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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심유진은 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복도에서 벌어진 사고 때문에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었고 당연히 그중에는 조건웅의 부하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건웅이 우정아를 안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지만 아무도 놀라거나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진즉 조건웅과 우정아의 간통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심유진은 방금 전 자신이 일부러 모든 사람들 앞에서 조건웅과의 애정을 과시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멍청할 수가 없었다.

그 사람들은 속으로 그녀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심유진은 당장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아냈다. 그리고 홀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은 먹칠을 한 듯이 캄캄했다.

손을 뻗어 불을 켰다. 모든 건 그녀가 나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집안을 맴도는 공기만은 이전과는 다르게 차갑게 얼어붙어있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집안의 모든 값나가는 물건들을 커다란 트렁크 두 개에 가득 채워 담았다. 그리고 자신이 일하는 로열 호텔로 향했다.

그녀는 로열 호텔의 객실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업무상 야간 교대 근무가 잦았기에 호텔에 자신만의 전용 휴게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비록 그 방에는 침대 외에 아무것도 놓여있지 않았지만 그녀가 새로운 거처를 찾기 전까지 머물 곳으로는 충분했다.

**

심유진이 주로 책임진 곳이 객실이긴 했지만 로열에서 일한 지 5년이 되다 보니 로비나 프런트 쪽과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심 매니저님? 오늘 휴가 아니었어요?”

프런트에 있던 소미가 커다란 트렁크 두 개를 끌고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놀라 물었다.

“갑자기 일이 좀 생겨서 돌아왔어요.”

심유진은 적당히 몇 마디 둘러댔다.

소미가 그녀의 등 뒤에 놓여있는 트렁크를 바라보았다.

“그럼 저건?”

“아 저희 호텔에 곧 엄청 귀한 손님이 오실 거거든요. 그분한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당분간 호텔에서 지내려고요.”

심유진은 이틀 전 아침 회의에서 총지배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고 기지를 발휘하여 그럴듯한 이유를 댔다.

소미는 그녀의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저도 저희 매니저님한테서 들었어요. 듣기로 어떤 그룹의 고위층 인사라고 하던데요. 매니저님이 저희들한테 요 며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당부했거든요.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게 되면 당장 보따리 싸서 나가야 한다고 어찌나 으름장을 놓던지.”

그녀가 입을 삐쭉거렸다.

심유진은 ‘네’하고 짧게 답했다. 그녀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 생각이 없었기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먼저 올라가 볼게요.”

그녀가 채 몇 걸음 옮기지 못했을 때, 등 뒤에서 일치하지는 않지만 묵직한 일련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고요하기만 한 늦은 밤 유달리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심유진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남자가 나란히 서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늘씬한 몸에 검은색 양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있었다.

심유진의 시선이 둘 중 키가 조금 더 큰 남자한테 쏠렸다.

그의 얼굴은 최근 가장 잘 나간다는 남자 연예인과 겨뤄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짙은 눈썹에 그윽한 눈매, 얇은 선분홍색 입술은 그의 새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성스러운 건 아니었다.

그는 왼손을 자연스럽게 옆으로 늘어뜨리고 오른손을 바지 주머니에 느슨하게 꽂아 넣고 있었다. 우아한 외모에 왠지 모를 건달 기질이 느껴졌다.

심유진의 눈길을 느꼈던 걸까? 그의 깊은 눈동자가 서서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무해한 그의 외모와는 달리 눈빛이 매우 날카로웠다. 그 눈길에 심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실례지만…… 손님분들은 체크인하실 건가요?”

소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기적절하게 들려왔다.

남자가 그제야 시선을 거두었다. 심유진은 다급하게 몸을 돌렸다.

키가 조금 작은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네.”

“예약하셨나요?”

소미가 또다시 물었다.

“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내밀었다.

“로열 스위트룸 하나, 일반 스위트룸 하나.”

로열 스위트룸이라는 말에 심유진은 다시 걸음을 멈췄다.

로열 호텔에는 로열 스위트룸이 딱 하나 있었다. 총지배인이 말하기를 그 방은 귀한 손님을 위해 남겼다고 했는데……

심유진은 자신의 짐을 프런트에 던져두고 몸을 돌려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 앞에 다가갔다.

그녀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막 입을 떼려고 하던 그때, 그녀는 순간 자신이 그의 성이 뭔지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의 미소가 1초 정도 굳어졌다가 곧바로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기 로열 호텔의 객실 매니저 심유진이라고 합니다. 손님께서 머무르시는 동안 모든 사무는 제가 전담하게 될 겁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몇 초간 머물렀다가 그녀가 내민 손에 이르렀다.

“안녕하세요.”

그의 목소리는 심유진이 예상했던 것처럼 듣기 좋았다. 마치 최상급 첼로를 켜는 것처럼 낮고 은은했다.

그녀가 한창 그 목소리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자신의 손 위로 서늘한 감촉이 느껴졌다.

