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요리를 먹기까지, 식사하는 동안에는 침묵이 지속되었다. 국까지 다 해서 모두 열 종류의 요리였다.그녀는 여태 황제가 소박한 사람인 줄 알았다. 두 사람이 아홉 종류의 요리에 한가지 국까지, 게다가 쌀밥은 제한 없이 먹을 수 있으니, 그가 이렇게 사치스러우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목여공공은 뜨거운 물수건으로 황제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남은 요리들을 치우자 원경능은 속으로 황제는 아마 어떤 질문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황후의 몸이 불편하다고 하니, 황후를 보러 갈 게 분명했다.원경능은 몸을 일으켜 인사를 올렸다.“부황께서 황후마마의 병문안을 가는 시간을 제가 감히 빼앗지 못하겠습니다.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앉거라!”원명제는 위엄 섞인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흘끔 훑고는 목여공공과 시중을 드는 사람들에게 물러나라는 손짓을 하였다.명원제와 원경능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거리는 마주 앉아있었다. 궁전안의 사람들이 나가자 압박감이 또 순식간에 엄습했다.하지만 오늘 이 식사를 한 후 그녀는 한결 편안해졌다.“다섯째와 잘 지내느냐?”원경능은 표정을 고쳤다. 드디어 명원제가 질문을 꺼낸 것이었다. 비록 자신이 예상했던 문제는 아니었지만 이에 대답하기 어렵지 않았다. 우문호는 계속 자신에게 욕설을 뱉고 잔혹하게 때리기만 했으니. 하지만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서로를 존중하면서 지냅니다.”명원제는 웃음을 짓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다섯째의 성격이 어떻다고 생각하느냐?”“왕야께서는 어질고 너그럽습니다.”원경능은 억지로 웃으며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했다. 이는 황제가 알려고 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황제는 그들 부부가 화목하게 지내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명원제는 마치 아주 우스운 말을 들은 것 마냥 웃음을 터뜨렸다. 원경능은 애써 미소를 유지했다.“결혼한지 일년이 되었는데 임신 소식이 없으니, 서로 존중하며 지낸다는 것도 그저 그렇구나.”명원제는 웃음을 거두고 담담히 말했다. 단순하고 직접적인 물음이었으나 원경
명원제는 고개를 들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황후는 초왕비를 어떻게 벌해야 한다고 생각하오?”황후는 황제가 불쾌한 말투가 아닌 것을 보고 말했다.“신첩은 태상황의 신체가 북당의 국운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초왕비는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고 의술이 뛰어나다고 여겨, 몰래 민간 요법으로 치료했습니다. 태상황의 안위를 고려하지 않았으니 대역죄인입니다. 다행히 엄중한 결과를 빚지 않았으나 신첩은 궁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측실(侧室)로 강등시키고 어명 없이는 입궁하지 못하게 하십시오.”명원제는 미소를 지었다.“황후의 말이 맞소. 잘못을 벌하지 않고 공로를 장려하지 않는 건 천자가 할 일이 아니지. 그렇다면 황후의 의견대로 하는 것이 좋겠소.”황후는 황제가 동의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는 엄중한 처벌이 아니었다. 측실로 강등시키는 것도 명목상의 벌이었다. 초왕비를 이미 옥첩(玉牒: 임금이나 왕족(王族)의 계보(系譜))올렸는지라 이후에 언제든지 다시 회복시킬 수 있었다.황후도 초왕비와 충돌을 일으키기 싫었다. 그래서 원경능이 입궁하지 못하게 하여 더 이상 태상황 가까이에 갈 수 없게 하면 되었다.저명취도 한시름을 놓았다. 보아하니 한번의 식사자리만으로 황제가 원경능을 달리 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명원제는 말머리를 돌렸다.“잘못은 벌하여야 하고 공로는 장려해야 하지. 원경능은 태상황을 치료한 공로가 있소. 이는 큰 공로이니 잘못을 벌충하고도 남지. 짐은 먼저 잘못을 벌하고 공로를 장려할 것이오. 하여 그녀를 여전히 초왕비로 지내게 하고 남주(南珠) 두 꿰미를 하사할 것이오. 어떻게 생각하오?”저명취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공로가 죄를 벌충하고도 남아 장려를 하다니? 황제는 애초에 원경능을 처단할 생각이 없었다.“남주 두 꿰미를 말하십니까?”왕후는 눈을 크게 뜨더니 얼굴을 굳혔다.“폐하, 류큐(琉球)에서 조공한 남주는 도합 세 꿰미밖에 되지 않습니다.”류큐의 남주는 알이 크고 둥글었는데 보기 드문 진품이었다. 예전에 류큐
