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를 보낸 지 2초 만에 강태민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아버지...”연결되자마자 건너편에서 반백 살 넘은 남자가 그녀를 훑어보며 다급하게 물었다.“은지야,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의사를 찾아? 어디 아파? 정신과 의사를 찾는 거야? 신경과 의사를 찾는 거야? 이름은 비슷하지만 치료하는 병은 달라.”말이 너무 빨라서 신은지는 겨우 중간에 끼어들 틈을 찾았다.“저 말고 태준이 아파요.”“오.”강태민의 격앙된 감정은 이내 가라앉았고, 얼굴에 글자만 쓰지 않았지 ‘그럼 괜찮아’라는 뜻이 뚜렷했다.“어디가 아픈데 의사를 둘이나 찾아? 돈이 너무 많아서 아픈 것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대?”신은지가 박태준의 상황을 대충 얘기하자, 강태민은 잠시 머뭇거렸다.“내가 알아볼게.”“고마워요, 아버지.”그녀는 또 걱정되는 듯 강태민에게 몸은 괜찮은지 물었다. 전화를 끊기 전에 강태민이 갑자기 말했다.“내가 전에 보낸 사진 속 사람들을 좀 고려해 볼래? 많이 보고 다른 기회도 열어둬. 기민욱이 죽은 지 언젠데 이제야 후유증이 나타났어. 만약 이후에 또 다른 증상이 나타나면...”강태민이 사진 얘기를 꺼내자, 박태준은 즉시 귀를 기울여 들었고 머릿속에 신은지의 앨범에 저장돼 있던 눈꼴사나운 사진들이 떠올랐다.‘장인어른은 감상 수준이 왜 이 모양인지? 끔찍해.’‘그중에 은지와 어울릴 만한 사람이 어디 하나라도 있는가?’이런 생각을 하며 자세히 듣던 박태준은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그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다른 남자를 찾으라고 꼬드기는데, 그가 죽으면 장례식이 끝나기 바쁘게 그녀의 재혼 결혼식을 치르는 게 아닌가?신은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아버지, 그 사람을 자극하지 마세요. 우리는...”그녀는 둘이 이미 결혼했다고 말하려 했지만 강태민이 말을 가로챘다.“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잖아. 아직 결혼 전인데 병이 났으니 신중하게 고려해야지. 만약 그 사람이 이후에 바보가 되면...”박태준이 벌떡 일어나 신은지 쪽으로 성큼성큼
업무 처리 속도가 빠른 진영웅은 박태준이 지시해서 5일 만에 공예함을 폭력남의 손에서 넘겨받았다.그리고 공예함의 의견을 물은 후 지난 한 달 보육원에 다녀간, 입양 의향이 있는 가정 리스트를 정리해 냈다.그 남자는 진작부터 이 애물단지를 버리려 했다. 전에는 공예지와 함께 살아 만나는 일이 없었고, 그의 돈도 쓰지 않았기에 아무 탈 없이 사이좋게 지냈다. 공예지가 죽은 후 그는 공예함을 버리려 했지만 매번 경찰이 돌려보냈다.그런데 공예함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폭력남이 2억을 내놓으라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제기할 줄이야.이 일을 어떻게 해결했는지 신은지는 모른다. 돈은 분명히 주지 않았다. 심지어 폭력남이 마지막에는 애를 데려가 달라고 진영웅에게 사정했다고 한다.진영웅은 입양 의향이 있는 가정 명단을 신은지에게 보냈다.“사모님이 정하라고 하십니다.”신은지는 그때 근무 중이었는데, 대충 훑어보니 모든 가정이 흠잡을 데가 없는 것 같았다.“알아서 정하라고 하세요.”“대표님께서 의심받을 만한 일은 피하겠다고 하셨습니다.”“...”신은지는 이 대답을 듣고 웃었다.“태준이 직접 한 말이에요?”“맹세할 수 있습니다. 거짓말을 보탰다면 평생 대표님의 머슴으로 살겠습니다.”이러면 잘릴 염려가 없다.신은지는 몸을 뒤로 젖히고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그럼 그 사람한테 물어봐요. 그때 나 몰래 그 아이 언니랑 약혼식에 갈 때는 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는지? 그때는 무식해서 그런 걸 몰랐대요?”그녀는 웃으면서 장난쳤지만 이내 올라갔던 입꼬리가 내려왔다. 박태준은 요즘 상태가 더 안 좋고, 심지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여자는 역시 지난 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는 동물이다. 그는 감히 말을 잇지 못했다.“사모님, 제발 살려주세요. 지금 회의가 없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직접 대표님께 전화해서 물어보실래요?”그래서 결국 신은지가 결정하게 됐다. 선택한 후, 그녀는 직접 공예함을 데리고 입양 가족과 하루를 함께 보낸 후 공예함이 원하는지 확인하고
