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문제에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왜냐하면 자신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당연히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원씨가 임신한 뒤로부터 그의 눈과 마음에는 다른 것들을 담지 못했었다.현재 제왕이 물으니 우문호는 잠시 멍을 때렸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어디 그렇게 많은 왜가 있어, 놓으면 놓는 거지.'"다섯째 형님."제왕은 우문호가 머뭇거리자 조금 몸을 일으키더니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 보았다."혹 아직도 명취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죠?"우문호는 그를 흘겨보았다."그런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 네 다섯째 형수는 속이 매우 좁아.""형님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겁니까?"우문호는 고개를 저었다."좋아하지 않아.""어떻게 했습니까? 이렇게 빨리 명취를 잊다니."우문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내가 뭘 했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한참 뒤에 우문호가 고개를 들었는데 빛이 반짝였다."너의 다섯째 형수가 있었기 때문이지.""그 말인즉, 다른 사람이 생기면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건 아마 대체하는 방법인 듯 하군요. 다른 여인을 찾아야 되지요, 맞나요?"제왕이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우문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연구해본 적도 없는 걸.'허나 표면상으로는 적극적으로 말했다."맞아, 넌 동그란 얼굴의 계집애와 자주 있도록 시도해봐. 아마 곧 잊을 수 있을 거야."원영의를 말하니 제왕이 탄식하며 말했다."이번에 영의가 조태의를 데리고 돌아왔기 다행이지 아니면 전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네 다섯째 형수가 보낸 거다."우문호는 원경능을 위해 공을 쟁취했다. 일곱째는 늘 원씨에게 편견이 있어 이 문제에 대해 우문호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공을 쟁취하여야만 했다.그러나 제왕은 그 말을 흘려 보내고 홀로 중얼거렸다."사실, 동그란 얼굴도 괜찮아요. 자상하게 왕비를 소개해줄 것이라 했거든요."우문호가 불현듯 물었다."참, 오늘밤 돌아갈 거야?"제왕은 생각에 잠겼다."돌아갈 거예요. 동그란 얼굴이 있으니 절 괴롭히
북당(北唐), 초왕부(楚王府)의 봉의각(凤仪阁)이었다.흔들리는 촛불이 방안 곳곳에 붙여진 붉은 ‘희’자를 밝혀주었다. 조금 낡았었으나 테두리의 금박은 그 불빛에 은은한 광을 내고 있었다. 벽에는 한 쌍의 그림자로 가득 채워졌다.원경능(元卿凌)의 얼굴에는 인내와 미련으로 가득 찼다.혼인한 1년 동안,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조차 다치지 않았었다. 전날 황궁으로 갔을 때, 태후는 그녀의 평탄한 아랫배를 만지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실망한 기색으로 측비(侧妃)를 맞이하련다는 말을 꺼냈다. 원경능은 어쩔 수 없이 태후에게 말했었다. 혼인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잠자리를 한 적이 없다고.그녀도 울며불며 하소연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미련이 남았을 뿐이었다.13살이 되던 해에 처음 그를 만나서, 모든 마음을 그에게 뺏겨버렸다. 그녀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이용해 드디어 그의 왕비로 되었다. 원래 아무리 돌 같은 사내라 하더라도 정성을 들인다면 꽃이 피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을 과대평가 한 것이었다.분명히 그녀의 낭군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 속에서 일말의 연민이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쳐 날뛰는 증오는 마치 독침처럼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다.원경능은 왠지 모를 원한이 솟구쳐 올랐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는 힘껏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 새빨간 피가 흐르면서, 비릿한 혈액이 그녀의 입안으로 떨어졌다.우문호(宇文皓)의 눈빛이 위험하게 변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귀뺨을 후려쳤다. 그 냉담함은 마치 한겨울의 얼음 같았다.“원경능, 본왕(本王)은 너의 뜻대로 잠자리를 하였다. 허나 본왕(本王)과 너는 오늘부터 남남이니라.”원경능은 절망적이고도 비참하게 웃었다.“역시 당신은 저를 증오하는군요.”시집가기 전에 어머님은 첫날밤 여인이 알아야 할 것들을 가르쳐 주었었다. 그러나 그녀의 낭군은 약을 마시고 왔었다. 약효가 끝나자 조금의 미련도 없이 일어나는 것이었다.청색 두루마기가 걷히더니 늘씬한 다리가 발길질하였다. 탁자와 의자는 요란한
