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지를 기다리는 동안, 박태준은 닫혀있는 구청 대문을 바라보며 몇 년 전 그녀와 혼인신고를 하러 왔던 장면이 떠올랐다.그때 두 사람은 지금과 달리 따로 구청에 왔었고 서로 무표정한 표정으로 한마디의 대화도 나누지 않고 각자 인적 사항 표를 작성하고 혼인신고서를 받았었다.그러나 오늘은 여느 커플들처럼 옷도 깔끔하게 맞춰 입고 다정하게 깍지를 낀 채 순서를 기다릴 수 있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이 벅찼다.그는 오늘따라 유난히 화사하게 차려입은 신은지가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고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아니, 돈 주고 샀어.”“돈을 주고 자리를 샀다고?”신은지는 첫 번째로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구청에 나와 줄을 선 커플이 돈 몇 푼에 자리를 내어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돈을 주니까 자리를 내어주던데?”박태준은 떨리는 마음을 신은지에게 들키기라도 할까 봐 말을 될수록 아꼈다.‘처음 겪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신은지는 첫 순서를 내어준 커플을 찾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바로 뒤에서 나라를 잃은 표정으로 풀이 죽어서 서 있는 커플과 눈이 마주쳤다.여자는 남자의 허리를 꼬집으며 험상궂은 표정과 달리 애교 섞인 말투로 투덜댔다.“내가 일찍 와서 줄 서자고 했지, 오빠가 머리만 안 말리고 왔으면 2천만 원을 우리가 가질 수도 있었잖아. 그 돈이면 신혼여행을 몰디브로 가고도 남았을 텐데.”남자는 아픈 듯 비명을 질렀고 여자의 공격을 피하고자 몸을 비틀면서 답했다.“정말 미안해, 오늘 이런 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진작 알았다면 내가 한 달 전부터 먼저 와서 줄을 섰을 거야!”신은지는 아웅다웅하던 커플과 눈이 마주쳤고 두 사람은 멋쩍은 듯 얼른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신은지는 그제야 혼인신고를 위해 이른 아침부터 나와 줄을 섰던 커플이 흔쾌히 자지를 내어준 이유를 알게 되었고 고개를 돌려 장난기 하나 없는 표정으로 있는 힘껏 박태준의 허리를 꼬집었다.“너 미쳤어?
신은지는 강혜정에게 정중하게 말했다.“괜찮아요, 어머니.”그녀는 크고 작은 물건들을 들고 불쌍한 표정으로 두 여자의 뒤를 따라오는 박태준의 모습을 보고 웃음을 참으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어머니, 집에 아직 제가 쓸 화장품이 많이 남아있어요, 그건 어머니께서 집에 두고 천천히 쓰세요.”하지만 강혜정은 단호하게 신은지의 말을 부정했다.“은지야, 여자한테 화장품은 옷과도 같은 존재라 아무리 많이 쟁여놔도 늘 부족한 법이지.”이때 뒤에서 따라오던 박태준이 눈치 없이 두 여자의 대화에 끼어들었다.“어머니께서 사들인 화장품이 지금 한쪽 벽을 다 차지하고도 남아, 아마 평생을 써도 남을 거야! 지금 유통기한이 지날까 봐 너한테 주는 거잖아!”강혜정은 몸을 돌려 박태준의 머리를 한 대 때리고는 말했다.“여자들의 대화에 네가 왜 끼어들어, 누구를 닮아서 하루 종일 말도 안 되는 말만 하는 거야? 너 때문에 내가 화가 나서 미치겠어!”박태준은 그녀의 매정한 말에 신은지가 친딸이고 자기는 오히려 주워 온 자식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까지 들었다.이어 점심을 하기 위해 주방으로 들어간 박태준은 연기가 거실로 새어 나갈까 봐 문까지 닫았다.강혜정은 신은지의 손을 잡아끌고 소파에 앉으면서 물었다.“은지야, 태준이랑은 언제 재혼할 거야?”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신은지가 부담감을 느끼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에 설명을 덧붙였다.“너한테 강요할 생각으로 꺼낸 말은 아니니까 부담 갖지 마. 난 그냥 너희 둘이 화해한 지도 꽤 된 것 같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은지가 재혼하고 싶으면 하는 거고 하기 싫으면... 천천히 생각해도 괜찮아.”강혜정은 평정심을 유지하면서 말을 이어 나가다가 박태준이 이번에도 바보처럼 신은지를 놓칠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신은지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저희 두 사람 오늘 아침 구청에 가서 혼인신고 했어요. 어머님, 아버님께 이 기쁜 소식을 제일 처음 알려드리려고 급하게 온 거예요.”강혜정은 그녀의 말이 믿기지
