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겁도 없구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이 일은 유진한테도 교훈이 될 테니 차라리 잘 됐다.”“엄마. 아무리 그래도 저한테 자식이라고 유진 하나뿐인데, 유진이 감옥 가면 저는 어떻게 살라고요!”아들의 애원에도 강영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이미 다 큰 어른이니 본인이 한 일에 책임질 줄도 알아야지.”강영숙이 이토록 완강한 태도로 나올 거라고 생각지 못한 한민국은 이를 악물더니 최후의 패를 드러냈다.“만약 유진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저도 죽을 겁니다. 자식 먼저 보내겠으면 모른 척하세요.”그러고는 화가 나서 방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강영숙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그러다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하고 서준을 찾아갔다.“서준아, 이 일은 네가 나서서 하연이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 걔가 마음은 약하잖니. 좋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지 잘 얘기해 봐.”어느새 양복 차림으로 갈아입은 서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강영숙을 바라봤다.“할머니, 이 일은 HT 그룹 법무팀에 맡길게요.”서준은 도저히 하연을 찾아가 부탁할 염치가 없었다. 회사 기밀을 훔치는 게 작은 일도 아니고, 만약 핵심 데이터를 빼돌렸다면 회사가 그대로 망할 수도 있는 사안이다.때문에 절대 나설 수 없었다.그걸 옆에서 듣고 있던 고민정은 서준이 도와주겠다는 뜻으로 오해하고 이내 눈물을 닦으며 미소 지었다.“역시 너밖에 없어. 숙모는 네가 유진이 모른체하지 않을 줄 알았어. 유진이가 밤새도록 구치소에 갇혀 있었으니 얼른 빼내 줘.”그 말에 서준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꼬았다.“큰숙모, 아직 기뻐하긴 일러요. 회사 기밀을 빼돌리는 건 중죄라 적어도 3년은 옥살이해야 해요.”“3년? 안돼!”고민정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서준을 잡고 애원했다.“너희 숙부와 내가 자식이라고 유진이밖에 없는 거 알잖아. 유진이 옥살이를 하면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네가 최하연 좀 설득해 봐. 돈이 얼마나 들던 고소만 취하해 주겠
물론 HT 그룹에게 2000억이 큰돈은 아니지만 민혜경한테 그런 돈을 쓸 가치는 없다.“석 달, 난 석 달만 보석해 주면 돼. 석 달이면 가격 반으로 깎을 수 없는지 물어봐. 만약 된다면 바로 송금하고.”“네, 대표님.”...그 시각, 하연은 회사에서 국제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다 한참 뒤, 회의가 끝나자 태훈이 하연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HT 그룹 법무팀에서 찾아왔습니다. 한유진 씨가 회사 기밀을 빼돌리려 한 건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면서요.”“그 일은 회사 법무팀에 맡기고 나중에 결과만 보고해 줘.”“네, 대표님.”태훈은 깍듯하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그러다 문 앞에서 마침 호현욱과 마주치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이사님, 안녕하세요.”호현욱은 싱긋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었다.“정 실장, 그렇게까지 예의 차릴 거 없어. 자네는 최 사장 오른팔이잖아.”하지만 태훈은 여전히 거리를 두려는 듯 예의를 지켰다.“이사님이 여기엔 무슨 일이죠?”“최 사장님 만나러 왔지.”호현욱은 굳게 닫힌 사무실 문을 바라보더니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최 사장님, 바쁩니까?”상대를 확인한 하연은 서류를 닫고 싱긋 웃었다.“이사님이 여긴 어쩐 일이시죠?”호현욱은 동의도 거치지 않고 소파에 털썩 앉더니 한참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별일은 아니고, 최 사장님한테 경고 하나 하려고 왔어요.”“무슨 일이기에 이사님이 직접 오셨나요?”하연은 겉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그러자 호현욱은 오히려 숨길 거 없다는 듯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나운석 대표에 관한 일입니다.”호현욱은 일부러 말을 끊고 하연의 반응을 살폈지만 하연은 쉽사리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나 본부장님이 왜요?”이에 호현욱은 안타깝다는 듯 말을 이었다.“아직 모르나 보네요. 나운석 대표가 우리 회사 회계팀에 실명으로 고발되었더군요.”하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눈빛을 드러냈다.“대체 무슨 일이죠?”호현욱은 일부
