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은 아니라고 말하려 했지만 목젖만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고 말은 내뱉지 못했다.신은지가 휴대폰을 꺼놓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그 사진들 때문에 화나서인지, 아니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지금은 다사다난한 시기라 조금도 요행 심리를 가질 수 없다.그리고 공예자 말로는 그 사람이 오늘 귀국한다는데 아직 찾지 못했다. 그쪽에서 그의 부하들 눈에 띄지 않도록 미리 대처했을 가능성은 없을까?그 사람이 귀국하자마자 은지가 사라졌다...이 두 가지 일이 겹치니 아무리 생각해도 우연의 일치는 아닌 것 같다.박태준은 말하는 속도가 극히 빨랐다.“몰라요. 은지 휴대폰이 꺼져 있어 연락이 안 돼요. 은지가 평소에 어디 자주 가는지, 혹은 다른 연락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 봐요.”진유라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은지가 연락이 끊겼는데, 이 자식은 자기 때문에 화난 건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여자는 뭘 하려고 남자를 만나는 거야? 짜증만 나는데.“마누라를 잃어버린 사람은 박 대표님이 아마 사상 최초일 거예요.”비아냥댄 후 그녀는 더 욕하고 싶었지만 지금 은지를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박태준과 시비를 따질 시간에 전화를 몇 통 더 하는 것이 낫다. 그래서 그녀는 입을 막아 스스로 음 소거를 한 후 목구멍에서 ‘네’라는 한 글자를 짜내고 전화를 끊었다.진유라는 1초라도 늦으면 치밀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박태준은 진영웅에게 전화해 왕준서와 함께 박물관 주변 CCTV를 뒤져서 신은지의 행방을 찾아내라고 지시했다.그는 나유성에게도 전화했다. 친구 중에 신은지가 연락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니까.신은지가 단지 사진 때문에 그에게 삐진 거라면 찾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누군가가 그녀를 데려간 경우다.이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박태준은 계속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고 머릿속에서 전기 드릴이 돌고 있는 것 같았다.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한 통증이 몰려왔고 머리와 몸이 다 아팠다. 전
결국 신은지가 너무 미안한 마음에 휴대폰을 끄고, 오늘 저녁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식사에만 집중하겠다고 말해서야 경을 읽는 듯한 하소연이 끝났다.그녀는 박태준에게 전화해 알리려 했지만 강태민이 이미 알렸다고 했다. 그녀가 오늘 밤 신당동에 돌아가지 않고 여기 묵기로 했다고.“남자는 좀 애간장을 태워야 해. 가끔 며칠씩 본체만체 내버려두기도 하고. 그러지 않으면 너를 쉽게 봐. 네가 철저히 자기 것이 됐다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지.”강태민은 딸이 나쁜 남자에게 속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늙은 아버지처럼 미친 듯이 그녀를 세뇌시켰다.“사랑하지만 가질 수 없는 사람, 헤어졌지만 잊을 수 없는 사람 등등 많잖아. 남자는 다 나쁜 놈이야. 너무 오냐오냐하면 안 돼.”점점 삐딱하게 나가는 것을 보고 신은지가 빙그레 웃더니 한마디 귀띔했다.“아버지도 남자예요.”“어...”말문이 막힌 강태민은 그녀와 눈을 마주친 후 이렇게 못나서 어쩌냐는 듯 말했다.“박태준을 말하는 거잖아. 계속 그렇게 감싸라.”이 말이 끝나자마자 육지한이 들어왔다.“둘째 어르신, 박 대표님이 오셨습니다.”강태민은 입을 삐죽거렸다.‘빨리도 왔네. 진작 알았으면 흔적을 지울걸. 좀 더 오래 걱정하게 말이야. 어디 다른 여자랑 또 스캔들을 내나 보자.’그는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신은지를 힐끗 보고는 내키지 않은 듯 말했다.“들어오라고 해.”신은지는 잔뜩 인상 쓰고 있는 그를 보고 말했다.“아버지, 그건 진짜 오해예요. 뚱한 표정을 짓지 마세요. 그 사람이 자기를 맘에 안 들어 하시는 줄 알아요.”“맘에 안 드는 게 맞는데 뭐. 네가 기어이 그 녀석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나는 아무리 500도 근시라도 눈에 차지 않았을 거야.”“...”박태준은 이내 들어왔고, 들어오자마자 신은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는 길 내내 곤두섰던 신경이 누그러졌다. 강태민이 신은지를 데려갔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사할 것이라고 확신했지만 직
