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아가 유난히 협조적이어서 세찬의 마음은 묘했지만 차마 이상한 점을 보아내지 못했다.두 사람은 점심이 되어서야 느릿느릿 일어나 밥을 먹었고, 세찬은 민아와 오후 내내 함께 있으면서 마음이 그렇게 평온했던 적이 없었다.비서가 거듭 재촉해서야 세찬은 그곳을 떠났다.세찬이 떠나기 전 민아는 헬기 앞에서 아쉬운 듯 세찬의 허리를 껴안으며 배웅하러 다가왔다.“그럼 언제 또 날 보러 올 거예요?”“뭐야, 떠나기도 전에 또 보고 싶어? 어젯밤에 충분하지 않았나?”세찬이 가볍게 웃으며 말하자 민아는 진중한 얼굴로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세찬을 본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원칙적인 도윤과는 달리 세찬은 흥미가 당기면 사업 얘기를 나눌 때도 테이블 밑으로 자신의 다리에 손을 얹는 남자였다.“세찬 씨, 가서 내 생각할 거예요?”민아가 갑자기 묻자 세찬은 단순히 애교라고 생각하며 손을 뻗어 민아의 코를 만졌다.“밤이면 유난히 생각나지.”세찬은 늘 민아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 않았지만 민아는 웃으며 말했다.“그럼 전 생각 안 할래요, 너무 힘들어.”세찬이 뭐라 말하려는데 비서가 다시 재촉했다. 그는 오늘 다른 나라로 가야 하는데 더 지체하면 늦을 게 뻔했다.세찬은 민아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고 깊게 입을 맞추었다.“5일, 길어도 5일 안에 올게. 선물도 가져올 테니까 밤낮으로 내 생각해. 반지는 절대 빼면 안 돼.”“알았어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대표님.” 민아는 세찬의 품에서 물러나 안전한 곳에 섰다.왠지 그 대표님이라는 호칭이 세찬은 마음에 걸렸다. 마치 민아가 일부러 자신에게서 멀어지려는 것 같았다.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세찬은 별다른 생각 없이 헬리콥터에 올랐다.헬기는 떠났고 세찬은 민아가 자신이 떠난 방향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작은 점이 세찬을 매일 생각나게 했다.세찬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민아는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드디어 갔네.”
교신 후 그날 밤, 일행은 섬을 떠날 준비를 마쳤다.섬에는 총 352대의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고, 지아는 오래전에 데이터를 수집해 두었기 때문에 이를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지아는 아이를 데리고 산 뒤편 해안가로 갔고, 바닷바람이 불자 민아는 소름이 돋았다.이곳은 지아가 시체를 매장한 곳이고 그동안 해부 후 묻힌 시신은 족히 30구는 되었다.이 바람마저도 꽤 음침한 느낌에 민아는 목뒤가 서늘해졌다.이러한 이유로 다른 일꾼들도 감히 산 뒤편으로 올 엄두를 내지 못했고, 그곳이 탈출하기에 가장 편리한 장소였다.민아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너 혹시 일부러 그런 건 아니겠지, 지아야? 예전보다 훨씬 더 계산적으로 행동하잖아.”“난 너무 많이 실패했어. 이번만큼은 실패하고 싶지 않아.”“엄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너희들 삼촌 보고 싶지 않아? 엄마가 데려다줄게.”이미 전효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두 아이는 전효를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삼촌! 보고 싶었어요.”해경은 한달음에 달려갔고 전효도 아이들이 그리운 듯 품에 꼭 껴안았다.소망도 조용히 전효를 부르며 다가갔다.전효는 무릎을 꿇고 아이를 부드럽게 품에 안았다.민아가 지아의 팔을 슬쩍 건드리며 물었다.“대체 밖에서 다른 남자는 언제 찾은 거야? 비밀스럽게 구는 걸 보니 설마 당당하지 못한 사람이라도...”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소망은 갑자기 손을 뻗어 전효의 가면을 벗기고 볼에 부드럽게 뽀뽀했다.“삼촌...”지아는 전효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얼굴에 흉터나 무슨 자국 같은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작 얼굴은 깨끗하고 입체적인 이목구비에 잘생겼다.착각인지 모르겠지만 전효와 도윤이 조금 닮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전효는 재빨리 가면을 썼다.“얼른 가자, 늦으면 문제 생길 수도 있어.”그제야 지아는 정신을 차리며 밤에 희미한 불빛 때문에 잘못 본 거라 생각하며 민아의 손을 잡고 보트에 올랐다.지아는 이 섬에 촘촘히 설치된 카메라 외에도 작은
