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치 빠른 운전기사는 서둘러 차 창을 올려 소리를 차단했다.유월영은 손을 빼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대표님을 귀찮게 해드릴 수는 없죠.”연재준이 말했다.“날 귀찮게 한 게 어디 한두 번이야?”유월영은 한 번도 귀찮게 한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더 논쟁하기 싫어서 고개를 끄덕였다.“어쨌든 이제 그런 말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니까요.”연재준이 비웃듯 물었다.“우리가 무슨 사이인데?”유월영은 극심한 피로를 느꼈다. 백유진은 그들이 다시는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겠지만 그녀 역시 그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그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숨이 막혔다.그녀가 말했다.“대표님, 차멀미가 심해서 차를 타고 가기는 어렵겠어요. 어차피 사는 곳이랑 멀지도 않으니까 걸어서 갈게요. 가능하면 서희만 아파트 입구까지 데려다주세요.”연재준은 짜증이 벌컥 치밀었다.“잔말 말고 타.”“정말 타고 싶지 않아서 그래요.”그 말을 끝으로 연재준은 차로 돌아가서 출발을 지시했다.조서희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월영이 아직 안 탔는데요!”“걸어서 돌아간대요.”“그래서 그러라고 했어요?”연재준은 백미러로 그녀를 힐끗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조서희가 이를 부드득 갈며 말했다.“그럼 나도 내릴게요.”그녀가 내리자마자 차는 휑하니 떠나가 버렸다. 조서희는 욕설을 퍼부으며 친구에게 다가갔다.그런데 유월영 상태가 이상했다.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며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월영아!”조서희는 다급히 친구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얼굴은 이미 파랗게 질려 있었다.불길한 예감이 들었다.택시를 잡고 싶었지만 이 시간에 길가에 지나가는 택시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녀는 콜택시 어플을 열었지만 근처에는 건축물도 없어서 출발지점을 정확히 설정할 수 없었다.조서희는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이때, 휑하니 떠나갔던 차가 다시 돌아왔다.조서희는 다급히 달려가서 차 창을 두드렸다.“대표님, 빨리 우리 월영이 좀 살려
유월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숙취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가까운 곳에서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침대머리에 물 있어.”연재준?유월영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가까이에 그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대표님이 왜… 여기에 있어요?”그녀는 뒤늦게 자신이 있는 곳이 병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손등에는 아직도 수액을 맞고 있었다.그녀가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연재준이 물었다.“어제 일 하나도 기억 안 나?”“술을 많이 마셔서 취했던 건 기억나요.”속이 울렁거리고 배가 아팠던 것 같은데 집에서 푹 쉬면 나을 일을 병원까지 올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그녀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다시 물었다.“어떻게 된 거예요?”연재준이 뜻 모를 표정으로 답했다.“유산했대.”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뜯겨 나가는 것 같았다.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머릿속이 하얘졌다.유산….이미 한 번 경험했고 다시는 없을 거라고 다짐했는데 또 유산이라니?그녀는 바람 불면 쓰러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천장을 바라보았다.‘내가 아는 유 비서가 이렇게 나약한 사람이었나?’연재준은 한결 누그러진 말투로 말했다.“농담이야. 생리래.”유월영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지금 뭐라고 했어요?”연재준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생리통에 빈혈인데 음주까지 해서 반응이 심하게 왔다고 하더라. 유 비서 친구가 이상한 소리 지껄이길래 나까지 놀랐잖아.”‘그러니까 그냥 생리통이었다고?’유월영의 안색이 조금씩 돌아왔다.지난번에 유산을 겪고 두 달이나 생리가 안 와서 걱정했는데 하필이면 어제 올 줄이야. 아마 술 취해서 감각이 무뎌졌던 것 같았다.‘다행이다.’연재준이 그녀의 얼굴색을 살피더니 물었다.“다행이라고 생각해?”유월영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대표님은요? 제가 유산일 수도 있다고 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나요?”그는 그