점심을 먹은 후 신은지와 오붓하게 쇼핑을 즐기려던 강혜정의 계획은 박태준의 한마디로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어머니, 오늘같이 소중한 날에 나한테서 은지를 뺏어가면 어떡해요! 오늘은 둘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놔주면 안 될까요?”강혜정은 섭섭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박태준에게 말했다.“그래, 네가 이겼어! 너한테서 은지를 뺏지 않을 테니까 재미있는 시간 보내!”강혜정은 신은지의 팔짱을 끼고 있던 손을 풀면서 말을 이어 나갔다.“혼인신고도 했는데 이제 결혼식 날짜도 빨리 정해야지. 무당한테 날을 받는다고 한때가 언제인데 왜 아직도 소식이 없어? 대체 얼마나 좋은 날짜를 받아오려고 이렇게 뜸 들이는 거야!”그녀는 박태준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내뱉고는 박용선의 팔짱을 끼고 득의양양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이어 차에 탄 그녀는 인스타 스토리에 우리 예쁜 며느리라는 문구와 함께 신은지의 사진과 혼인신고서 사진을 올렸다.몇 분 후, 강혜정의 휴대폰은 불이 날 정도로 울렸고 신은지의 존재에 대해서 모르는 그녀의 지인들은 비꼬는 억양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다.「태준이한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얘기도 듣지 못했는데 갑자기 혼인신고를 했어요? 모임에서도 못 본 얼굴인데 어느 가문의 딸이에요? 하긴 요즘 애들은 우리 때랑은 달라서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다는 핑계로 어른들이 소개해 주는 사람은 만나려고 하지 않잖아요. 물론 태준이 정도의 능력으로는 소개가 없어도 주위에 여자가 많으니까요.」평소 각종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꺼리는 신은지였기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것이 전부인 부잣집 사모님들이 그녀를 모르는 것은 몹시 놀랄 일도 아니었다.그러나 강혜정은 정확히 누군지도 모르고, 각별한 관계도 아닌 지인들이 신은지를 하찮게 생각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기에 똑같이 비꼬는 말투로 답장을 보냈다.「우리 며느리가 중요한 파트너사들이 주최하는 업무 관련 세미나와 연회에만 가끔 참석하고 시끌벅적하기만 하고 쓸모없는 모임은 참석하기를 꺼려서 말이죠. 충분히 모르실
박태준은 3년 전 신은지와 결혼했던 동안 그가 언제 집에 들어왔고 그녀에게 어떤 말들을 했었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기분이 묘했다. 게다가 신은지가 일기장에 그가 그녀와 함께 혼잡한 지하 복싱장에 있는 고리대금업자를 찾아가 그녀의 빚을 갚아주던 모습이 빛날 멋있었다고 쓴 것을 보고 기분이 날아갈 듯이 기뻤다.한편, 신은지는 오래전 놀이공원에서 울었던 것을 다시 회상하면서 박태준에게 투덜댔다.“너 바보야? 한밤중에 자지도 않고 내가 우는 걸 왜 몰래 지켜봐.”“한밤중에 인적도 드문 놀이공원에서 여자애가 혼자서 서럽게 울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두고 갈 수 있었겠어.”“그럼,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우는데도 넌 다가와서 휴지를 건네주거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박태준은 말문이 막혀 잠시 입술을 오므리다가 반박하기 시작했다.“너한테 밤새 울어도 남을 정도의 휴지가 있었으니까 그냥 지켜봤지.”신은지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박태준을 바라보다가 실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네가 그때 멀리서 지켜보지 않고 슬픔에 잠겨있는 나한테 적극적으로 다가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면 지금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지도 모르지. 그때는 너의 행동 하나에 우리의 미래가 바뀔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어?”신은지는 엄마가 죽고 아빠인 신지하가 새로운 여자를 집에 들이면서 그에게 버려졌고 외롭고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었다.그녀는 만약 박태준이 그 무렵에 적극적으로 다가와서 지금 같은 사랑을 쏟아부어 줬다면 진작 그에게 모든 걸 내어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박태준은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졌고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그때 너의 눈에는 나유성밖에 보이지 않았잖아.”그때 신씨 가문은 거액의 고리대금이 없는 상황이었고 죽마고우였던 신은지와 나유성 사이도 엄청 좋았다.그 무렵, 신은지의 눈에는 나유성이 너무나 멋지고 완벽한 사람으로 보였고 신지연이 다른 사람들을 동원해 그녀를 괴롭히고 고립시켜도 옆에 나유성만 있어도 큰 물의를 일으키지 못했다.게다가 박태준