호현욱은 생각지도 못한 하연의 반응에 잠시 놀랐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이런다고 생각했을 뿐.“억울한지 아닌지는 감사팀이 알아서 조사하겠죠. 현재 나 본부장 사무실에 있다던데, 가 보시지 않을래요?”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고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그 시각, 운석의 사무실 안에는 정장 차림을 한 감사팀 직원들이 증거가 될 수 있는 자료를 모두 쓸어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운석은 다리를 꼰 채 소파에 앉아 아무 일 없는 듯 굴었다.“다 확인했나요? 확인했으면 일에 방해되니 나가주실래요?”운석이 거침없이 말했다.하지만 감사팀 직원들은 그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수색하고 있었다.그 태도에 운석은 냉소를 짓더니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 시각, 이제 막 들어온 하연 역시 사무실 안 광경을 보더니 낯빛이 어두워졌다.“지금 뭣들 하는 겁니까?”맨 앞에서 지휘하던 직원이 행동을 멈추고 하연에게 인사했다.“최 사장님, 저희는 공무 집행 중입니다. 누군가 나운석 씨가 직무를 이용하여 횡령했다고 제보해서요.”하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비아냥거렸다.“반나절이나 뒤졌을 텐데 뭐라도 나왔나요?”그 말에 직원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더니 역시나 이번에도 지휘를 하던 직원이 운석을 흘긋거리며 대답했다.“지금 확인하는 중입니다. 아직은 찾지 못했지만 지금 당장 나운석 씨 명의로 된 계자를 확인할 겁니다.”그때 호현욱이 다가와 하연에게 말을 걸었다.“최 사장님, 이분들도 공무집행 중인데, 방해하지 마세요. 나 본부장이 횡령하지 않았다면 조사 결과가 증명해 주겠죠. 이분들도 공무원인데, 좋은 사람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지 않을 겁니다. 물론 나쁜 사람이라면 절대 놓치지 않겠죠.”심기를 거스르는 말에 운석은 벌떡 일어나 호현욱을 향해 소리쳤다.“지금 무슨 헛소리야? 젠장, 누가 횡령했다는 건데? 제대로 말해!”하지만 호현욱은 오히려 느긋하게 대답했다.“나 본부장, 급할 거 뭐 있나? 조사하면 자연스럽
호현욱은 북 치고 장구 치는 두 사람을 보면서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이윽고 한참 떨어져 있는 회계 오재원에게 눈빛을 보내자 재원은 이내 운석에게 다가왔다.“저희는 지금 나 본부장님 명의로 된 계좌를 확인해야 하니 협조 부탁드립니다.”운석은 콧방귀를 뀌며 호주머니 안에서 지갑을 꺼냈다.이윽고 지갑 안에 들어 있는 카드를 하나하나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다. 분명 시큰둥한 반응이었지만 꺼내 놓는 카드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그도 그럴 게, 운석이 소유하고 있는 카드 중에 몇 장은 전국 상위 5위 안에 드는 은행에서 발급하는 블랙카드였고, 심지어 R국 은행의 골드카드도 있었다.그걸 일일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재원은 넋을 잃었다.“이, 이 카드 모두 본부장님 카드입니까?”운석은 코웃음을 쳤다.“조사하겠다며? 조사해 봐. 그런데 여기 있는 카드 중 아무거나 확인해도 잔액이 몇억은 훨씬 넘을 거야.”재원은 식은땀을 닦으며 애써 덤덤한 태도를 유지했다.“이 카드 모두 진짜 맞나요? 설마 가짜는 아니죠? 모두 본인 명의의 카드여야 합니다.”운석은 팔짱을 끼며 대답했다.“그럼 내 명의인지 아닌지부터 확인해 봐.”재원은 블랙카드 한 장을 집어 떨리는 손으로 카드 단말기에 꽂아 넣었다.“비번이 뭐죠?”“없어.”재원은 그 말이 믿기지 않지만 카드를 꽂아 넣고 보니 운석의 말이 맞았다. 이윽고 잔액을 확인한순간 너무 놀라 단말기를 손에서 놓치고 말았다.그걸 본 호현욱은 어두운 얼굴로 호통쳤다.“쓸모없는 것! 잔액 하나 확인 못 해? 말해 봐, 카드에 이상 있어?”재원은 그대로 얼어붙었다.방금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운석의 은행 카드 잔액은 몇백억이었다.그것도 카드 한 장에만.여기에 놓여 있는 카드를 눈대중으로 봐도 열 장은 넘는데, 모든 카드 안에 몇백억씩 있다면 총 몇천억이 있다는 거다.이건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일이다.“이사님, 직접 보시는 게 어떠세요?”호현욱은 아무렇지 않게 카드 단말기를 빼앗아 잔액을 확인했다