옆에서 이를 똑똑히 본 강태민은 코웃음을 쳤다.‘그 주제에, 나를 따돌리고 일을 벌이겠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박태준은 침대 시트도 갈지 않고 바로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하고 정돈한 후 30분 동안 회사 일을 처리했다. 이쯤 되면 강태민이 잠들었을 것 같아 그는 일어나서 살금살금 방문을 열었다.아무도 없는 복도에는 비상등만 따뜻한 불빛을 내뿜고 있었다.그의 방에서 신은지의 방에 가려면 중간에 강태민의 방을 지나야 한다.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어 걸으면 사락사락 소리 나긴 하지만 이렇게 미약한 소리는 무시해도 된다.그래도 강태민의 방문 앞을 지날 때 그는 무의식적으로 발걸음 소리를 죽였다.벌컥! 꼭 닫혀 있던 방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강태민이 문 뒤에 서서 차가운 얼굴로 그를 내다보았다.“박 대표, 한밤중에 살금살금 어디 가세요?”“...”“들어와요. 마침 물어볼 일이 있어요.”이튿날, 하룻밤 푹 자고 난 신은지가 상쾌한 얼굴로 방을 나서다가 마침 피곤한 얼굴로 강태민 방에서 나오는 박태준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를 쳐다봤다가 다시 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이렇게 일찍... 왜 아버지 방에서 나와? 게다가...”게다가 딱 봐도 밤을 새운 모습이다.박태준은 눈을 겨우 뜨며 힘없이 대답했다.“아버님이 나를 붙잡아 밤새 장기를 두게 했다면 믿겠어?”“...”차라리 두 사람이 밤새 싸웠다고 하면 믿었을 것이다. 강태민이 박태준을 그렇게 싫어하는데 먼저 찾았을 리 없잖아.박태준이 간단명료하게 설명했다.“내가 밤에 널 찾아갈까 봐 방도를 대신 거야.”“하룻밤 장기를 둔 게 이 정도로 피곤해?”이전에도 박태준은 회사 일이 바쁠 때면 밤을 꼬박 새울 때가 많았지만 이튿날 똑같이 활기차고 평소랑 별 차이가 없었다. 혹시 나이 들어서 정력이 달리는 건가?박태준은 그녀가 무슨 생각 하는지 알아채고, 손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은 후 벽에 붙이고 서서 깊고 긴 키스를 나누었다. 남자는 아침에 몸이 민감하기 때문에 키스만 했는데도 반응이 왔다. 그는
내용을 보니 전부 영양가 없는 글들이었다. [여자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증거], [여자가 한 번도 화내지 않았다면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여자가 당신이 주는 집, 차, 보석과 돈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을 갖고 싶지 않은 것], 심지어 [여자가 가장 좋아하는 8가지 자세]라는 제목도 있었다.이 파격적인 제목들을 보면서 신은지는 정신이 아찔해졌다.고개를 들어 박태준을 보니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꾸역꾸역 밥만 먹고 있었다. 그녀가 공예지에게 질투를 느끼지 않은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나 있나 보다.신은지는 차가운 얼굴을 하고 그 채널들을 하나하나 구독 취소했다. 일부 삽화와 글 제목은 너무 자극적이어서 휴대폰을 가까이 가져다 몰래 지울 수밖에 없었다. 옆에 있는 강태민이 보면 그녀가 무슨 에로물을 보는 줄 알겠다.전부 구독 취소한 후 신은지는 휴대폰을 박태준에게 던져주었다.그가 받아서 열어 보니 그녀가 카톡에 들어갔던 흔적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뭘 했는지는 볼 수 없어 그냥 넘어갔다.강태민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무심하게 한마디 툭 던졌다.“내가 지난번에 보낸 사진은 봤어? 맘에 드는 사람 없었어?”모자이크 처리된 그 사진을 떠올린 신은지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누드 사진을 보내는 건 처음 봤다.“아버지, 이후에는 그런 사진을 보내지 마세요.”박태준은 식사하느라 여념이 없어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는 것 같았지만 벌써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그러니까 지난번에 신은지의 휴대폰에서 본 사진들이 강태민이 보낸 거였어?’“그런 사진이라니? 그건 내가 특별히 부탁해서 받은 거야. 모두 남포시의 청년 인재들이라고. 인터넷에서 대충 찾은 사진인 줄 알아? 내가 그렇게 품위가 없어?”“...”이건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그게 진짜였다니.박태준이 훼방을 놓았다.“아버님이 속은 거예요. 어느 청년 인재가 누드 사진을 찍어요? 제비족이 돈 많은 여자를 낚기 위해 캐릭터를 지어낸 거죠.”강태민은 화가 치밀어 하마터면 그릇에