그녀는 자신이 개발한 약물을 주사한 뒤 정신을 잃었고, 다시 눈을 떴을땐 이미 이곳에 와 있었다. 이 몸이 간직하고 있던 기억과 자신의 원래 기억이 머릿속에서 서서히 뒤엉켜 갔고, 그녀는 새로 주입되는 기억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경후(静候)의 적녀인 원경능은 오랫동안 초왕 우문호를 일방적으로 사모해왔다. 그녀가 만 열다섯 살이 되던 해에 공주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계획을 세워 초왕이 자신을 범하였다고 모함한 뒤, 죽느니 사느니 소란을 피워댔다. 그 결과, 그녀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드디어 초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다만 초왕부로 시집온 지 일 년이 지났고, 그동안 온갖 술수를 다 부려봤음에도 불구하고 초왕은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학업과 연구에만 매진하던 그녀는 여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몸 아래쪽으로부터 저릿하게 느껴지는 고통은 어젯밤에 벌어진 일을 알려주고 있었다. 천재 박사로부터 어느 이름 모를 왕조의 초왕비로 “승진”한 원경능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기는 커녕, 그저 자신의 연구 프로젝트를 이어갈수 없게 됐다는 점에 대한 아쉬움이 더 컸다. 과학적으로는 설명할수 없는 타임슬립이라는 일이 자신한테 발생하였지만,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만약 현대로 다시 돌아간다면 무속인들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접근해서 연구해보는것도 나쁘지 않은 연구방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다출혈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졌다. 일단은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그녀는 침대로 돌아가 누었고 곧 깊은 잠에 곯아떨어졌다.얼마나 잤을까, 밖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빨리 의원을 불러와!” 기씨 어멈의 다급하고도 처절한 고함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곧 이어 비릿한 피 냄새가 살짝 닫힌 나무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왔다. 원경능은 방안의 가구들에 의지하며 휘청거리는 다리를 겨우 옮겨 밖으로 나가 보았다. 기씨 어멈과 한 시
다치고 지친 몸은 이미 기력이 쇠할대로 쇠했고 정신이 아득해지며 그녀는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갔다. 회사가 그녀에게 배정해준 이 연구실은 매우 은밀했고 회사의 이사장과 그녀의 조수 외에는 아무도 이곳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이곳은 여전히 그대로 였다. 원경능은 탁자위에 놓여 있던 컴퓨터, 현미경, 자신에게 약물을 주사할 때 사용했던 주사기, 그리고 옆에 버려진 시험관까지 하나하나 손으로 만져 보았다.컴퓨터는 켜져 있었다. SNS의 PC버전도 로그인이 되여 있는 상태였고, 읽지 못한 메세지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모두 가족들이 보낸 것이였고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있는 내용이였다.키보드를 만지작 거리던 원경능은 그제서야 현대에서의 자신의 죽음을 실감했고 다시는 부모님과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게 됐다는 사실이 큰 슬픔으로 다가왔다. 슬픔에 잠겨 잠시 멍해 있다 정신을 차린 그녀는 탁자 위에 놓여진 요오드포 한 병을 발견하였다. 그건 그녀가 자신에게 약물 주사할때 소독용으로 꺼낸 것이었다. 거의 매일을 연구실에서 지내는지라, 이 곳에는 늘 각종 약물들이 구비되어 있었다.그녀는 약 상자를 열어 보았다. 약물들은 거의 다 사용한 적이 없는 새것 이었다. 이 약물들이 있다면 그 아이를 살릴수 있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얼마나 잤을까...‘끽’하는 문소리에 깜짝 놀란 그녀는 잠에서 깨어났다. 시녀가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찐빵이 담겨 있는 그릇이 든채 방에 들어오더니 그릇을 탁자에 ‘쾅’하고 내려 놓으며 퉁명스런 목소리로 말했다.“식사 하세요!”그러더니 등불도 탁자에 놓고는 그대로 나가버렸다. 원경능은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아 있었다.‘꿈이 였구나!’서서히 정신을 차리자 점점 명확히 느껴지는 허기에,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내려와 찐빵그릇이 놓여진 탁자를 향해 걸어갔다. 겨우 몇걸음을 옮기는데 무언가 묵직한 물건이 발에 걸리는 느낌에.고개를 숙여 눈여겨 살펴봤다. 등