박태준이 롤러코스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서 신은지가 그의 표정을 정확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잡은 그의 손이 계속 떨리고 있는 것을 느끼고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무서워?”박태준은 애써 담담하게 답했다.“아니, 괜찮아.”신은지는 까치발을 들고 목을 길게 빼면서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진짜로 괜찮겠어?”박태준은 신은지가 넘어질까 봐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잡으면서 말했다.“정말로 괜찮아.”앞 팀의 순서가 끝났는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이동했고 박태준도 그녀의 허리를 껴안은 채 앞으로 움직이면서 말했다.“똑바로 서, 넘어지겠어!”롤러코스터는 한 번에 20여 명밖에 탈 수 없었고 아무리 VIP 표를 산 두 사람이라고 해도 길게 늘어선 대기 줄 때문에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박태준은 긴 대기 줄을 보면서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위험한 놀이기구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이해되지 않았고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여전히 박태준의 품에 안겨있는 신은지는 롤러코스터를 탈 생각에 흥분해서 가만히 서 있지 못했다.“무서워? 왜 한숨을 계속 쉬는 것 같지?”박태준은 신은지의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기에 얼른 고개를 돌리고 가까이 들이미는 그녀의 얼굴을 손으로 가리면서 말했다.“그럴 리가, 네 생각이 틀렸어.”신은지도 평소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을 냉혈인이 놀이기구 하나를 무서워할 리 없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두 사람 뒤에 서 있는 몇 명의 대학생들은 졸업하면 무엇을 할지에 대해 열정적으로 토론하고 있었고 신은지는 사회초년생들의 패기 넘치는 포부들을 엿들으면서 자기의 열정도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하지만 찜통더위로 인해 그들의 열띤 토론도 20분을 넘기지 못했다.그도 그럴 것이 뜨거운 여름날, 대기 줄에는 햇빛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사람들이 너무 붐비는 탓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더웠기 때문이었다.신은지도 손을 들어 연신 부채질하면서 투덜댔다.“더워 죽겠네!”박태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별거 얘기가 나오자 신연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마음이 아프지?결혼한 뒤로 박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사실 상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어차피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박태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었다.“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오늘 반차 내줄 테니 짐부터 집으로 옮겨.”“아니….”거절의 말은 때 아니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묻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온 진영웅이 공손히 말했다.“대표님,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박태준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이제 나가봐.”신연지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박태준,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지난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신연지가 그와 싸우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할 말이 없게 된 신연지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서 그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낭비였다.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일단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수정했다. 그에게 잡혔던 턱에 퍼런 멍이 나 있었다.두꺼운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러 인사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연지 씨, 프린터에 잉크가 다 떨어졌어. 좀 갈아줘.”하루에도 몇번씩 듣는 잔심부름이었다. 박태준의 개인 비서로써 그의 일과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를 쌀쌀맞게 대하는 박태준의 태도에 점차 같은 비서실 직원들도 그녀를 막내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연지 씨, 잉크 좀 갈아달라니까?”평소에도 신연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도 비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퇴사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사직서 제출하기 전이잖아?”“제 업무 내용은 박 대표님의 일과를 책임지는 겁니다. 도 비서님이 박 대표님 대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