임 관장한테 지수호를 조수로 받겠다고 했고 지수호도 배우고 싶어 하는데 그냥 한쪽에 팽개쳐둘 수 없다. 게다가 그는 그녀의 팬이라고 했다. 팬이라면 당연히 더 잘해줘야 한다.지수호가 웃으며 대답했다.“네.”“그럼 오늘 도구 알아보기부터 시작해요.”그는 관련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배워야 한다. 그녀는 모든 도구의 이름과 용도를 가르쳐주었고, 그는 노트를 들고 열심히 기록하면서 가끔 질문도 했다.그가 이렇게 나오니 신은지도 더 열심히 가르쳤다. 누구나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을 좋아한다....공예지는 병원에서 나오다가 누군가와 부딪쳐 휘청거렸다. 그 사람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하고 연거푸 사과했다.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하던 그녀는 갑자기 말을 멈추었다. 그 사람이 그녀의 손에 쪽지를 쥐여줬기 때문이다.그녀가 살며시 쪽지를 열어보니 ‘백야, 202’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온몸이 굳어진 채 고개를 쳐든 공예지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백야라는 카페를 보면서 등에 식은땀이 돋았다.설마 그 사람인가?누군가가 카페 2층을 통째로 빌렸기 때문에 그녀는 올라간 후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심지어 서빙 직원도 없었다.그녀는 202룸 앞에 가서 노크했다. 손가락이 문에 닿으면서 똑똑 소리가 났고, 심하게 뛰는 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와 어우러졌다.주변 공기가 반쯤 빠져나간 듯 너무 조용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 외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이전에 친구와 함께 커피 마시러 왔을 때는 복도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던 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음악 소리도 사라졌다.얼마나 지났을까? 공예지가 너무 오래 서 있어서 발이 저릴 때쯤 안에서 일부러 바꾼 남자의 목소리가 전해졌다.“들어와.”이 목소리가 그녀의 추측을 입증했다. 정말 그 사람이다.공예지는 심호흡을 하고 용기를 내어 문을 밀고 들어갔다.룸은 크지 않았는데, 1m 길이의 칸막이 의자와 테이블을 놓으니 심지어 비좁은 느낌까지 들었다. 창가 쪽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그녀는 감히 고
박태준은 곧 할 것이라고 말했다.신은지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어쩐지 박태준이 이 말을 할 때 잠시 망설이는 것 같았다.역시 엄마인 강혜정이 자기 아들을 더 잘 안다. 그녀는 그 한순간의 이상한 낌새를 한눈에 눈치채고 안색이 어두워졌지만 신은지를 바라볼 때는 자애롭고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은지야, 나 좀 배고파. 저기 가서 케이크를 좀 사 올래?”신은지가 가자마자 그녀는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결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미리 말해두는데, 너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라면 다리몽둥이가 부러질 줄 알아. 우리 집 며느리는 은지야. 다른 누구도 안 돼.”얼마 전의 스캔들을 그녀도 들은 바가 있다. 게다가 그 여자가 전예은과 좀 닮았다니 더 재수 없었다. 은지가 따지지 않았고, 또 자기가 끼어들면 오히려 두 사람 사이가 나빠질까 봐 걱정해서 가만있었지, 아니면 박태준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어머니.”박태준은 어이없었다.“무슨 생각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며느리는 당연히 은지밖에 없죠.”그의 확답을 받고서야 강혜정은 못마땅한 기색을 거두었다. 그러나 박태준이 이전에 한 짓이 있기 때문에 한마디 잔소리했다.“너 그때 은지랑 결혼하고 싶어 내 앞에 무릎 꿇고 울 뻔했잖아. 어렵게 관계를 회복했는데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은지가 너를 용서할 의향이 있더라도 내가 동의하지 않을 거야.”이 과장된 표현을 듣고 박태준은 머리가 아팠다.“... 울 생각이 없었어요.”신은지가 케이크를 들고 오자 강혜정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두 부자는 차를 가지러 가. 가는 김에 이 물건들을 차에 싣고.”그들이 간 후 강혜정과 신은지는 빵집에 한참 더 앉아 있다가 올 시간이 된 것 같아 케이크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은지야, 이따 뭐 먹고 싶어?”“어머니, 아버님이랑 두 분이 가서 드세요. 오늘은 두 분 결혼기념일인데 저희가 따라 가면 뭐가 돼요?”그녀는 훼방꾼이 되기 싫었다. 어쩐지 박용선이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눈치 없다고 말하는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