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오를 때까지도 신은지는 불꽃쇼의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우리 둘의 이름을 다 넣지 그랬어?”놀이공원 폐장 시간이라 주차장 출구에 차가 많이 밀렸다. 박태준은 온통 브레이크 등이 켜진 앞 차들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네가 그렇게 이목을 끄는 방식을 싫어할 줄 알았지.”“성씨 이니셜만 쓰면 되잖아. 아무도 우리라는 걸 몰라.”“...”맨 처음 설계할 때 그도 그렇게 하려 했었다. 하지만 은지의 성씨 뒤에 자기 성씨를 넣고 보니 너무 이상한 단어가 되어 그 생각은 철저히 접었다.그는 얼굴에 살짝 어색한 기색이 감돌았지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미안해. 미처 생각 못 했어.”신은지에게는 이름이 있고 없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해본 소리일 뿐이다.집에 돌아온 신은지는 가방을 탁자 위에 던지고는 소파에 축 늘어졌다.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난 데다 놀이공원에 가서 오후 내내 놀았더니 온몸이 나른해서 꼼짝도 하기 싫었다.박태준은 전화를 받더니 2층 서재로 올라갔다.“여 형사님.”그에게 전화한 건 공예지 사건을 담당한 형사였다. 여 형사는 사건 해결에 진전이 있는 듯 흥분한 말투였다.“박태준 씨, 사람을 찾았고 공예지 사건도 타살로 확정됐습니다. 우리가 이미 그 사람과 기도윤 사이의 관계를 파악했으니 조만간 결과가 있을 겁니다.”“수고하셨습니다.”“별말씀을요. 저희가 해야 할 일인데요. 오히려 저희가 감사를 드려야죠. 박태준 씨가 초아 씨를 통해 후반부 동영상을 확보하고 그분이 경찰서에 와서 다시 진술하도록 설득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사건 때문에 언제까지 골머리를 썩여야 했을지 모릅니다.”참고인 조사를 받던 날 열이 나는 상태로, 파김치가 되어 축 처져 있던 초아는 경찰관을 보고 벌벌 떨며 이내 동영상을 내놓았다. 경찰은 동영상에 편집 흔적이 없다는 분석 결과가 나오자, 그녀가 너무 놀라서 그렇게 떠는 줄 알았다. 신은지가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이튿날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서 중요한 정황
박태준은 뒤에서 손을 뻗어 휴대폰을 넘겨받았다.“내가 해줄 테니 좀 더 자.”신은지의 알람이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니 그녀가 끄덕끄덕 졸며 임 관장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아니야.”그가 소란을 피우는 바람에 그녀는 잠기가 싹 사라졌다. 특히 그의 손이 부잡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자, 신은지는 용수철 튕기듯 벌떡 일어나 앉은 후 뒹굴다시피 해서 침대에서 내려갔다.“이제 졸리지 않아. 휴가는 남겼다가 신혼여행 때 쓸 거야.”박태준은 손에 힘을 쓰지도 못한 채 그녀가 허겁지겁 욕실로 뛰어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는 듯 가볍게 웃었다.“허리가 아프다고 해서 주물러 주려는 것뿐인데, 무슨 생각한 거야?”“...”그녀가 씻고 나오니 이미 옷을 갈아입은 박태준이 거울을 보며 커프스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몸매가 좋고 잘생긴 남자가 이 동작을 하니 더 눈 호강이다.함께 계단을 내려온 후 신은지는 신발을 갈아 신고 말했다.“나는 오늘 유라랑 콘서트 보러 가야 해서 저녁에 늦게 돌아올 거야. 졸리면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박태준이 미간을 찌푸렸다.“곽동건은? 여자친구랑 같이 안 간대?”“모든 자리에 남자친구랑 같이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콘서트는 당연히 취미가 서로 맞는 사람끼리 가야지. 곽 변호사처럼 빈틈없는 사람과 콘서트에 같이 가면 고등학교 교감 선생님과 디스코 추러 가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어?”감히 움직이지도 못할 텐데, 미친 듯이 뛰고 소리 지르고 야광봉을 흔드는 것은 생각도 못 하겠지.박태준은 입술을 오므렸다. 신은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진유라한테 빼앗겨서 못마땅했지만 여전히 관심을 보였다.“어느 구역 티켓을 예매했어?”“일반 구역.”진유라가 며칠 전 어떤 스타의 팬이 됐는데, 마침 경인시에서 콘서트를 한다고 급히 티켓을 예매했다. 하지만 너무 늦어서 일반 구역 티켓밖에 없었다.“어느 가수야? 진영웅한테 부탁해서 VIP 좌석을 구해줄게.”신은지가 가수 이름을 말하자, 휴대폰을 들고 진영웅에게 전화하려던 박태준
