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치료를 포기하다.

원경능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머릿속에는 몇몇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다치기 하루 전, 이 몸의 원래주인은 표독스런 말들로 아이를 나무라며 안뒷간 지붕의 나무판자를 더 빈틈없이 손질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아이가 다친 건 아마도 뒷간 지붕에서 굴러떨어지며 못에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애초에 화용이라 불리는 그 어린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시집올 때 같이 따라 왔던 하인들이 연이어 다른 곳으로 팔려 가자, 그녀는 초왕이 따로 자기한테 붙여준 하인들에게 모든 화풀이를 해댔었다. 툭하면 하인들을 때리거나 욕하는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이였고. 기씨 어멈 역시 그녀가 던진 잔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원래주인은 성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녀를 이토록 싫어하는지 납득이 됐다.

“기씨 어멈에게 물어보거라, 내가 그 아이를 보러 가도 되는지.”

원경능이 녹아에게 물었다.

“왕비께서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오늘 같이 곤란한 처지게 놓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식적인 걱정 따위 접어 두세요, 기씨 어멈과 화용이도 왕비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

녹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려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문이 다시 닫혔다.

원경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곧 죽는다고?’

그녀는 화용이의 부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가늠할수 없었다. 이곳의 의원이 어떻게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지도 알리가 없다. 다만 만약 처치방식이 잘못된다면, 각막이 파손되고 안구도 파열되여 감염이 발생하고 말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끝내 마음 놓고식사조차 하지 못한 그녀는 약 상자를 열어 항생제 몇 알을 꺼내 들곤 밖으로 나갔다.

기씨 어멈은 왕부로 팔려 온 몸이였고 따라서 화용이는 왕부의 가생노비(家生奴才 -노비가 주인집에서 낳은 자녀)였는데 봉의각 뒤편의 작은 원락에서 살고 있었다.

원경능은 한참을 헤매서야 겨우 그 아이가 있는 곳을 찾았다.

“왕비께서 웬일이십니까?”

그녀를 발견한 기씨 어멈은 울어서 퉁퉁 부은 눈으로 원경능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화용이를 보러 왔어.” 원경능이 대답했다.

“돌아 가십시오, 저와 제 손주는 왕비님의 관심이 필요 없습니다!”

기씨 어멈이 차갑게 대답했다.

원경능은 사과를 하고 싶었다, “미안하구나, 화용이더러 안뒷간을 고치라고 했다가 이런 사고가 벌어질 줄은 나도….”

“사고라고요? 이 아이는 이제 막 아홉 살입니다. 청소나 겨우 조금 할 수 있는 아이한테 안뒷간 지붕을 고치라고 하셨어요. 왕부에는 건물 수리를 맡아 하는 전문 인력도 있는데, 다른 이들은 못 하게 하고, 하필이면 이 아이한테 하라고 지목하셨잖아요. 이 아이는 겨우 아홉 살입니다, 어찌 이렇게 어린 아이한테... 왕비님은 정말 일말의 양심도 없는 건가요?”

더이상 울분을 참지 못한 기씨 어멈은 원경능에게 원망하듯 한마디씩 쏘아 붙였고, 이에 원경능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말주변이 좋은 편이 아니였다.

잠깐 머뭇거리던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항생제 몇 알을 기씨 어멈에게 건네주는것 외에는 딱히 할수 있는게 없었다.

“이 약을 그 아이에게 먹이거라, 하루에 세 번, 한 번에 두 알씩….”

기씨 어멈은 그녀의 손에 든 알약을 바닥으로 쳐내며 있는 힘껏 밟아댔다.

“필요 없습니다! 돌아가시지요, 왕비님. 미천한 노인네 더이상 왕비님과 말을 섞고 싶지 않습니다. 손주를 위해 덕을 쌓아야 해서요.”

원경능은 발에 밟혀 가루가 된 약이 무척이나 아까웠다. 약상자 안에는 항생제가 몇 알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나 기씨 어멈의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표정을 보니 지금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던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하여 그녀는 할 수 없이 몸을 돌려서 그 곳을 빠져 나왔다..

화용이의 병세는 그날 밤부터 위독해졌다.

기씨 어멈은 초왕부에서 오래 일한 하인이여서, 그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초왕은 도성의 유명한 의원인 이씨 의원(利大夫)을 왕부로 청해 들여 화용이의 상처를 치료 하도록 했다. 허나 이씨 의원마저도 화용이의 상처를 살펴보고는 처방도 내리지 않은채 고개만 저으며 가족들에게 아이를 잃을 준비를 하라는 말만 남겼다.

기씨 어멈은 비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해 소리내여 목놓아 울었다. 그 울음소리를 들은 원경능은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가 급히 지나가던 녹아를 붙잡아 세우며 물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냐?”

“화용이가 위독하대요.”

녹아 역시 급한 나머지, 원경능을 미워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더이상 지체할수가 없다고 판단한 원경능은 방으로 돌아가 약상자를 꺼내 들고는 녹아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