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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아

별거 얘기가 나오자 신연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마음이 아프지?

결혼한 뒤로 박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사실 상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

“어차피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

박태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었다.

“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오늘 반차 내줄 테니 짐부터 집으로 옮겨.”

“아니….”

거절의 말은 때 아니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묻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온 진영웅이 공손히 말했다.

“대표님,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

박태준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

“이제 나가봐.”

신연지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박태준,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

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

신연지가 그와 싸우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

할 말이 없게 된 신연지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서 그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낭비였다.

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일단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수정했다. 그에게 잡혔던 턱에 퍼런 멍이 나 있었다.

두꺼운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러 인사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연지 씨, 프린터에 잉크가 다 떨어졌어. 좀 갈아줘.”

하루에도 몇번씩 듣는 잔심부름이었다. 박태준의 개인 비서로써 그의 일과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를 쌀쌀맞게 대하는 박태준의 태도에 점차 같은 비서실 직원들도 그녀를 막내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

“연지 씨, 잉크 좀 갈아달라니까?”

평소에도 신연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도 비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퇴사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사직서 제출하기 전이잖아?”

“제 업무 내용은 박 대표님의 일과를 책임지는 겁니다. 도 비서님이 박 대표님 대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

신연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직책이지만 사실 그녀의 자리는 많은 여직원들이 꿈꾸는 자리였다.

도 비서가 자꾸 그녀에게 시비를 걸어오는 것도 그 자리가 탐나서였다.

도 비서가 도끼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신연지 씨, 오늘 뭐 잘못 먹었어? 박 대표님 일과를 자네가 책임져? 자네가 주문한 도시락, 박 대표님이 손도 안 대고 버리는 거 몰랐어?”

매일 쓰레기통에 처박히던 도시락통이 떠오르자 신연지는 가슴이 답답했다.

그녀가 멍 때리고 있는 사이, 도 비서가 다가와서 서류를 그녀의 손에 떠넘기며 차갑게 말했다.

“오후 두 시 전까지 20부 복사해 줘. 신 비서, 자기 주제를 알아야지. 자네는 이런 일이 가장 어울려.”

신연지는 인상을 찌푸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그 순간, 뒤에서 발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 보니 박태준이 진영웅과 함께 사무실을 나오고 있었다.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이 피식 웃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마치, 이런 것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무슨 용기로 이혼을 제기했냐고 비웃는 것 같았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신연지는 박태준이 보는 앞에서 서류를 도 비서의 얼굴에 던졌다.

도 비서가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그녀는 뒤돌아서 복도로 향하며 차갑게 말했다.

”도 비서님,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죠. 잉크 떨어지면 급한 사람이 알아서 갈으세요. 복사도 필요한 사람이 알아서 하고요. 못 참겠으면 박 대표님한테 가서 고발해요. 아 참, 박 대표님은 가슴 크고 백치미 있는 여자를 좋아한답니다. 도 비서님은 조금 멍청해 보이지만 가슴이 좀 작네요.”

어차피 퇴사할 거, 굳이 누구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박태준은 얼굴이 퍼렇게 질려서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신연지는 곧장 인사과로 가서 사직서를 제출했다.

“신 비서님, 사직서는 도로 가져가세요. 대표님 개인 비서는 사직하려면 대표님 사인이 필요해요.”

신연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일부터 안 나올 거니까 무단결근으로 치든 퇴사 처리하든 마음대로 하세요.”

인사과 과장이 당황하며 그녀를 말렸다.

“이건 계약 위반이에요. 사직하더라도 최소 2주 전에는 인수인계를 했어야죠.”

인수인계라는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세끼 밥 챙겨주는 일에 인수인계할 게 있을까? 그 인간이 무슨 음식을 싫어하는지 말해주면 되나?

그런 거라면 박태준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춰줄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킬 수 있는 배달 음식은 종류별로 다 시켜줬기 때문이다.

신연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태준 씨더러 저 고소하라고 하세요.”

회사를 나온 그녀는 친구 진유라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같이 술 한잔하자는 내용이었다. 아마 뉴스를 보고 그녀가 충격 받았을까 걱정하는 듯했다.

심신이 피곤했던 신연지는 대충 거절하고 호텔로 돌아와서 밥도 안 먹고 그대로 잠들었다.

잠결에 노크소리가 들려서 눈을 떠보니 저녁 여덟 시였다.

문을 열자 호텔 지배인 마크를 단 남자가 예의 바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객님, 죄송하지만 이 방에 문제가 좀 생겨서 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럼 다른 방으로 바꿔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방으로 돌아가서 짐을 쌌다.

지배인이 애석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예약이 다 차서요. 지불하신 돈은 카드로 환불해 드렸습니다. 저희의 실수로 벌어진 상황이기에 위약금도 같이 넣어드렸어요.”

신연지는 그제야 저녁 여덟 시까지 집에 돌아오라던 박태준의 경고가 떠올랐다.

“박태준 그 개자식이 이러라고 시켰어요? 난 환불 신청한 적 없어요!”

그녀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버럭버럭 화를 냈다.

“여사님, 저희는 그저 윗분들 눈치 보면서 일하는 직원에 불과합니다. 이러시면 곤란해요.”

지배인이 난감한 얼굴로 말했다.

신연지가 거부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호텔 측 입장은 단호했다. 전기 선로에 문제가 생겼다며 오늘 수리하지 않으면 화재 위험성이 있다고 말했다.

결국 신연지는 어쩔 수 없이 호텔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박태준의 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기사 강태산은 그녀를 보자마자 문을 열어주었다.

“사모님, 집으로 모시라는 대표님 지시가 있었습니다.”

신연지는 그의 손길을 뿌리치며 차갑게 대꾸했다.

“박태준한테 저 안 돌아간다고 전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바로 근처에 있는 호텔로 갔다.

강태산은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호텔 직원은 난감한 얼굴로 그녀가 건넨 카드를 돌려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사용이 정지된 카드라고 나오네요. 다른 카드로 결제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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