도윤의 온몸이 떨리고, 가슴에서 새빨간 피가 흘러나와 자신의 손과 눈을 적시며 전림이 죽었던 순간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 떠올랐다.말도 안 돼!“아니, 전림이 아니야. 전림은 내 품에서 죽었어, 확실해.”그 총알이 전림의 심장을 관통했고 전림은 죽은 게 확실했다.도윤은 남자의 가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전효야. 내 짐작이 맞다면 전림에게 쌍둥이 형제가 있는데, 그놈일 거야!”“세상에, 어떻게 이런 인연이. 전림에게 형이나 동생이 있는데 왜 우리가 몰랐죠?”“그건 전씨 가문의 문제야. 섬에 있는 사람들을 보내서 저들을 막아!”도윤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지아야, 미안해”이번에는 정말 놓아주려고 했는데. 이 남자의 정체가 너무 미스터리하고 게다가 전림의 형제라면 도윤은 더 이상 상대를 밖에 둘 수가 없었다.순식간에 섬에서 갑자기 경보가 울렸다.민아는 당황한 나머지 긴장한 얼굴로 하마터면 배에서 떨어질 뻔했다.“어떻게 이렇게 빨리 우릴 찾은 거지? 지아야 어떡해? 우리가 다시 잡히면 개도윤이 나까지 철창에 가두지 않을까?”“징징거릴 시간 있으면 얼른 뛰어. 전효 씨, 속도를 올려요.”지아는 두 아이를 끌어안고 두툼한 외투로 감싼 채 품에 꼭 안아 보호했다.전효가 스피드를 올리자 보트가 빠르게 달렸다.지아가 민아를 달랬다.“걱정 마, 우리가 탈출한 걸 들키더라도 한동안은 우리 위치를 모를 테니까.”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자마자 지아는 머리 위에서 프로펠러 소리가 들렸다.헬기는 그들이 있는 방향으로 바다를 향해 날아갔다.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이 자신의 행방을 알고 있었다는 생각만 떠올랐다.“지아야, 너희 두 사람 쌍으로 정말 대단하다! 네가 충분히 똑똑한 줄 알았는데 저 사람이 더 똑똑한 줄 몰랐어. 끝났어, 끝났어. 이번엔 절대 못 탈출할 거야. 잡히면 돼지우리에 넣는 거 아니야? 게다가 넌 네 애인도 있잖아. 차라리 내 애인이라고 할게.”지아는 할 말을 잃었다.“쓸데없는 말 해 줘서 참 고맙다.”민아가 히죽 웃었다.“
보트를 정박한 전효는 곧바로 지아의 품에서 두 아이를 안고 다급하게 말했다.“자, 따라와!”지아는 민아의 손을 잡고 섬으로 오른 뒤 전효를 따라 미리 파놓은 통로로 들어갔다.“당장은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여기 계속 숨어 있다가 섬을 포위하면 잡히지 않겠어요?”전효의 이마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입에서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내 짐작이 맞다면 한대는 공중에서 내려올 거고 다른 한 대는 대기할 거야. 이런 헬기는 연료가 3시간밖에 버티지 못해. 다른 사람들이 섬을 포위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고 지금 섬에 있는 사람들만으로는 이 어둡고 컴컴한 곳에서 우리를 찾을 방법이 없어. 두 시간만 더 버티면 돼.”민아는 전효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누구신데 정말 대단하세요. 모든 걸 꿰뚫어 보시는 군요!”“전효라고 합니다.”전효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여러 사람을 데리고 물과 음식이 있는 거대한 지하 동굴로 가더니 지아에게 병 하나를 건넸다.“물 좀 마시고 좀 쉬어. 앞으로 매일 이동해야 하니까.”“고마워요.”두 아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상황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큰 반응이 없었다.전효의 말대로 섬 전체는 아무도 개발하지 않아 식물들로 가득했고 걸어서 섬 전체를 돌아다니려면 사흘이나 걸리는 데다 익숙하지 않은 곳이라 사람을 찾는 것은 바다에서 바늘 찾기와 같았다.민아는 지아에게 기대어 잠을 청했고, 전효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역시나 머리 위 헬기는 사라진 상태였다.감시를 피해 바다로 도망치자 도윤도 더 이상 찾을 수 없었다.지아는 섬을 떠나고 나서야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마음의 평온함을 느꼈다.하늘이 하얗게 변할 때까지 밤새 달려온 끝에 바다 위로 떠오른 일출은 정말 아름다웠다.지아는 큰 소리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드디어 자유를 찾았어!”몇 년이 지난 지금, 지아는 드디어 도윤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고 이제부터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민아 역시 지아의 모습에 감동을 받아 꽉 껴안았다.“지