우문호는 미간을 찌푸렸다.“여인이라고 고생한다는 법이 어디 있는가?”원경능은 숨을 크게 들이쉬고 누워있는 자세를 바꾸었다.“왜 고생이 아니라고 생각하세요?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여인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 외에 다른 살 길이 없어요. 일생 동안 낭군의 시중을 드는 사업만 해야 하는데, 심지어 이것도 경쟁자가 있죠. 당신들은 본처와 첩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마음이 변덕스러운지라 일편단심이란 무엇인지도 모르지요.”우문호는 입이 떡 벌어졌다. 이 무슨 기괴한 설법이란 말인가? 사업은 무엇이고 경쟁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왜 자신을 일편단심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단 말인가?“누가 본왕이 모른다고 하더냐?”우문호의 미간에 있는 상처가 꿈틀거렸다.“당신이 안다고요? 만일 당신 소원대로 저명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면, 저명취를 위해 평생동안 첩을 들이지 않았을 건가요?”원경능이 물었다. 우문호는 싸늘하게 말했다.“본왕이 첩을 들이는 것이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 그리고, 왜 그녀를 끌어들이는 거지?”“우리 토론해봐요. 당신은 저명취를 위해 평생 동안 첩을 들이지 않았을 건지, 이것만 대답하세요.”“그녀는 당신과 달라. 대범한 여인이지.”“네, 대범한 여인이라 직접 당신을 위해 첩을 들일 것이에요. 그런데 제가 물으려 하는 건, 당신은 평생 그녀 하나만 바라보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에요. 만일 아니라면 당신은 애초에 저명취를 사랑한 게 아니에요.”고대 남자 앞에서만큼은 사랑 전문가인 척할 수 있었다. 비록 원경능은 사랑에 관한 책을 읽지 않았지만 조수 애미(艾米)는 읽었었다. 애미는 대학원생이었는데, 통통했고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고 첫키스도 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애미는 매우 낙관적이었다. 언젠가는 운명적인 사랑을 만나 자신의 전부를 줄 것이라고. 원경능은 이 말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계속 잠을 잤다. 우문호는 할 말이 없었다.그는 원경능의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도대체 누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면 꼭 그 사람만 바라보며
원경능은 잠이 들었다. 깨어난 뒤 자신이 왜 우문호 곁에서 울다가 잠들 수 있었는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아마 그의 몸에서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독약 냄새는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었었다.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원경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문호의 까맣고도 의중을 알 수 없는 눈과 마주친 원경능은 천천히 손을 치우면서 조금 어색하게 말했다.“좋은 아침이네요!”“당신은 어제 자면서 침으로 본왕의 소매를 더럽혔어.”우문호가 담담하게 말했다.“죄송해요!”원경능은 자신의 잠버릇이 그렇게 고약할 줄 몰랐었다.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우문호는 눈을 감고 다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원경능은 침상에서 일어났다. 탕양과 서일은 편전에 없었지만 세수와 양치를 할 물은 벌써 준비되어 있었다. 원경능은 간단히 양치질을 하고 세수를 한 후 머리를 빗었다. 문을 열자 희씨 어멈과 궁녀 한 명이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원경능이 나온 것을 본 희씨 어멈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왕비, 깨나시면 병시중을 들러 오라는 태상황의 명입니다.”“먼저 왕야의 상처를 처치하고 가도 되느냐?”원경능이 물었다.“태의께서 처치하실 겁니다.”“하지만….”희씨 어멈이 웃으며 말했다.“태상황을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면, ‘그 자식은 태의가 있어 죽지 않을 것이니 원경능더러 재빨리 오라고 전하거라’ 라고 하셨습니다.”“….”원경능은 돌아가서 우문호에게 이렇게 전할 수밖에 없었다.“전 병시중을 들러 가야 해요. 태의가 상처를 처치하는 것을 번거로워하지 말아요. 꼭 소독하고 약을 발라야 해요.”우문호는 미간을 찌푸렸다.“본왕이 언제 번거로워했다고? 빨리 가거라. 잔소리도 참 많네.”‘됐어, 할아버지랑 손자가 똑같이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군.’의사들은 조금도 존중을 받지 못했다.건곤전에 이르니 제왕과 저명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왕은 그녀를 발견하고 물었다.“다섯째 형님은 어찌 되었나?”“괜찮아요.”원경능은 이렇게 대답하고 저명취를 바라보
