채 소은정을 향해 손을 흔들더니 어린아이처럼 달려왔다.흠칫하던 소은정이 웃으며 소은찬에게 소개했다.“이쪽이 바로 신나리 씨예요.”자신의 연락처를 가지고 간 여자라는 말에 소은찬은 그녀를 유심히 훑어보았다. 반갑게 소은정을 안으려던 신나리는 그 옆에 있는 소은찬을 보더니 바로 입을 틀어막았다.“하! 어떡해!”신나리는 바로 소호랑을 내팽개치고 소은찬을 와락 끌어안았다. 소은정을 제외하고 이성과의 스킨십은 처음인 그는 당황스럽고 쑥스러운 얼굴로 신나리를 밀어냈다.“자중하시죠.”자신의 롤 모델을 직접 보았는데 누가 자중할 수 있을까? 신나리는 불쾌하다는 듯한 소은찬의 말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눈빛을 반짝였다.“신나리라고 합니다. 정말
이때, 임찬식과 박수혁이 다가왔다.“나리야, 아까 소 대표 옆에 있는 남자 아는 사람이야?”임춘식이 물었다.한편, 소찬식이 지극정성으로 소은정을 챙기는 모습을 다시 떠올렸다. 두 사람 참 잘 어울렸었지. 부럽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신나리는 고개를 끄덕이다 곧 다시 고개를 저었다.“아니!”소은정이 비밀로 해달라고 했으니 절대 말할 수 없었다.박수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나리를 훑어보았고 신나리는 소찬식이 버리고 간 정장 재킷과 우산을 챙기고 후다닥 건물로 뛰어들어갔다.한편, 혼자 남겨진 소호랑이 스마트 시스템으로 소은정에게 전화를 걸려던 그때, 누군가 그를 번쩍 들어 올렸다.박수혁은 소호랑을 이리저리 훑어보다 물었다.“나 기억하지?”거친 박수혁의 손길에 소호랑은 네 발을 버둥거렸다.“나 엄마한테 갈 거야. 이 나쁜 자식아, 이거 놔!”나쁜 자식?전에 박수혁이라면 졸졸 따라다니던 소호랑인데 못 본 사이 나쁜 자식이라니. 임춘식도 깜짝 놀라 눈이 커다래졌다.“야, 너 전에는 아빠라고 불렀잖아.”임춘식의 말에 소호랑은 고개를 홱 돌렸다.“아빠는 무슨, 엄마는 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해야 해!”그를 거둔 소은정이 박수혁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는 소호랑이었기에 역시 박수혁에 대해 나쁜 감정이 생긴 것이다.이때, 이한석이 우산을 챙겨 부랴부랴 박수혁을 향해 달려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때, 소호랑이 갑자기 말했다.“아빠, 사랑해...”아빠라니? 이한석은 경악스러운 얼굴로 말하는 호랑이를 바라보았다. 박수혁이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새아빠”의 얼굴을 훑어보았다.“그게...”이한석이 더듬거리며 손을 저었다.“아빠!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져!”“풉!”웃지 못할 상황에 임춘식이 웃음을 터트렸다.어색한 분위기 속, 방금 전, 회사를 나섰던 차량이 다시 돌아왔다. 차에서 내린 소찬식이 박수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호랑이 돌려주시죠.”박수혁은 콧방귀를 뀌더니 소호랑을 홱 던져버렸다. 밀려오는 짜증을 억누르며 차
소은찬은 휴대폰을 꺼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정성스레 신나리가 보낸 공식을 하나하나 수정하기 시작했다.소은찬이 지낼 집을 찾기 위해 소은정은 한유라를 불러 함께 근처의 부동산으로 향했다.“왜 굳이 부동산까지 와서 집을 구해? 너희 집 소유의 빌딩만 몇 채인데.”한유라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안 돼. 거긴 너무 북적인단 말이야. 은찬 오빠는 시끄러운 건 질색이라.”소은정이 고개를 저었다.빌딩 내부의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를 둘러보던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긴 태한그룹 산하 부동산을 판매하는 곳입니다. 잘못 오신 게 아닐까요?”고개를 돌린 소은정은 흠칫 놀랐다.하, 임상희?소은정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받아쳤다.“뭐, 상관없어요.”“여기가 어디라고 와. 얼른 꺼져!”밑도 끝도 없이 욕설부터 내뱉는 임상희의 모습에 다른 직원들도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소은정만 아니었다면 SC그룹의 차기 본부장에서 부동산 판매원으로 전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게다가 그녀가 저지른 악행은 업계에 소문이 쫙 퍼져 태한그룹에서의 직장 생활도 순탄치 않았다.옆에서 듣고 있던 한유라가 피식 웃었다.“뭐야. 고객한테 꺼지라니. 여긴 직원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거야?”“당신들한테 서비스 제공할 생각 없으니까 꺼지라고!”임상희의 건방진 모습에 소은정은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통화를 시작했다.건물에 소란이 일자 매니저가 달려왔다. 그녀도 소은정의 얼굴을 보고 흠칫 놀라고 말았다. SC그룹의 소은정 대표가 왜 여기에?”“죄송합니다. 무슨 일인지 여쭤봐도 될까요?”하지만 매니저는 곧 프로답게 표정을 고치고 침착하게 물어봤다.한유라가 턱으로 임상희를 가리키며 물었다.“저 사람 여기 직원인가요?”매니저는 임상희를 힐끗 바라보더니 해명했다.“네, 맞습니다. 해외 로스쿨을 졸업하고 저희 회사에 입사했습니다. 그동안 실적도 좋은 직원인데 무슨 실수라도 한 건가요?”매니저의 소개에 소은정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상희를 바라보