두 아이도 머리를 내밀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마!” “나...”지아는 민아의 품에 기대어 작은 목소리로 숨을 헐떡이며 온몸에 힘이 빠진 듯했다.민아의 표정이 어두웠다.“지아야, 너 그전까지 매일 해부해도 토하지 않았잖아. 설마, 최근에 개도윤이랑 잔 적 있어? 이 증상만 보면 꼭... 임신한 것 같잖아.”지아의 표정이 굳었다. 요 며칠 도윤을 돌봐줄 때도 둘은 마지막 단계까지 가지도 못했고 시간적으로도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혹시...지아는 강욱과 배에서 보냈던 밤을 떠올렸다.지아는 다음 날 A시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하빈에게 피임약을 사다 달라고 부탁했고 임신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아니, 임신은 아닐 거야.”지아의 손이 약간 떨렸다.“약 먹었어.”“약? 지아야, 피임약으로만 100% 피임이 가능한 건 아니야. 생리했어?”지아가 계산을 해보니 마지막으로 생리를 한 것이 두 달 전이었다.줄곧 생리가 규칙적이지 않았기에 개의치 않았던 지아는 임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혼란스러워 고개를 가로저었다.“아니, 아니야. 내가 임신했을 리 없어!”민아는 지아의 충격과 두려움에 찬 표정을 보며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지아야, 걱정하지 마. 밤새 급하게 이동하느라 배가 아파서 그런 걸 수도 있어. 의사 선생님도 너 다시 임신하기 힘들다고 했었잖아. 괜히 겁먹지 마.”지아의 손에 식은땀이 흘렀다. 머릿속엔 정말 강욱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생각뿐이었다.지아는 강욱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날 밤은 그저 사고였다.지아는 가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도중에 몇 개의 섬을 지났지만 임신 테스트기를 파는 곳은 없었다. 역겨운 증상이 점점 심해지면서 점점 더 불안해졌다.민아도 지아의 병이 다시 발작한 건 아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임신이든 병이든 어느 쪽도 좋은 일이 아니었다.지아는 병이 발작하면 단순히 토하고 메스꺼운 것이 아니라 위가 아프다는 걸 잘 알았다.이런 증상은 지난 임신 때 겪었던
주원을 보고 너무 놀란 지아는 잔뜩 들떠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주원아, 네가 어떻게 여기 있어?”“누나 찾기 정말 힘들었는데 다행히 전효 형한테 연락이 와서 만나게 됐네요.”“응, 지난 몇 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지아는 한탄했다.“누나, 병은 좀 어때요?”지아는 가발을 벗었다.“상반기에 재발했을 때 죽을 뻔했는데, 다행히 예전에 네가 준 약과 항암치료로 잘 이겨냈어. 지금은 항암 부작용도 많이 줄었고 머리카락도 자라기 시작했지만 종양은 여전히 있어.”남자보다 더 짧은 지아의 머리를 보는 민아의 눈에는 아픔이 가득했다.“지아야, 고생 많았어.”“다 지나간 일이야. 그때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내 명이 긴가 봐. 주원아, 항암약물 연구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진전이 있어?”“지아 누나, 이번엔 누나 병 완치해 주려고 찾은 거예요.”완치라는 말을 듣자 지아의 눈은 순식간에 밝아졌고,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내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요?”세계의 의료 수준이 많이 발전했다고는 하지만 암은 여전히 인류가 극복하기 어려운 난제였다.아무리 좋은 의사도 100% 완치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네, K국에 가서 반년 내내 찾아다니다가 드디어 효과가 있는 약을 찾았어요. 다른 암은 100% 낫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위암은 내가 배합해 준 약대로만 먹으면 반년 안에 암세포 수치가 정상으로 되고 종양이 사라지며 몸의 수치도 서서히 전부 정상으로 바뀔 수 있어요.”지아는 감격했다. 몇 년 동안 이 병으로 깊은 고통을 받아왔고, 단기간에 또다시 심각한 발작이 오면 이를 억제하기 위한 항암치료를 더 이상 받을 수 없었기에 결국 죽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민아도 외쳤다.“신의네! 특허 내지 않을래요? 제가 투자해서 함께 연구개발에 매진하면 분명 큰돈을 벌 수 있을 거예요.”주원은 옆에서 잔뜩 들떠있는 여자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이마를 짚었다.“흠, 여기는 내 절친 민아고 이쪽은 주원이라고 해.”“안녕하세요.”“만나서 반