신은지가 박태준에게 좌석이 구석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자리에 앉기까지 ‘죄송합니다’, ‘좀 비켜주세요’를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른다.무대에서 스태프가 마지막 점검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머리, 몸, 팔다리를 구분할 수 있어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 더 자세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맥이 빠져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목숨을 반쯤 잃은 것 같았다.“다시는 콘서트 오지 않을 거야. 오빠는 역시 TV에서 보는 게 제맛이야. 롱샷, 클로즈업이 번갈아 바뀌고 고화질 버전이라 얼굴에 주름이 몇 개 있는지까지 똑똑히 보이거든.”“... 현장에서 복근을 보는 게 더 좋다며?”“너무 멀어서 그냥 살덩어리로밖에 보이지 않잖아. 복근, 흉근 심지어 맥주배도 분간이 안 되는데 뭐가 좋아?”“...”잠시 후 콘서트가 시작되고 주인공이 등장하자 객석에서는 지붕이 날아갈 것 같은 즐거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신은지는 초록색 불빛이 반짝이는 응원판을 안고 턱을 그 위에 얹어 하얀 피부가 시퍼렇게 물들었다.진유라는 조금 전까지도 풀이 죽어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더니 이내 분위기에 이끌려 비명을 질러댔다.신은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콘서트가 진행된 두 시간 동안 진유라는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질렀지만 기대했던 하이라이트는 없었다. 복근은 고사하고 오늘 밤은 아예 유교보이 컨셉으로 바꿨는지, 쇄골도 전혀 드러내지 않았다.하지만 춤을 추느라 땀을 너무 많이 흘려 공연복이 흠뻑 젖었고, 흰색 와이셔츠가 몸에 착 달라붙으면서 보일 듯 말 듯 살색이 드러나 금욕과 절제의 미를 보여주었다.그러자 비명이 더 커졌다.역시 여자들은 직접적인 노출보다는 이런 아련한 느낌을 더 좋아한다.신은지는 이 같은 고주파 소음 공해에 시달리며 간신히 콘서트가 끝날 때까지 견뎠고 마지막에는 귀까지 먹먹했다.그들이 맨 마지막에 나왔는데, 진유라는 말을 못 할 정도로 목이 쉬었지만 여전히 스스로 만든 수화로 신은지와 소통했다
하지만 그녀는 식당을 나서기도 전에 곽동건에게 붙잡혔다.“이렇게 급하게 어디 가는 거예요?”“...”진유라는 운명의 뒷덜미를 잡힌 듯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다가 한참 뒤에야 돌아서서 입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지었다.“저는 다 먹었어요. 먼저 들어갈 테니 천천히 드세요.”“저도 다 먹었어요. 같이 가요.”“이렇게 가는 건 좀 그렇잖아요. 인사는 하고 가야죠?”그녀는 아직 곽동건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발을 천천히 뒤로 빼며 언제든지 도망갈 준비를 했다.“제가 가서 인사하면 좋아할 것 같아요?”진유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가? 전혀 좋아하지 않을 게 뻔하다.그녀는 문 앞에 주차된 자기 차를 가리켰다.“제 차는 바로 앞에 있으니 기껏해야 같이 문을 나서게 되겠네요.”이번 판은 이겼다고 생각한 진유라는 턱을 살짝 쳐들며 살짝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작은 표정들 때문에 유달리 생동감 있는 그녀의 얼굴은 꼬집고 싶은 충동을 자극했다.곽동건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을 비비며 갑자기 떠오른 이 생각을 내리눌렀다. 아직 식당 안인데, 그녀를 잘못 건드렸다가 달아나 버리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그는 매너 있게 문을 열고 옆으로 비켜서서 먼저 나가라고 했다.“제가 차를 가지고 오지 않아서 그러는데, 성가신 대로 좀 태워주세요.”“누굴 속여요? 방금 식당에 올 때 차를 운전하고 왔잖아요?”“그건 태준 씨 차예요.”진유라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다가 딱딱하게 말했다.“너무 늦어서 졸려요. 멀리 돌아서 가고 싶지 않으니까 택시 타세요.”“그 스타에 대해 물어볼까 봐 이렇게 피하는 거예요?”“콘서트를 보러 갔을 뿐이고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 아래에 앉아 있었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어요?”그녀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기 때문에 조금도 켕기는 게 없었다. 오늘 콘서트 때문에 곽동건을 차단했었는데, 그가 이걸 따질까 봐 단둘이 있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진유라