한 교수는 신은지에게 모든 치료 과정을 설명해 줬다.“제가 일단은 간단한 최면술로 박태준 씨의 혼란스러운 기억을 정리해 줬으니, 예전보다 두통이 나아질 거예요. 복용하고 있는 약의 부작용 외에도 본연의 기억들과 인위적으로 삽입된 기억들이 서로 뒤섞이면서 두통과 기억 혼란을 유발하는 것 같습니다. 아마 앞으로 기억들이 뒤죽박죽되면서 더 혼란스러워질 것입니다.”전문적인 의학 용어들이 많아서 설명을 백 퍼센트 이해하지 못한 신은지는 다시 진지하게 되물었다.“교수님, 그러면 진실한 기억과 거짓된 기억을 서로 분리할 방법은 없나요?”“사람의 기억은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심오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진실한 기억과 거짓된 기억을 분리해 줄 방법은 없습니다. 게다가 기억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왜곡되는 경향도 있어서 점점 더 혼란스럽고 힘들 것입니다. 일단은 병세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두통 증상이 완화되지 않는다면 물리 치료와 정신 치료를 병행하면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얼마 후, 최면에서 깬 박태준은 신은지의 손을 꼭 잡고 호텔을 나와 보행로를 천천히 걸었고 그들 뒤로 검은 차가 따라가면서 길을 환하게 비춰줬다.그는 진료가 끝나고 나서부터 신은지의 표정이 어둡고 대화를 나눌 때도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것 같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한 교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어?”“...”하지만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신은지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고 박태준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7월의 무더운 밤에 산책하던 두 사람은 몇 분도 안 되어서 온몸이 땀에 젖었다.신은지가 갑자기 결심한 듯 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박태준을 진지한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태준아, 우리 치료받자.”“...”“네가 우리의 추억들을 잊어도 괜찮고 날 기억 못해도 괜찮으니까 우리 당장 치료받자. 치료가 끝나면 지금처럼 내가 항상 네 곁을 지킬게.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나유성, 연우 도련님도 다 네 옆에 있을 거니까 아무것도
진유라는 차에 타자마자 참았던 욕을 마음껏 퍼붓기 시작했다.“박태준 얍삽한 놈! 서른 살도 넘은 남자가 초등학생처럼 고자질이나 하고 내가 정말 은지 남자 친구만 아니었으면 절대 참지 않았을 거야!”진유라가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순간, 그녀의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어디서 만날래? 오늘 내가 살게.”진유라의 친구는 돈을 빌리려고 전화했다가 그녀의 저녁 약속에 흔쾌히 동의했다.“좋아, 어디서 만날래? 네가 정하면 그쪽으로 갈게.”진유라는 휴대폰을 들고 곰곰이 약속 장소를 생각했다.“엔조이 클럽 어때?”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곽동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가면서 몸서리쳤다.“요즘 새로 오픈한 곳이나 다른 핫한 곳은 없어?”그녀의 친구는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새로운 곳? 조금만 기다려, 내가 위치 보내줄게.”“진혁이 패거리도 같이 불러서 아예 큰 룸을 잡는 건 어때?”“알겠어, 네 말대로 다 준비해 놓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통화가 끝난 지 2분도 안 되어서 진유라의 친구는 클럽의 위치를 보내왔다.새로 오픈한 클럽 정문에는 검은 티셔츠를 입은 남성 웨이터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홀 안에도 큰 키에 잘생긴 외모, 근육질 몸매를 가진 남성 웨이터들밖에 없었다.진유라는 그들의 외모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얼굴까지 화끈거렸다.‘어떻게 이런 남자들만 모아놨을 수 있지?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잖아! 코피까지 흘렸으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어!’이때 한 웨이터가 진유라에게 다가오면서 물었다.“누님, 예약하셨습니까?”진유라는 가까이 다가온 웨이터의 훤칠한 키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에 놀라서 제대로 눈도 못 마주쳤고 웨이터는 그녀를 유혹하려는 듯 환하게 웃으면서 윙크까지 날렸다.“...”“누님?”웨이터는 진유라가 계속 멍해서 대답이 없자, 더 가까이 다가가면서 다시 물었다.“예약하셨습니까?”웨이터한테서 풍기는 낯선 향기가 진유라의 코끝을 찔렀고 그녀는 감전이라도 된 듯 몇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주변을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진유라는 룸 안에 들어온 사람이 곽동건이라는 것을 알고 다급하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이때 곽동건이 진유라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자연스럽게 옆에 앉았다.진유라는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풍기자, 자기도 모르게 긴장하는 느낌이 들었고 등을 곧게 펴고는 얌전히 앉아 있었다.