이 모든 것은 계획된 것이었다. 소나자가 희생양이 되고, 그의 방에서 초왕부의 도장이 찍힌 은표를 찾아낸 것도 말이다. 또 누군가는 그녀가 몰래 태상황을 치료했다고 고발했었다. 만일 구전단의 문제를 조사해내지 못했다면, 그녀는 시종일관 태상황을 모해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렇다면 지금은 완전히 벗어난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황제는 그저 암암리에서 조사하고 있었고 초왕부는 아직 위험한 처지에 놓여있었다.‘태상황은 이 일을 어떻게 보는 것인가?’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태상황을 흘끔 보았다. 태상황은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복보를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이 고개를 숙였다. 태상황이 무엇인가 눈치챘다는 것을 알았으나, 자신이 말하지 않는다면 태상황은 복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오너라!”태상황이 싸늘하게 말했다. 원경능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갔다.“태상황, 분부하십시오.”“방금 무슨 생각을 하였느냐? 왜 낯빛이 바뀌었느냐?”태상황은 직설적으로 물었다. 원경능은 상공공과 희씨 어멈을 흘끔 보고는 고개를 저었다.“태상황께 아룁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낯빛이 바뀐 것은 아마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아 몸이 허해져 그럴 것입니다.”희씨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태상황께서도 아직 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준비하고 있으니 곧 식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어멈, 고맙네!”원경능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태상황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해독치료를 한 뒤로부터 신체가 매우 허약해진 그는 오랫동안 원경능에게 눈을 부라리지도 못했었다.아침 식사는 잘게 썬 고기를 넣은 죽이었는데 원경능은 두 그릇을 재빠르게 비웠다. 그러자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았다. 복보는 입을 벌리고 혀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침이 뚝뚝 떨어졌다. 원경능은 웃으며 희씨 어멈에게 말했다.“복보도 죽을 먹을 수 있으니 복보에게도 좀 주게. 소금은 넣지 말아야 하네. 강아지는 담백하게 먹어야 하니. 사실 태상황께서도
원경능은 그 중얼거림이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자신더러 나가라는 말은 똑바로 들었다. 그녀는 인사를 올리고는 남주를 들고 건곤전에서 나왔다. 희씨 어멈도 마침 복보에게 밥을 다 주고 밖으로 나왔다. 궁녀더러 그릇을 가져가라고 손짓하고 있었다.“왕비, 편전으로 돌아가십니까? 소인도 함께 가겠습니다.”희씨 어멈이 말했다. 원경능은 희씨 어멈의 조금 엄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가장 어려울 때 도와줬던 이 어멈을 감사하게 여기고 있었다. 가는 길에 희씨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왕비, 폐하께서 왜 단번에 두 꿰미 남주를 하사하셨습니까? 이 남주는 매우 진귀한 물건인데 한 해에 세네 꿰미밖에 조공하지 않았었습니다. 대부분 태후와 황후, 귀비께서 나눠 가졌고 현비마마께서도 원했지만 남는 것이 없었습니다.”“그래.”원경능은 정신을 딴 곳에 팔며 한 마디 답했다. 희씨 어멈은 그녀를 흘끔 보고는 말했다.“왕비께서는 소인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현비마마는 왕비의 정식적인 시어머니입니다. 왕비께서는 응당 온갖 방법을 다해 현비마마를 기쁘게 만드셔야 합니다. 이 두 꿰미 남주 중에 왜 한 꿰미를 현비마마께 선물하지 않으십니까?”원경능은 속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라 희씨 어멈이 이렇게 말하자 답했다.“어멈의 말이 맞아. 조금 후에 보내드리지.”희씨 어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소인은 마침 그곳에 갈 일이 있습니다. 아니면, 제가 왕비를 도와 가져다 드릴까요?”"그럼 어멈이 고생하게."원경능은 남주 한 꿰미를 희씨 어멈에게 건네 주었다. 그녀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이 며느리가 현비마마께 공경의 뜻으로 선물을 드리는 것이라 전하게.”“네!”희씨 어멈은 그것을 건네어 받고 원경능을 바라보았다.“그렇다면…왕비께서는 먼저 편전으로 돌아가십시오.”“그래!”원경능이 두 걸음을 뗐을 때 불현듯 희씨 어멈이 그녀를 불렀다.“왕비!”원경능은 고개를 돌렸다.“무슨 일이지?”그녀를 바라보는 희씨 어멈의 눈빛에는 망설임이 스쳐 지