다음날 박태준은 공예함이 말한 주소로 갔다. 일부러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노크하자마자 문이 열렸다. 소녀는 문 뒤에 서서 황급히 편지 한 통을 그에게 건네준 후 문을 닫았다.지금 여름인데, 공예함은 긴팔을 입고 있었다. 얼핏 봤지만 더러운 소매 밑에 상처가 살짝 보였다. 꽤 큰 그 상처는 빨갛게 부어오르고 물집까지 생긴 것으로 보아 화상 같았다.박태준은 차에 오른 후 기사에게 출발 지시를 내리지 않고 공예지가 남긴 편지부터 뜯었다.성씨 저택에서 공예지를 죽인 그 미스터리한 남자는 이미 잡혔고, 납치 사건도 해결됐다. 경찰에 의하면, 그 남자가 납치를 사주했고, 그 외에도 몇 개 범죄 사건과 연관이 있다. 아직 기도윤을 불지 않았지만 조만간 끝날 것이다.경찰은 이미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연락도 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실형을 받는 건 확정된 일이지만, 박태준의 목표는 기도윤이 사형을 선고받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영원히 못 나오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범죄 증거를 많이 확보할수록 좋다.봉투를 뜯으니, 안에 USB가 들어 있었다. 컴퓨터에 연결해서 열어보니 공예지와 기도윤이 그동안 주고받은 모든 메시지와 얼마 전에 만난 동영상이었다. 이런 건 다 쓸모없다. 문자를 보낸 번호는 가상번호였고, 동영상에도 기도윤의 얼굴이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말은 더더욱 없었다. 유일하게 유용한 것은 몰래 찍은 동영상이었다.동영상에서 기도윤은 어떤 남자에게 음료수 몇 박스를 선물하고 있었는데, 매우 큰 병에 담긴 무명 브랜드 음료수였다. 그 남자는 박태준이 아는 사람인데, 경인시 정치계에서 지위가 높고 권력이 큰 사람이었다.그런 사람에게 무명 브랜드 음료수를 선물하는 것은 정말 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는 이내 이유를 알았다. 병에 담긴 것이 음료수가 아니라 전부 돈이었던 것이다.공예지가 이 동영상을 어디서 구했는지 모르지만 이것이 그녀가 죽은 원인일 것이다. 기도윤의 죄목이 하나 더 추가됐다. 그 관료를 파헤쳐서 기도윤과 어떤 거래를 했는지 조
“유성아… 날 가져.”“신연지, 날 똑바로 봐. 내가 누구야?”전등이 켜지고 신연지는 그제야 남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박태준? 당신이 왜 여기 있어?”남자는 여자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싸늘하게 말했다.“이건 당신이 자초한 거야. 겁도 없이 내 침대로 뛰어들다니.”“그런 거 아니야. 방을 잘못….”신연지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그러기엔 이미 늦어버렸다. 사지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그녀는 이날 밤 순결을 잃었다.모든 게 끝난 뒤, 박태준은 싸늘하게 그녀에게 카드를 던졌고 분노한 신연지는 남자의 귀뺨을 후려쳤다.그는 손으로 입가를 쓱 문지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물었다.“원하는 게 이런 거 아니었나?”그 말은 신연지를 미치게 만들었지만 후회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박태준, 돈은 필요 없어. 내 순결을 망쳤으니 결혼으로 갚아!”3년 후, 신당동의 한 호화저택.신연지는 따분한 얼굴로 TV에 나오는 뉴스를 보고 있었다. 유명 발레리나 전예은이 무대에서 추락하며 아수라장이 된 현장.한 정장을 입은 남자가 사람들을 비집고 달려가서 부상을 입은 여자를 안고 현장을 벗어나는 모습이 각종 채널에서 보도되고 있었다.잠깐 비친 옆모습이었지만 그와 3년을 동거한 신연지는 한눈에 박태준을 알아보았다.어젯밤 침대에 누워 오늘 일찍 돌아오겠으니 기다리라고 했던 남자였다.그녀는 식어버린 음식들을 허망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직접 만드느라 오후 시간을 다 썼건만, 같이 먹어줄 사람은 오지 않았다.신연지는 다가가서 반찬들을 전부 쓰레기통에 쏟아버렸다.물집이 잡힌 손으로 정성들여 만든 반찬을 쓰레기통에 붓는 모습은 처량하면서도 이질적이었다.설거지를 끝낸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집을 싸기 시작했다.그녀와 박태준은 계약결혼한 사이였다. 그리고 계약한 3년이 드디어 끝났다. 전예은이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시간과 정확히 맞물렸다.비록 아직 정확한 계약기간까지는 3개월이 남았지만 전예은이 돌아왔으니 계약을