남자가 호주머니에서 오른손을 꺼내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의 손은 그의 얼굴과 같은 색이었다. 손가락이 길쭉길쭉하게 뻗어있었고 군데군데 손가락뼈가 선명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심유진은 자신보다 흰 남자의 손을 확인하고 순간 자괴감을 느꼈다.

“허태준입니다.”

남자의 얇은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낯선 이름을 내뱉었다.

심유진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몇 초간 얼어붙어 있다가 그제야 그가 자기소개를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반갑습니다 허 대표님!”

그녀는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허태준의 잘생긴 눈동자가 반쯤 가늘어졌다. 그는 시시각각 그녀의 표정을 주시하고 있었다.

곧이어 살짝 올라갔던 그의 입꼬리가 서서히 내려가고 눈빛이 차가워졌다.

그가 손을 거두어 다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다른 남자가 체크인을 마치고 카드 키를 그에게 건넸다.

“이제 올라가도 돼.”

허태준은 낮은 목소리로 ‘그래’ 하고 답하더니 그대로 심유진을 지나쳤다. 그가 카드 키를 받아 들고 엘리베이터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다른 남자 역시 심유진의 곁을 지나치면서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한참이나 그녀를 바라봤었다.

그의 눈빛에 제발 저린 심유진은 얼른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더듬어보았다.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소미에게 물었다.

“혹시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소미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심유진은 아침 일찍부터 조건웅의 전화를 받았다.

“너 어디 갔어?”

그가 따지는 말투로 물었다.

심유진은 그의 물음에 답을 하지 않고 그저 한마디만 뱉었다.

“우리 이혼해.”

휴대폰 너머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조건웅이 다시 말을 꺼냈을 때에는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어투였다.

“유진아 내 말 좀 들어봐……”

“좋아.”

심유진이 피식 웃었다.

“해명해 봐. 들어줄게.”

조건웅은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몰랐는지 오히려 당황해하고 있었다.

“나랑 우정아는…… 그저 술 먹고 실수 한번 한 거야. 그 일로 애가 생기게 될 줄 몰랐어.”

그가 이어서 말했다.

“나는 정리하려고 했어. 그런데 그쪽에서 계속 매달리며 어떻게든 책임지라고 해서……”

심유진은 장님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머리에 물이 찬 건 더더욱 아니었다.

어제 그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우정아를 안던 모습은 전혀 우정아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았다.

“좋아.”

창문 밖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심유진의 눈빛이 싸늘했다.

“당신이 오늘 당장 우정아를 데리고 가서 아이를 지우고 그녀와의 관계를 확실하게 잘라내면 이혼 이야기 철회해 줄게.”

“그건……”

조건웅은 우물쭈물거렸다.

“우정아는 이미 임신 4개월이라서 지금 수술하면 몸에 엄청난 무리가 갈 거야…… 그리고…… 우리 어머니가 지난 설 이후로 한주에 한번 꼴로 전화하셔서 언제 애를 낳을 거냐고 재촉하고 계셔. 내가 당신 귀찮을까 봐 여태 말하지 않았었는데 사실 나도 스트레스가 심해서 터지기 직전이야…… 때마침 우정아가 임신을 했으니까 그녀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가 데려와서 키우면 되잖아. 그러면 우리 어머니한테도 할 말이 있고.”

심유진이 눈을 감았다. 그녀는 속에서 끓고 있는 분노와 실망을 애써 누르며 최선을 다해 차분하게 말했다.

“조건웅 난 분명히 말했었어. 난 평생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다고.”

“네가 왜 아이를 낳고 싶어 하지 않는지 알고 있어!”

자신이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고 있다고 생각한 조건웅이 어쩐지 우쭐거리기까지 하며 말을 이었다.

“그저 아이를 낳는 게 아프고, 낳고 난 후 몸매가 망가질까 봐 그러는 거잖아? 이제 넌 그런 경험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넌 그저 책임지고 아이를 키우기만 하면 돼. 얼마나 좋아?”

심유진은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났다. 그녀가 참을성 있게 물었다.

“방금 네가 한 그 말들, 우정아도 동의한 거야?”

“걔 동의 같은 건 필요 없어!”

조건웅은 이번에는 제법 강하게 밀어붙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심유진은 그를 믿지 않았다.

“난 아이를 키울 생각 없어.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워줄 생각은 더더욱 없고.”

그녀는 미련 없이 그의 말을 거절했다.

“당신은 그냥 우정아와 함께 살아. 두 사람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의 지금 그 마음 영원히 변치 말기를 바래.

“더 생각해 볼 여지는 없는 거야?”

조건웅이 물었다.

“없어.”

심유진이 답했다.

“알았어.”

조건웅은 더 이상 비굴해지지 않았다. 그의 말투가 처음 전화를 걸었던 것처럼 싸늘하게 변해있었다.

“이혼 이야기는 네가 꺼냈으니까 내 재산 한 푼도 나눠가질 생각하지 마!”

방금 전 그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들여서 연기를 한 게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미 식을 대로 식어버렸다고 생각한 심유진의 심장이 그 순간 더욱 차디찬 얼음 감옥에 처박혀버렸다.

“법대로 해. 정정당당하게.”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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