수액이 끝나고 간호사가 와서 바늘을 제거하자 유월영은 핸드폰을 꺼내 조서희에게 안부를 전했다.조서희는 출근해야 하기에 병원에 남을 수 없었다.유월영은 집으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졸려 그대로 눈을 감았다.점심 때가 되어 핸드폰이 울렸다.“누구세요?”수화기 너머로 불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나야. 왜 매번 전화할 때마다 내 목소리를 못 알아들어? 내 번호 저장 안 했어?”“은석 씨?”“그래!”유월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죄송해요. 경황이 없어서 저장을 못했어요.”“괜찮아. 나 그렇게 속 좁은 사람 아니야. 이번에는 꼭 저장해 줬으면 좋겠어.”소은석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떠들어댔다.“나 카톡도 이 번호로 되어 있어. 바로 추가하면 돼. 심심하면 문자 보내.”“알겠어요. 다른 일 없죠?”유월영이 물었다.“별일은 없고 어제 술을 많이 마셨던 거 같은데 괜찮나 해서 전화했어.”“괜찮아요. 걱정해 주셔서 고마워요.”“그럼 점심에 밥이라도 같이 먹자. 내가 그쪽으로 갈게.”어제 위기에서 도와줬던 사람이기에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점심은 제가 사야 할 것 같은데요.”“좋지.”전화를 끊고 퇴원한 유월영은 집으로 가지 않고 백화점에 들러 갈아입을 옷을 구매한 뒤, 화장실로 가서 간단하게 세수를 했다.태생이 미인이었고 피부도 좋았기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외출할 수 있었다.그런데 하필 이때 마주치고 싶지 않은 사람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그녀와 소은석이 근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공교롭게 연재준과 백유진을 만났다.연재준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은 모습이었다. 아마 병원을 나가고 바로 회사로 갔다가 백유진과 밥 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그들의 위치가 구석진 곳에 있어서 유월영은 모른 척 지나가려 했으나 눈치 없는 소은석이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재준 형!”연재준은 두 사람을 발견하고 싸늘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소은석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재준 형도 여기 다녀? 잘됐다. 나랑 유 비서도 금방 왔거든. 차라리 합석하
유월영은 그 뒤로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연재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은석과는 거리를 둬야겠다고 다짐했다.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데려다준다는 소은석의 말을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차에 오른 그녀는 그의 연락처를 저장하고 SNS를 팔로우했다. 들어가서 게시물을 잠깐 봤더니 백유진이 말한 문제 사진이 보였다.너무도 오해를 사기 쉬운 글귀였다.아파트 입구에 도착하자 유월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은석 씨, SNS에 올린 사진, 그거 지워주시면 안 될까요?”소은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사진을 왜 지워?”“사람들이 오해할 테니까요.”“그래? 난 별로 오해할 게 없다고 생각하는데.”유월영은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재차 말했다.“지워주세요.”소은석은 입맛을 다시더니 핸드폰을 꺼내며 말했다.“알았어, 알았어. 우리 유 비서가 지우라면 지워야지.”유월영이 웃으며 말했다.“감사합니다.”게시글을 내리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소은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그럼 내일 같이 저녁 먹어!”유월영은 안전벨트를 풀며 덤덤히 말했다.“은석 씨 제안을 진지하게 고민해 봤는데 저랑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소은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언성을 높였다.“왜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 난 유 비서만큼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어제 진지하게 좋은 쪽으로 고민해 본다고 했으면서 오늘 왜 이러는 거야?”“갑자기 마음이 변한 게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결과 안 어울린다고 판단했어요. 저보다 적합한 사람을 구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차에서 내렸다.“조심히 가세요. 데려다줘서 감사했습니다.”자존심이 상한 소은석은 대답도 없이 가버렸다.사실 유월영은 한 번도 소은석과 같이 일하는 걸 진지하게 고민한 적 없었다. 단지 너무 매몰차게 거절하기 싫어서 식사 초대에 응했을 뿐이었다.어제 이후로 조금 더 생각해 보려고도 했지만 SNS 사진을 본 뒤로 생각이 바뀌었다.소은석과 같이 일하