원경능은 미소를 지었다.“왕야, 부황께서는 아마도 저와 더 이상 식사를 하지 않을 겁니다.”“그건 모르는 일이다. 우리 먼저 약속을 하자구나.”손왕이 말했다.“궁중의 요리는 왕야께서도 많이 드셨을 겁니다.”원경능이 담담하게 말했다.“너는 모르지만 아니란다. 부황의 요리사들은 부황만을 위해서 요리를 한다. 너는 다른 궁중음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느냐?”원경능은 고개를 저었다.“분별할 줄 모릅니다.”“아까운 일이구나! 아쉬운 일이야!”손왕은 매우 유감스러워하며 말했다.“너는 맛있는 음식을 저버린 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헛되게 한 것이야.”그는 수중에 남은 닭다리를 보며 길게 탄식했다.“닭다리와 부황의 요리는 하늘과 땅 차이지. 그렇다고 닭다리도 저버리면 안 되지만.”그는 말을 마치고 다시 닭다리를 뜯었다. 원경능은 그가 매우 맛깔나게 음식을 먹는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매우 만족스러워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왕야, 왜 풀숲에 숨어 드십니까?”손왕은 떠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허나 자신은 정말 갈 곳이 없었고, 궁중의 길을 모르는지라 실수를 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손왕이 빨리 떠나기를 바랐다.“본왕이 닭다리를 훔쳐먹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지.”그는 매우 전념하여 닭다리를 먹고 있었다. 그러나 음식을 씹고 있으면서도 말하는 어투는 매우 또렷하였고 조금도 어물어물하지 않았다.“훔쳐먹는다고요?”원경능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야가 훔쳐먹을 필요가 있는가?“본왕은 살을 빼고 있다!”말하는 사이에 이미 닭다리를 모두 먹었다. 그가 닭 뼈를 호수에 휙 던지니, 물보라와 함께 닭 뼈가 아래로 가라 앉았다. 그는 손을 닦으며 원경능을 바라보고는 손을 저었다.“가마.”다이어트를 하면서도 훔쳐먹는다고? 원경능은 명원제의 아들이 하나도 정상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했다. 손왕이 저녁 식사에 대한 일을 물어 주의력이 조금 전환됐다. 마음이 부쩍 상쾌해진 것 같았다.사실 자신이 화낼 이유가 무엇이람?
현비가 생각해도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가슴속에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도저히 삼킬 수 없었다.중신궁에 도착한 희씨 어멈은 원경능의 남주를 황후께 드리며 말했다.“초왕비가 말하기를 황후마마께서 한번도 류큐의 공물인 남주를 하사 받으신 적이 없으니, 며느리로서 둘 다 혼자 가질 수 없어 황후마마께 한 꿰미 드린다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후는 너무 기가 막혀 차갑게 말했다.“본궁은 감히 받을 수 없으니, 도로 갖고 가게.” 희씨 어멈은 웃으며 말했다.“마마, 어찌 왕비의 효심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어찌됐든 폐하께서 하사하신 것인데 왕비께서 거절하시면 귀비마마나 현비마마께 갈수 있습니다. 이 남주는 진귀한 물건입니다. 만약 왕비께서 갖고 계시지 않는데 귀비마마나 현비마마께서 갖고 계신다면 체면이 깎이지 않겠습니까? 먼저 받으시고, 나중에 어떻게 처리할지는 왕비께서 알아서 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중신궁의 총관 시녀(掌事姑姑)도 거들었다.“희씨 어멈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마마, 일단 받으시고 폐하께 가져다 드리는 겁니다. 초왕비가 위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든 아부한다고 생각하든 그건 다 폐하께 달렸다고 봅니다.”요컨대 어느 쪽이든 황제는 똑같이 화를 낼 것이다.황후는 화가 나서 미처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총관 시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냉담하게 말했다.“네 말에도 일리가 있구나. 일단 받고 나중에 폐하께 드리면 되겠어. 태후도 갖지 못한 것을 본궁이 받을 수 없어서 도로 갖고 왔다고.” 그녀는 황제가 남주를 아직 태후께 드리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는 꽤 합리적인 구실이었다.희씨 어멈이 웃으며 말했다.“소인은 이만 건곤전으로 돌아가 태상황의 시중을 들어야겠습니다.” “희씨 어멈을 바래다 주거라.”총관 시녀가 말했다. 희씨 어멈은 천천히 중신궁을 걸어 나왔다. 궁에서 나온 그녀의 걸음은 왠지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조용히 말했다.“당신에게 진 빚은 다 갚았으니 이번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