주원의 시선이 지아의 두 손을 잡은 쌍둥이에게 향하면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또... 임신했다고요?”준비하고 낳은 지윤을 제외하고 전부 예상치 못한 임신이었다.지아는 나중에 관계를 한 적이 없었다. 쌍둥이는 도윤이 고열에 시달려 의식이 흐릿할 때 생긴 것이고, 이번에는 더욱 말도 안 되었다.의사가 임신하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왜 매번 이렇게 적중하는 걸까.“요즘 좀 메스꺼워서 예전에 임신했을 때랑 증상이 같아...”“알았어요. 그럼 초음파부터 해봐요. 그건 가능하지만 이 동네에서 MRI는 할 수 없어요. 초음파부터 해서 임신 여부를 확인한 다음 종양은 다른 곳에서 검사해야 해요.”“알았어, 네 말대로 할게.”이동하는 내내 지아는 어두운 표정이었다. 해경과 소망을 임신했을 때 사람들은 아이를 지우고 치료를 받으라고 권했지만, 지아는 고집을 부렸고 결국 아슬아슬하게 두 아이를 낳았다.지아가 기를 쓰고 아이를 낳겠다고 고집한 건 한편으로는 앞으로 임신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지윤이를 잃은 슬픔이 더해져 두 아이에게 모든 모성애를 쏟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도윤의 자식이라는 생각에 출산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했다.이번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지아는 강욱을 사랑하지도 않았고, 지금 이 시점에서 아기를 원하지도 않았다.이 아기는 부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것이다.“지아 누나, 이 아이 원하지 않아요?”지아는 머뭇거렸다.“주원아,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 아기는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괜한 생각일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임신하고 싶지 않아.”“이해해요. 임신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일단 검사부터 해요. 혹시라도 정말 임신이면 좋은 병원에서 고통 없이 지우면 되니까 괜찮아요.”그러자 지아의 마음은 더 무거워졌다.작은 마을에 있는 병원은 다소 낡았고 초음파실도 초라했다.하얀 커튼은 얼룩으로 뒤덮여 있었고, 주변 벽은 콘크리트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구석에는 거미줄까지 있었다.“누우세요
물을 마시던 민아는 지아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서 뿜어버렸다.“이런, 뭐야! 그놈이 아니야?”민아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목소리를 낮췄다.“이런 나쁜 여자일 줄은 몰랐는데? 애 아빠는 누구야, 가면 쓴 남자야 아님 연하남이야? 두 사람 너에게 잘해주는 걸 봐서 개도윤처럼 널 해치지는 않을 거야.”지아는 마음이 복잡했다.“둘 다 아니야...”“지아야, 이건 아니지. 난 강세찬이 한번 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지도 말해줬는데 넌 왜 아무것도 안 알려줘!”지아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이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 민아가 알아서 불만을 털어놓은 것들이었다.“말 하자면 얘기가 길어.”“그럼 짧게 해.”민아가 들뜬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아 호기심이 동한 게 분명했다.지아는 민아의 닦달을 이기지 못하고 전에 있었던 일을 간략하게 말해주었다.항상 말이 많았던 민아도 그 말을 듣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묵했다.“그래서... 그 남자는 자기 아이라는 걸 알아?”“몰라, 그날 밤 이후로 떠났어. 그 이후로 연락도 안 되고... 그땐 상황이 급해서 그냥 벌어진 일이야. 분명 피임약을 제때 먹었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민아야, 나 어떡하면 좋지?”사랑하지도 않은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지아는 복잡한 마음에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정말 모르겠어. 나도 아이를 가져본 엄마고, 할 수만 있다면 그 작은 생명을 해치고 싶지 않지.”주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이 아이는 키울 수 없을 것 같아요. 지아 누나가 앞으로 반년 정도 내가 준 약을 먹으면 임신을 해도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지 장담할 수 없어요. 태아가 기형아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아요. 그때 평생 고생하는 것보다 지금 당장 이 아이를 지우는 게 나아요.”이전과 같은 선택지에 놓여 있었는데 그때는 그래도 아이를 지킬 이유가 있었지만 지금은...지아는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고 싶었지만 임신은 자신의 발을 단단히 묶어 앞으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뒤로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