“아니면, 처음부터 나 엿 먹으라고 파놓은 함정인가? 목적이 뭐지? 나를 DS 그룹에서 쫓아내는 건가?”“...”허를 찌르는 운석의 말에 호현욱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한참 동안 제대로 된 말 한마디를 내놓지 못했다.운석은 그런 호현욱을 무시한 채 하연을 보며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 어떻게 할까요?”하연은 싸늘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나 본부장님은 F국 NW 그룹의 도련님입니다. 전에 제 가족에서 정해 준 약혼자이기도 했고요. 나 본부장님이 DS 그룹에 들어온 건 어디까지나 호의로 저를 돕기 위헤서고요. 여태껏 실력도 입장했잖아요. D시 프로젝트도 나 본부장님이 따낸 거고. 그러니 오늘 일 제대로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하연은 현장에 있는 직원들을 빙 둘러보다가 재원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 눈에는 비아냥과 조롱이 섞여 있었다.“오재원 씨, 실명으로 횡령을 고발했다던데, 증거는 어디 있죠? 내놓으세요. 만약 증거를 내놓지 못하면 무고죄로 감옥에 가야 할 겁니다.”재원은 겁에 질려 그대로 굳어버렸다.‘난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호 이사님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일이 왜 이렇게 됐지? 모든 준비는 끝냈다며? 증거를 준비했다고 나더러 고발만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지?’재원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 앉더니 이내 호현욱에게 무릎 꿇었다.“이사님, 살려주세요. 저 감옥 가기 싫어요. 감옥 가기 싫다고요.”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호현욱은 잿빛이 된 얼굴로 이내 발을 뺐다.“네가 이런 짓을 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라고 이래?”“이사님, 우리 친척이잖아요. 이대로 제가 죽는 거 지켜볼 겁니까?”그 말에 호현욱은 대경실색하며 설명했다.“최 사장님, 저놈 헛소리는 듣지 마세요. 우리가 친척이긴 하나 아주 먼 친척입니다. 평소에 왕래도 없었는데 지금 저건 나를 모함하려고 저러는 겁니다.”“이사님이 시켰잖아요. 제가 실명을 걸고 신고만 한다면 나머지는 알아서 해준다면서요. 그런데 지금 저를 희생
하연과 운석은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그걸 본 현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밖으로 뛰쳐나가 얼마 뒤 민호를 데려와 하연 앞에 밀어 넘어뜨렸다.“이 개자식! 말해! 네가 했지? 감히 나 본부장이 횡령했다고 모함해? 아주 간덩이가 부었구나?”민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잠깐 당황해하더니 이내 하연의 앞으로 기어가 애원했다.“최 사장님, 용서해주세요. 제가 한순간 귀신에 씌었나 봅니다. 절대 의도적으로 그런 게 아닙니다.”하지만 하연이 아무 감정 없이 저를 내려보자 민호는 곧바로 운석에게 다가갔다.“나 본부장님, 제발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그때 운석이 천천히 몸을 웅크려 앉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용서? 해줄 수 있어. 하지만 누가 지시했는지 말해.”민호는 겁에 질린 눈으로 호현욱을 흘긋거리더니 이내 다시 내리깔며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지시한 사람 없습니다. 제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입니다. 나 본부장님이 큰 프로젝트를 성사해 질투해서 회사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이 말을 운석은 당연히 믿지 않는다.일개 비서인 민호에게 운석의 행보가 걸림돌이 될 리는 없으니까.“나 본부장, 최 사장님, 이 일은 정 비서가 독단적으로 했다고 하니 무슨 벌이든 내리세요.”민호가 모든 죄를 뒤집어쓴 걸 보면 더 이상 물어봐도 캐낼 게 없다는 걸 하연은 알고 있었다.“그렇다면 짐 싸서 나가세요.”그 말에 민호는 무거운 짐이라도 내려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하지만 그걸 지켜보던 호현욱이 다급히 말했다.“최 사장님, 이 일이 작은 일도 아니고 이대로 놓아준다는 겁니까?”하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호현욱을 바라봤다.“그럼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습니까?”호현욱은 그 말에 잠시 멈칫하더니 미소로 자기감정을 애써 숨겼다.“저한테 무슨 좋은 생각이 있겠습니까? 최 사장님이 이렇게 결정하셨다면 따라야죠. 하지만 정 비서는 제 비서였으니 아랫것 제대로 간수 못한 책임으로 이번 달 인센