“신연지, 이혼 서류 보냈던데 대체 뭐하자는 거야?”박태준의 목소리를 확인한 신연지는 순식간에 잠이 확 깨 대답했다. “거기 적힌 대로야.”박태준은 냉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이따가 출근하면 내 사무실로 와서 이 쓰레기들 도로 가져가. 저녁 여덟 시까지는 시간 줄 테니까 짐 싸들고 집에 돌아오고.”그의 말에 신연지도 지지 않고 반박했다.“박태준, 당신 미쳤어?”잠시 숨을 고른 그녀는 말투를 바꿔 차분하게 말했다.“전예은 씨가 불륜녀로 낙인 찍힐까 봐 그러는 거야?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거 부모님하고 가까운 지인들만 알고 세상 사람들은 모르잖아. 사람들은 당신을 여자친구의 꿈을 응원하고 기다리는 순애보로 기억한다니까?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 귀국했으니 잘된 거 아니야?”하지만 박태준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제 전예은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뉴스에 났는데 오늘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이 서류가 외부에 노출이라도 된다면 전예은은 불륜녀로 낙인 찍히게 되는 것이다.그는 싸늘한 얼굴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한참 신나서 떠들던 신연지는 뒤늦게 전화가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개 같은 자식.’호텔과 본사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그녀는 느긋하게 씻고 조식을 챙겨 먹은 뒤, 지하철역으로 향했다.박태준과 결혼한 뒤, 그녀는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박태준의 비서로 재경에 입사했다.하는 일로 따지면 사실 비서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웠다.평소에는 박태준의 삼시세끼와 옷 세탁 등 자질구레한 일을 책임지고 최저시급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월급을 받았다.회사에서는 그녀가 박태준의 아내이자 재경의 안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참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불륜녀로 불려야 할 여자는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고 정실 부인인 그녀는 매일 신분이 들킬까 봐 차를 타고 와도 몇 정거장 앞에서 내려 걸어서 출근하고 있었다.회사에 도착한 신연지는 곧장 자리로 가서 사직서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별거 얘기가 나오자 신연지의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하다? 왜 마음이 아프지?결혼한 뒤로 박태준이 저택으로 돌아와 밤을 보낸 횟수는 손에 꼽을 수준이었다. 사실 상 별거와 다를 바 없었다.“어차피 3개월밖에 남지 않았는데 굳이 그 집으로 들어가서 살 필요성을 못 느껴서 그래.”박태준은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가 냉소를 지었다.“그건 내가 판단할 일이지. 오늘 반차 내줄 테니 짐부터 집으로 옮겨.”“아니….”거절의 말은 때 아니게 들려온 노크소리에 묻혀버렸다. 안으로 들어온 진영웅이 공손히 말했다.“대표님, 회의 들어갈 시간입니다.”박태준은 옷매무시를 정돈하고 그녀에게 싸늘하게 말했다.“이제 나가봐.”신연지는 이대로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박태준, 난 돌아가지 않을 거야.”박태준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지난번에도 비슷한 얘기를 했던 것 같은데?”신연지가 그와 싸우고 집을 나간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매번 며칠 지나지 않아 그녀는 스스로 집으로 돌아갔다.할 말이 없게 된 신연지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여기서 그와 입씨름하는 건 시간낭비였다.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일단 화장실로 가서 화장을 수정했다. 그에게 잡혔던 턱에 퍼런 멍이 나 있었다.두꺼운 컨실러로 자국을 가린 뒤, 그녀가 사직서를 제출하러 인사과로 향하는데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연지 씨, 프린터에 잉크가 다 떨어졌어. 좀 갈아줘.”하루에도 몇번씩 듣는 잔심부름이었다. 박태준의 개인 비서로써 그의 일과만 관리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녀를 쌀쌀맞게 대하는 박태준의 태도에 점차 같은 비서실 직원들도 그녀를 막내처럼 부려먹기 시작했다.“연지 씨, 잉크 좀 갈아달라니까?”평소에도 신연지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도 비서가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퇴사하더라도 마지막 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어? 아직 사직서 제출하기 전이잖아?”“제 업무 내용은 박 대표님의 일과를 책임지는 겁니다. 도 비서님이 박 대표님 대신이라도 된다는 말씀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