원경능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그녀의 머릿속에는 몇몇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가 다치기 하루 전, 이 몸의 원래주인은 표독스런 말들로 아이를 나무라며 안뒷간 지붕의 나무판자를 더 빈틈없이 손질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아이가 다친 건 아마도 뒷간 지붕에서 굴러떨어지며 못에 찔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애초에 화용이라 불리는 그 어린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뿐만 아니라, 그녀가 시집올 때 같이 따라 왔던 하인들이 연이어 다른 곳으로 팔려 가자, 그녀는 초왕이 따로 자기한테 붙여준 하인들에게 모든 화풀이를 해댔었다. 툭하면 하인들을 때리거나 욕하는건 거의 매일 있는 일이였고. 기씨 어멈 역시 그녀가 던진 잔에 맞아 피를 많이 흘렸던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몸의 원래주인은 성품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 사람들이 왜 그녀를 이토록 싫어하는지 납득이 됐다. “기씨 어멈에게 물어보거라, 내가 그 아이를 보러 가도 되는지.”원경능이 녹아에게 물었다.“왕비께서 그렇게 좋은 분이라면, 오늘 같이 곤란한 처지게 놓이지도 않았을 겁니다. 가식적인 걱정 따위 접어 두세요, 기씨 어멈과 화용이도 왕비님을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겁니다.”녹아는 말을 마치자마자 몸을 홱 돌려서 밖으로 나가 버렸다.문이 다시 닫혔다.원경능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이가 곧 죽는다고?’그녀는 화용이의 부상이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가늠할수 없었다. 이곳의 의원이 어떻게 아이의 상처를 치료하는지도 알리가 없다. 다만 만약 처치방식이 잘못된다면, 각막이 파손되고 안구도 파열되여 감염이 발생하고 말 것이다.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의 목숨을 구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끝내 마음 놓고식사조차 하지 못한 그녀는 약 상자를 열어 항생제 몇 알을 꺼내 들곤 밖으로 나갔다.기씨 어멈은 왕부로 팔려 온 몸이였고 따라서 화용이는 왕부의 가생노비(家生奴才 -노비가 주인집에서 낳은 자녀)였는데 봉의각 뒤편의 작은 원락에서 살고 있었다. 원경
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고 의원에게 손자를 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이씨 의원은 왕부의 가신인 탕양(汤阳)에게 기씨 어멈을 어떻게 좀 해보라는 눈치를 보냈다. 이에 탕양은 난처하다는듯 의원에게 되물었다.“의원님, 시도는 한번 해보심이 어떠신지요?”그 말에 이씨 의원은 코웃을 치며 면박을 줬다..“시도해 보라고요? 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손을 대면, 잃는 건 제 명성뿐입니다.”이 말을 들은 기씨 어멈은 거의 기절할 듯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아이고 내 손주, 불쌍한 내 손주!”녹아가 애써 기씨 어멈을 위로하며. 부축해서 일으켜 한쪽에 앉혔다.이때 탕양이 의원에게 말했다.“다른것보다 저 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 보여서요. 혹시 의원님께서 저 아이의 고통이라도 덜어 줄수 있는 약을 처방해 주실수 없을가요? 저 아이가 의원님의 손을 거쳐 갔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에 내지 않겠습니다.”탕양은 이 말을 하며 의원의 소매 속에 은덩이를 밀어 넣었다.이씨 의원은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고통을 멈추는 것이라면, 괜찮을 듯 싶습니다. 그러나 통증만 줄여서 크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겁니다. 떠날 사람은 떠나게 되여 있어요.”“네네, 알겠습니다!”탕양도 그저 화용이가 편하게 갈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였다. 그 역시 이 아이가 태여나서 이만큼 커오는걸 지켜본 사람이고, 크게 다쳐서 오늘 내일 하는 아이가 너무 불쌍했다. 이씨 의원이 처방전을 쓰려고 방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누군가 방안으로 급히 들어가더니 문이 ‘쾅’하고 닫히며 안쪽에서 빗장을 걸어 문을 잠궈 버렸다.녹아는 방금 문을 닫히기 전 스쳤 지나가던 옷자락의 주인을 기억해 내고는 비명을 질렀다.“왕비님 이십니다!”기씨 어멈은 왕비가 들어갔다는 말에 참을수 없는 슬픔과 분노에 이성을 잃었다. 한 마리의 암사자처럼 달려들어 힘껏 문을 두드렸다.“문을 여십시오! 문을 열어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안에서는 원경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고 말 역시 길지 않았다. 그녀