본인 일가 회사에 들어왔던 소운은 지금 소사장이라 불린다. 그래서인지 그의 아버지는 이 생일파티를 빌어 그를 정식으로 협력 파트너에게 소개시켜 주고싶어 했다. 그저 여성 파트너가 필요했던 거였다면 소운의 연락 한번으로도 충분했겠지만 이번엔 사뭇 달랐다. 그의 여자친구들이라곤 전부 어리고 예쁘기만 한 모델이거나 인플루언서들이니 그들이 상권 응대 경험이 어디 있을까. 결코 첫 등장부터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에 그는 콕 집어서 무조건 루장월을 원했다.루장월이 비운 그룹의 수석 비서 출신인 건 모두가 공공연히 아는 사실이니 어느 누가 프로페셔널한 면에서 그녀를 따라 잡을수 있단 말인가?!루장월은 잠시 고민에 빠지더니 이내 별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소 사장님, 사장님이 말씀하신 거예요. 제가 사장님 생일파티에 가서 사장님 도와 이 관문만 넘기면 그 뒤엔 저희 둘 더 이상 빚진거 없기로요.”“그럼!”......마침 다들 바에 있었던지라 입이 근질근질해난 소운은 루장월의 응답을 받자마자 그새를 못 참고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공유했다.“루 아가씨가 내 부탁 들어주겠대!”수옥조차도 조금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그 분 이미 너 거절하지 않았었나?”“여자들은 말야 속으론 좋으면서 겉으론 싫은 척 하거든. 이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지! 내일 아침 일찍 사람 보내서 아가씨한테 예복 전해줘라고 해야겠어. 예쁘게 꽃단장하고 부담없이 내 생일파티에 참여하도록 말이지!”수옥이 그를 두어번 힐끗 쳐다본다.“너 애 좀 쓴다.”“그럼!”소운의 시선은 곧장 구석에 있는 문연주에게로 향했다.“연주 형, 왜 도통 말이 없어?”문연주가 천천히 눈꺼풀에 힘을 준다 . 칼에 베일 듯 날카롭고 수려한 이목구비, 눈가엔 그 어떤 온기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조용히 술 한 모금을 들이킨다. 엽혁연이 방해하지 말라고 소운을 다그쳤다.“쟤 저녁에 집 불려가서 밥 먹었어, 아님 여기 왜 왔겠냐?”제 아무리 눈치 없는 소운이라 해도 알아챌 수 있었다.매번 집에 돌아갈 때면 문
때마침 소운이 그녀를 데리러 나왔고 루장월은 바로 소운을 따라 가버렸다.그녀의 등 역시 상당 부분 노출이 돼있었다. 날개뼈며 허리라인이며, 걸음걸이는 또 어찌나 사뿐사뿐한지 소리 없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백유도 문주연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연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그녀 역시 약한 편에 속하긴 했다. 하지만 보기 거북하게 약하달까, 듣기 좋게 말하면 그냥 학생 몸매였다. 문연주가 그녀에게 선물한 예복은 모 고등학교에서 정한 소녀풍이다. 쉬폰 스커트, 일자 어깨에 다이아몬드와 꽃 장식. 여리여리한 선녀 같기도 했다.원래는 너무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루장월한테 비교하고 나니 그녀의 뇌리에는 묘하게 “심심하다”는 단어가 맴돌았다. 유독 문연주의 눈에서 일종의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소유욕을 보고 난 뒤로는 더욱 아랫입술을 꽉 깨물지 않을수가 없었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장월 언니 그날 분명 소운이랑 그냥 평범한 친구라고 하지 않았나, 언니 드레스 소운이랑 커플룩 아니야?”“아마도.” 문연주가 냉랭하게 대답했다.백유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린다.“장월 언니 진짜 예쁘네.”문연주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그녀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몇마디 툭 내뱉는다.“너무 평범해. 그래도 여자는 청순한게 좋아.”백유의 입꼬리가 주체 못하고 올라간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청순하게 웃어보였다.그녀는 문연주가 자신의 청순함을 좋게 본 것이라는걸 알고있었다.문연주가 말하는 소위 “평범하다”는 다른 사람들에겐 백퍼센트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뜻이었다.과장 하나 보태는것 없이, 주장월이 파티장에 나타났을땐 단번에 모든 귀빈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수많은 남정네들의 부러움과 질투가 섞인 따가운 눈총을 받은 소운이었지만 체면은 배로 치켜세워졌다. 그리고는 루장월에게 돌직구를 날렸다.“장월아, 넌 내가 본 제일 제일 제일 예쁜 여자야!”루장월이 웃으며 말했다.“도련님 나 너무 추켜세우지 마요.”“진짜