운석은 처음으로 나씨 집안 사람으로 태어난 게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D시 프로젝트는 우리 회사가 독점하기에는 리스크가 좀 커요. 그래서 말인데, 실력 있는 회사와 협력하여 리스크를 줄이는 게 어때요?”일 얘기를 시작하자 운석의 얼굴에 있던 장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심지어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B시의 선도기업 중에 HT 그룹을 제외하면 FL 그룹 실력이 가장 막강해요. 게다가 FL 그룹 부 대표와 연합하면 분명 몇 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하연은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그 말은 FL 그룹과 손잡으라는 뜻이에요?”“네, FL 그룹이 최적의 선택이에요. 물론...”운석은 잠깐 말을 끊고 하연을 바라봤다.“또 한 가지 선택이 더 있긴 하죠. 바로 HT 그룹.”“한서준 말이에요?”하연은 반사적으로 되묻더니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HT 그룹은 됐어요. FL 그룹으로 하죠.”어찌 됐든 일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한서준과 다시 엮일 생각은 없었으니까.“네, FL 그룹은 실력이 막강해 두 그룹이 손을 잡으면 분명 좋은 시너지를 낼 거예요. 그럼 제가 나중에 FL 그룹 대표를 한번 만나볼게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아주 신비로운 인물이라 공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비춘 적이 없다더라고요.”“따로 만나서 얘기할 필요 없어요. FL 그룹 대표는 운석 씨도 알 거예요.”운석은 의아한 듯 하연을 바라봤다.“안다고요?”“그 사람이 바로 BN 그룹 도련님 부상혁이랑 같은 사람이거든요.”“그 사람이라고요?”운석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BN 그룹 부상혁이라면 비즈니스 업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다.어린 천재, 하버드 수재, 비즈니스 업계의 귀재... 등 호칭이 모두 상혁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부상혁은 그저 전설처럼 전해지기만 했을 뿐, 같은 F국에 있으면서도 두 사람은 사적으로 만난 적이 없다.‘그런데 그 사람이 B시에는 언제 왔지? 게다가 FL 그룹 대표라니?’한참 생각하던 운석은 하연을 바라봤다.“혹시
“정 실장, 오늘 무슨 일정 어떻게 돼?”태훈은 하연과 반 발짝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일정을 보고했다.“오전 10시에 국제 화상 회의가 잡혀 있고, 오후 2시에 기항 그룹 성 대표님과 미팅이 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밤 7시에 MJ 그룹 회장님과 회장 사모님과 모임이 있습니다.”“그래, 알았어.”태훈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하연의 핸드폰이 울렸다.“하연아, 바빠?”전화 건너편에서 예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난번에 6억으로 드레스 의뢰했던 고객님이 오늘 가게에 들르겠다고 하셔. 너를 콕 집어 만나고 싶다는데, 시간 돼?”하연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물었다.“언제인데?”“물어봤는데 12시 전에는 언제든 괜찮대.”“그래, 알았어.”나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고개 앞에 커피를 대령했다.“김 여사님,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우리 디자이너가 조금 늦게 도착한다네요.”김 여사라 불리는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데 그때, 가게 문 앞에 익숙한 실루엣이 나타났다. 오늘 막 출소한 민혜경은 서준에게서 받은 카드로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즐기고 있었다.심지어 이미 옷이며 가방이며 신발을 가득 사 들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었다.그동안 살얼음판 같은 감옥에서 지내면서 혜경이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다행히 지금은 다시 나왔다.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디자이너 브랜드숍을 본 혜경의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이윽고 콧방귀를 뀌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이거, 이거 다 포장해 줘요.”문을 들어서자마자 혜경은 마네킹에 전시되어 있던 신상 옷을 가리키며 거침없이 말했다.웃으며 다가왔던 예나는 입을 열려는 순간 그대로 굳어 웃음기가 싹 가셨다.“민혜경, 내연녀 주제에 벌써 나왔어?”예나가 퉁명스러운 태도로 내연녀라는 말을 내뱉자 혜경은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끝내 눌러 참으며 비아냥거렸다.“멍하니 서서 뭐 하고 있지? 당장 가서 옷 가져오지 않고?”그 말에 예나는 팔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