제대로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목이 무쇠처럼 단단한 손가락에 잡혔다. 그녀는 옥죄여 오는 질식감에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는 격노하여 당장이라도 불을 뿜을 것 같은 초왕의 얼굴이 보였다. 호흡이 막힌 그녀는 페속의 산소가 점점 줄어드는 질식감에 정신이 아득해지며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열 살도 안 된 아이한테 어찌.”초왕의 분노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어찌 이리도 잔인할수가 있을가? 여봐라, 왕비를 끌고나가 곤장 30대를 쳐라!”며칠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원경능의 체력은 이미 바닥이었고 방금 뺨에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온전히 서있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힘이 빠져 있었다. 하여 초왕이 목을 조르던 손을 풀자 그녀는 맥없이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다시 호흡이 가능해지자, 그녀는 다급히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나 곧이어 그녀의 몸은 다시 누군가에 의해 일으켜졌고 강제로 끌려나갔다.아직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그녀의 눈에는 얼음이 서릴 정도로 냉혹한 초왕의 얼굴이 들어왔고, 이와 동시에 그의 눈에 어린 증오와, 몸을 감싼 화려하고 진귀한 비단 옷도 보였다.그녀는 그대로 돌계단에서 끌어 내려졌다. 딱딱하고 뾰족한 돌계단에 머리가 부딪혔다. 날카로운 아픔과 함께 눈앞이 새까매지더니 결국 정신을 잃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이 그녀를 덮쳤다. 살아생전 한번도 겪어 보지 못한 고통이었다. 허리와 허벅지에 끊임없이 매질이 이어졌고고 한 대씩 맞을 때마다 뼈마디에서 부터 온몸으로 고통이 퍼져나갔다. 그녀는 허리와 다리가 곧 부러질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곧이어 입안에서도 피비린내가 느껴졌다. 고통을 참기 위해 입술과 혀를 깨물었기 때문이였다. 정신은 점점 더 아득하게 멀어지는듯 했으나 아예 기절할수는 없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통이 그녀를 깨어있게 만들었기 때문이다.곤장 서른대를 다 맞는 시간은 그녀에게 한평생처럼 길게 느껴졌다.원경능은 22세기의 의학천재라 불렸으며, 그녀를 숭배하고 존경하는 사
탕양은 녹아에게 약을 짓게 하고, 기씨 어멈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넨뒤 그 곳을 떠났다.기씨 어멈은 계속 화용이를 돌보고 있었고 날이 어두워 지자 부쩍 겁이 나기 시작했다.녹아도 기씨어멈의 곁에서 함께 지키고 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채 조용히 화용이를 지켜봤다. 그가 어느 순간부터 더이상 숨을 쉬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깊이 잠들었던 화용이는 뜻밖에도 자시가 가까워지자 깨어났다. 아이는 한쪽 눈을 천천히 뜨더니 기씨 어멈을 바라보았다.“할머니, 저 배고파요!”기씨 어멈은 놀랍고도 기쁜 나머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상처가 번지면서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심지어 그녀가 힘들게 구해온 양유(羊奶) 역시 한모금도 넘기지 못했던 화용이다.기씨 어멈은 손을 뻗어 아이의 이마를 만져보았다. 의외로 그렇게 뜨겁지 않았다.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구나, 효과가 있어!”기씨 어멈은 기쁨에 겨워 녹아에게 말했다.“그러게요, 의원님의 약이 효과가 있나 봐요!”녹아도 덩달아 기뻐했다.***다음날 이씨 의원은 다시 초왕부로 모셔졌다.그 아이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식에 그는 신기해 했다.“이 녀석은 명줄이 참 길구먼. 다 죽어가던 참이었는데.”기씨 어멈은 무릎을 꿇으며 머리를 조아렸다.“의원님, 약을 하나 더 지어주십시오. 제 손주 녀석 좀 살려주십시오.”이씨 의원은 잠시 멍해졌다. 어제 처방한 약은 전혀 아이를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기껏해야 통증을 멎게 하고 진정시키는데 쓰였을 뿐, 상처 치유에는 큰 효과가 있는 약이 절대 아니였다.그러나, 어쩌면 우연히 맞아 떨어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화용의 맥을 짚어보니, 확실히 어제보다 나아 보였고 몸도 더는 뜨겁지 않았다.하여 그는 다른 처방을 내렸다. “시녀를 불러 나를 따라와 약을 지으라 이르게. 연속 이틀 동안 먹여야 하네. 상처에 바르는 가루약도 마찬가질세. 호전을 보이면 계속 약을 지으러 오게.”“감사합니다, 의원님!”“진찰비와 약값은 누가 내는가?”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