곽동건은 그녀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웃음을 참으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유라 누님?”진유라는 멋쩍게 웃으며 다급하게 그의 말을 반박했다.“누님이라뇨, 제가 어떻게 감히!”곽동건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웃는 듯 마는 듯 다시 물었다.“그러면 유라 동생이라고 부를까요?”당황한 진유라는 하마터면 곽동건의 얼굴에 마시고 있던 술을 뿜을 뻔했다.“동생이라뇨... 근데 여기는 왜 왔어요?”“오늘 유라 동생이 클럽에서 한턱낸다는 소문이 나한테까지 들려서 왔죠. 술도 많이 준비되어 있고 근육질 남자도 많은 데다가 도박까지 한다면서요?”진유라는 자기가 조금이라도 늦게 답하면 곽동건에게서 고소장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반박했다.“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듣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전부 거짓이에요. 그냥 간만에 친구들과 만나서 춤추면서 술 마실 생각이었는데 무슨 도박이에요!”음악 소리가 없는 룸 안은 밖의 바람 소리가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누군가가 진유라에게 계속 신호를 보냈다.곽동건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많은 사람 중에서 누가 소리를 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당신 친구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요.”진유라는 고개를 돌리고 사장님 포스를 풍기면서 말했다.“죄를 지은 사람처럼 몰래 숨어서 말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당당하게 말해!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어?”“...”룸 안에는 몇 초 동안 정적이 흘렀고 진유라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곽동건을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누님, 흥분하지 마!”잘못한 것이 없는 진유라는 등을 꼿꼿하게 세우면서 당당하게 말했다.“양심에 찔리는 짓도 하지 않았는데 뭘 조용히 해! 곽 변호사님한
창밖을 내다보던 곽동건을 다시 몸을 돌려 그녀를 보았다.“유라 씨가 날 쥐고 흔드는 게 아니라, 내가 당신을 좌지우지한다고요?”그는 손바닥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유라 씨, 당신한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걸 잊지 않았죠? 앞으로 오늘 같은 모임은 자제해야 하지 않을까요?”오늘 밤 일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걸 아는 진유라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주눅이 들어있다가 곽동건이 먼저 말을 꺼내자, 미안함에 더욱 움츠러들면서 말했다.“오늘 밤 일은 동건 씨가 오해했어요. 나도 모르는 남자들이 갑자기 무리 지어서 들어올 줄 몰랐단 말이에요...”“유라 씨, 나 아직도 다리에 힘이 안 들어가요.”진유라는 어쩔 수 없이 곽동건을 부축해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곽동건은 한 손으로 진유라의 허리를 감싸고 그녀의 목에 입술을 갖다 댔다.“유라 씨...”그는 갑자기 진유라에게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고 그녀도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자연스럽게 그의 키스에 응했다.키스의 강도가 점점 거세지면서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있던 그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고 다른 한 손으로 묶여있던 그녀의 머리카락을 감쌌다.이어 그의 입술이 그녀의 뺨을 따라 가늘고 긴 목덜미까지 내려왔고 순식간에 그녀의 목에 붉은 키스 자국을 남겼다.격렬한 키스로 인해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진유라는 중심을 잡기 위해 양팔로 그의 목덜미를 감싼 채 품에 기댔다.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손을 빼면서 그를 밀어냈다.“동건 씨, 늦었어요, 나 이만 돌아갈래요.”그러나 곽동건은 그녀의 가슴 위쪽에 키스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유라 씨, 나 오늘 해도 돼요?”“...”사실 진유라도 야릇한 분위기에 이끌려 곽동건과 하룻밤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적극적인 행동이 싫지 않았기에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그가 처음으로 자기를 유혹하려고 다가왔을 때 분위기를 그르칠까 봐 두려워 거절했던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