다음 순간, 그녀는 공격성이 다분한 웬 남자의 숨결에 압도되어 버렸다.“누구 찾아? 소운? 난 전에 왜 너희 둘 사이가 이토록 친근한 걸 몰랐을까? 나 몰래 걔랑 얼만큼이나 연락했어? 응?”“......문 사장님?”루장월은 충격에 정신줄을 놓은 듯이 말한다.문연주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도 빠져 들어갈 것마냥 그윽했다.“응.”루장월이 옅은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안도감은 금세 긴장감으로 바뀌었고 더욱 거세게 저항을 해댔다.“사장님, 저 좀 놔주세요.”“소운한테 관심이라도 생겼나 봐?”문연주는 그녀의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녀가 소운을 향해 웃어 보일때 부터 전혀 관심이 없는걸 단번에 알아챘으니 말이다.그가 뭐라 하든 관심 없었던 루장월은 소리 없이 몸부림만 쳐댔다. 그녀는 그저 소운에게 천진난만한 아이같은 귀여움이 있는것 같다고 여길 뿐이었다. 문연주는 조롱하듯 웃어 보이며 그녀를 곧장 창고 창문앞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창문 사이 작은 틈을 가리키며 말했다.“두 눈 똑바로 뜨고 잘 봐.”루장월의 시선이 홀린 듯 바깥 쪽으로 향한다.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인적 드문 뒤쪽 정원의 산 모형 속이었다. 거기에는 소운이 한 여자를 누르고 있었고 여자는 연신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화장실에 다녀온 그 짧은 얼마 사이에 벌써 다른 여자랑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니.천진난만한 귀여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했나 보다, 이게 바로 재벌집 도련님의 민낯인 것을.루장월은 구역질 날 것 같은 걸 간신히 참고 기회를 잡아 문연주를 있는 힘껏 밀쳐냈다.“ 사장님 너무 앞서 나가셨어요. 전 소 도련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습니다. 그저 도련님이 절 도와주신 적이 있었기에 오늘 밤 저도 도와드리려고 온 것 뿐이에요. 도련님이 뭘 하든 저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그러면서 그녀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문고리에 손이 닿기도 전, 또 다시 그 남자에 의해 벽에 눌리고 말았다.슬슬 화가 나기 시작한 루장월이 입을 열어 그
그녀를 알아 본 손님이 발걸음을 멈췄다.“루비서 아직 몰랐어요? 방금 이사장님이랑 사장님 하마터면 사람들 앞에서 싸우실 뻔했어요!”루장월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어떻게? 문연주는 그토록 냉철하고 침착한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 어떻게 다른 이의 파티에서 대놓고 아버지랑 싸울 생각을 할 수있지?“진짜요?”다른 한 손님 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니요 아니요. 그건 과장이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정색한거지 싸우진 않으셨어요.”“바로 그 위치에서 이사장님은 사장님과 함께 파티에 참석하신 여비서와 대화를 나누고 계셨어요. 말씀 도중 문 사장님이 오시더니 오자마자 여비서를 본인 뒤로 보내셨어요. 그리고 이사장님한테 뭐라고 하시니까 이사장님 얼굴이 바로 굳어지셨죠.”“그래도 소 사장님이 얼른 와서 분위기를 풀어주시면서 사람들 더러 윗층 가서 얘기 나누시라고 하셨어요. 그 뒷일은 잘 모르겠네요.”루장월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손님이 떠보듯 물었다.“루비서는 사장님 최측근이셨으니까 아실거 아니예요. 저희한테만 귀띔해 주세요. 그 여비서 사실은 사장님 여자친구 맞죠? 이사장님이 허락 안 하시니까 사장님이 다투신거 아니에요?”거의 맞는 말이다.그게 아니라면 문연주가 무슨 이유로 아버지한테 정색을 할까? 지난번 문가네에서 식사할 때 아버지의 어조에서 이미 백유를 썩 좋아하지 않는걸 알았다.루장월이 입꼬리를 삐죽 내밀었다.이윽고 손님이 말한다.“루비서 그래도 얼른 올라가서 봐봐. 이사장님 이번엔 정말 화 단단히 나신 것 같던데.”루장월이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더는 문연주의 일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부모님들은 실로 너무 괜찮으신 분들이었다. 작년 추석엔 소주에서 시간을 보내시다가 특별히 그녀에게 양첨호의 정종대게를 한 박스나 보내주시고 설날이면 현금 봉투까지 챙겨주셨다. 친부모님조차도 이렇게 그녀를 챙겨주진 않았는데.거기다 문연주 아버님은 고혈압까지 있으신데......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녀는 결국 치맛자락을 들고 윗층으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