태한그룹 사무실,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실내는 조용했다.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박수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집을 보러 왔었다고?”잔뜩 긴장한 얼굴로 서 있던 이한석이 대답했다.“네. 직원들의 증언도 있었고 CCTV도 확인했습니다. 한유라 씨와 함께 방문했습니다. 지금도 계시고요.”미간을 찌푸린 채 잠깐 고민하던 박수혁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가지.”무슨 목적으로 태한그룹 산하의 부동산을 방문한 건지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네.”고분고분 그 뒤를 따르던 이한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따라 소은정과 관련된 일에 대해 박수혁의 행동은 항상 그의 예상을 깨트렸다. 오랫동안 모셔온 박수혁 대표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매니저는 여러 부동산을 소개하며 조심스레 물었다.“대표님, 이런 스타일은 어떠세요? 대표님께서 지내실 집인가요?”소은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다른 사람이 살 거예요. 금방 귀국한 남자가 살 집이에요. 아파트에 기본 옵션으로 제공되는 가구나 가전제품은 전부 스위스 브랜드로 교체해 주세요. 물론 최고 레벨로요. 돈은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어요.”둘째 오빠에게서 항상 받게만 하던 그녀다. 어쩌다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생겼으니 모두 최고급으로 해주고 싶었다.“네, 알겠습니다.”사무실로 들어오던 박수혁은 마침 그 말을 듣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해외에서 귀국한 남자? sunner인가?그날 오후, 누군가 소은정의 모습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자 사람들은 또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굳이 태한그룹 부동산으로 간 이유가 뭘까? 새 남친한테 사주는 걸까? 일부러 박수혁의 심기를 건드리려고?”“하하하, 최고의 복수네.”“박수혁 대표도 속이 말이 아니겠는데?”......소은정은 아파트를 둘러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도심과 떨어져 있어 조용하다는 점이었다. 인테리어나 가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교체하면 되는 거니까.계약서에 사인한 뒤 소은정은 손목을 들어 Jae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지만 과거형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마음이 살짝 불편했다.“어느 집으로 계약했어?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박수혁은 share 패션쇼장에서 요트를 사달라며 소은해에게 애교를 부리던 소은정의 모습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선물도 해주지 못했다. 이 기회에 작은 집이라도 한 채 받는다면 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죄책감을 덜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하지만 소은정은 재밌는 농담이라도 들은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다시 고개를 든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선물? 이렇게 호탕한 사람인 줄 몰랐네. 엑스 와이프한테 이렇게 큰 선물을 다 주고.”소은정의 가시 박힌 말에 미간을 찌푸리던 박수혁이 뭔가 말하려던 순간, 소은정은 말을 이어갔다.“당신 말대로 난 와이프였던 사람이야. 지금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거지. 당신 선물 받을 이유도 받고 싶은 마음도 없어. 당신 가족들이 알아봐. 이혼까지 하고 아직도 당신 등골을 빼먹는다고 욕하겠지.”말을 마친 소은정은 매니저를 돌아보았다.“바로 계산할게요. 디스카운트 없이요.”이 정도 푼돈에 박수혁의 눈치를 보고 싶은 마음도, 그 가족들의 비난을 받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팽팽한 기싸움에 매니저는 조용히 박수혁을 바라보았다. 이번 계약을 성공시켜 실적을 챙기고 싶은 생각은 굴뚝같았지만 대표님이 허락하실까?이때 박수혁 뒤에 있던 이한석이 눈치를 주자 매니저는 바로 사무실을 나섰다.박수혁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순간, 급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형, 민영이 교통사고 났대. 출혈이 심해서 지금 응급실로 이송됐어.”바로 옆에 서 있던 소은정도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도 서민영의 이름만 들으면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교통사고? 하필 지금...미간을 찌푸리던 박수혁이 대답했다.“알겠어. 지금 바로 갈게.전화를 끊은 박수혁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소은정을 바라보았다.“민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