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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화 애인을 둔 사람의 각오

여기는 서울시 교외의 한 낡은 동네다. 90년대 말에 지은 직원 복지 아파트 단지 옆에 이미 폐업한 대형 화학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서중석은 이 화학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의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

10년 전, 화학공장에 부도가 났고 배 씨 가문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그 뒤 별다른 계획 없이 계속 이곳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만약 어느 날 계획이 생긴다면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단지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

자본가는 피도 눈물도 없다. 배인호 같은 천생 장사꾼은 더 계략에 능했다. 그가 허락한 철거 보상금은 딱 표준선을 맞췄고 한 푼도 더 주지 않았다.

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배인호가 서란을 위해 자선가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말이다.

서중석이 대표로 배인호와 면담했고 충돌을 예상했지만 배인호는 의외로 배중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곧이어 배상 표준을 바꿨고 입주민들 모두 표준선을 훌쩍 넘는 금액을 보상받게 되었다.

이러한 행보는 서란을 화나게 하면서도 감동받게 했다. 화나는 건 이러한 상황을 애초에 배인호가 만들었다는 거고 감동받은 건 배인호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는 거였다.

나는 차 안에 앉아 단지에 켜진 불들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

전생에 나는 배인호가 철거 보상 방안을 바꾼 사실을 알고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여자 하나를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

계산해 보니 그때는 배인호가 서란을 쫓아다닌지 반년쯤 되던 때였다. 반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그녀에 미쳐있었다는 거다.

서란이 몇 동 몇 호에 사는지까지는 모르는 터라 나는 차를 운전해 크지 않은 단지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담장도 없고 경비도 없는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편했다.

마침 한바퀴를 다 돌았을 때 익숙한 부가티 한대가 보였다.

배인호가 올블랙 차림으로 차 앞에 기대어 있었다. 긴 다리로 차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고 머리는 살짝 아래로 떨구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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