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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아직 꽁해 있던 여름은 거절했다.

“죄송한데 난 지오 시터지, 당신 도우미는 아니죠.”

‘당신’이란 두 글자에 무척 힘이 들어가 있었다.

최하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른하게 말했다.

“강여름 씨가 말끝마다 말하던 사랑이란 게 이런 겁니까?”

“…….”

‘사랑은 개뿔. 난 외숙모란 자리를 사랑했던 거라고요, 아시겠어요?’

여름은 툴툴거리며 냉장고를 열어 국수 재료를 꺼냈다.

열린 미닫이문 틈으로 여름의 모습을 지켜보는 최하준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제 여름이 한 음식이 아니면 입맛이 돋지 않았다. 음식에 마약이라도 넣은 게 아닐까 싶었다.

******

다음 날 아침 식사 후.

최하준은 소매 단추를 잠그며 외출 준비를 하다가 여름도 아이보리색 재킷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

안에는 진한 핑크색 셔츠에 아래는 체크무늬 롱스커트에 스타킹을 신었다. 심플하면서 세련된 룩에 볼륨 있는 몸매가 돋보였다.

옅은 화장에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가 너무 아름답고 생기발랄해 보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곧, 자신은 나갈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을 위해 꾸민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

“또 데이트 갑니까?”

불쾌감을 꾹꾹 누른 목소리였다.

“아뇨, 출근요. 어제 취직했어요. 퇴근한 다음에 밥할게요. 저녁에 지오 산책도 시키고.”

최하준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여름이 하는 일은 탐탁지 않았다.

“또 전단 돌리러 갑니까”

“아니요. 이번엔 수석 디자이너예요”

여름은 “흥” 하고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먼저 집을 나섰다.

최하준도 곧바로 나서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여름의 실루엣을 보며 물었다.

“데려다 줄까요?”

왠지 목이 다소 건조한 느낌이었다.

“괜찮아요.”

여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운전해 가려구요. 가다가 만원 전철에서 눌리고 싶진 않거든요.”

“…….”

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주는 게 싫다는 뜻인가?

여자를 바래다 줘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최하준은 이쪽으로 눈치가 영 꽝이다.

8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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