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은 돌아서자 전혀 모르던 소녀가 그의 앞에 서 있었다. 케빈은 아는 체하지 않고 다시 문을 쳐다보았다.민지는 케빈이가 시영이 외의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성격에 익숙했다. 그녀는 케빈이가 기억을 잃었을 줄은 예상하지도 못했기에 그저 자신을 무시한다고 여겼다. 민지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도 들었어요, 시영 아가씨를 구하려다 다쳤다면서? 정말 용감해요! 그런데 후두부는 아직도 낫지 않은 거예요?”“게다가 상대가 백 명 넘게 있었다면서요? 그럼 한 명씩 일대일로 싸운 거예요? 아니면 놈들이 떼로 몰려와서 케빈 씨를 공격한 거예요? 백 명 넘게 떼로 덤볐다면 분명 벌써 죽었을 텐데.”민지는 혼자 계속 말했지만 케빈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곧 민지는 침을 삼키며 시영의 문을 두드리려 했다. 케빈은 바로 앞에 서서 민지를 막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뭐 하시는 거예요.”민지는 손에 든 것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시영 아가씨를 위해 준비한 보양식을 가져왔어요. 사모님이 저를 보내왔어요.”케빈은 자신이 그걸 가지고 들어가면 시영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케빈은 그것을 가져가려 했지만 민지가 안고 있었다. “이봐요, 왜 억지로 빼앗으려고 하는 거예요? 저도 시영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단 말이에요!”이때 시영의 다정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민지 씨, 왔어요? 어서 들어와요.”민지는 승리한 듯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들어갔다....민지는 보양식을 전하고 나온 후 여전히 문 앞에 서있는 케빈을 보고 호기심에 물었다.“여기는 위험할 게 없는데 왜 여전히 지키고 있는 거예요?”“케빈 씨가 시영 아가씨보다 더 위험해 보여요. 예전에 그렇게 심하게 다친 데다가 그렇게 지저분하고 낡은 곳에서 지내셨으면서.”이 말을 듣자 케빈은 눈살을 찌푸렸다. ‘지저분하고 낡은 곳?’“그게 무슨 말이죠?”민지는 그가 드디어 입을 열자 더 빠른 속도로 말했다. “예전에 케빈 씨가 지내던 곳 말이에요. 창문도 없고 정말 더럽고 허름
똑똑-갑자기 울린 노크 소리가 물에 돌을 던진 듯한 파문을 일으키며 아름다운 장면을 깨뜨렸다.“아가씨.”케빈이 트레이를 들고 들어와 차탁 위에 놓고는 손을 늘어뜨린 채 옆에 섰다.시영은 잠시 서 있다가 머리를 돌려 탁자 위의 야식을 보았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들이었다.시영은 천천히 다가가 젓가락을 집었다. 그리고 케빈의 얼굴에 있는 손자국을 보며 그를 손짓으로 불렀다. “이리 와.”케빈이 다가가 몸을 숙여 무릎을 꿇었다. 시영은 자신의 차가운 손으로 케빈의 얼굴에 있는 손자국을 스치며 부드럽게 말했다. “케빈 오빠, 오빠가 날 이렇게 화나게 만들었으니 나도 어쩔 수 없었어. 많이 아팠지? 나한테 화난 건 아니지?”케빈은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께서 뭘 하셔도 괜찮습니다.”시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내가 뭘 해도 괜찮다고? 그럼 내가 아가씨라서 날 감히 원망하지 않는다는 거야?”케빈은 시영이가 갑작스레 화를 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사회성이 부족하고 말주변도 없어서 말이 많아지면 더 실수할까 두려워 침묵할 뿐이었다.시영은 케빈의 가슴을 칼로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그가 지금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생각하며 억지로 참았다. 시영은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도 저녁도 못 먹었잖아. 앉아서 같이 먹자.”이후 시영은 방금의 불쾌함을 잊은 듯 음식을 집어 케빈에게 먹여주기 시작했다.케빈은 익숙하지 않아 직접 먹으려 했지만 시영의 얼굴에 웃음이 사라지며 말했다. “케빈 오빠, 내가 지금 오빠를 위로해 주고 있는데 나를 거절할 거야?”케빈은 입을 벌려 음식을 먹었다. 시영은 웃으며 그의 입을 닦아주고 국을 먹여주었다.저녁을 먹고 케빈이 일어나서 정리하려는 순간 두 팔이 그를 감쌌다.“나 씻고 싶어.”며칠 동안의 치근덕거림을 거쳐 시영의 접근이 쉽게 케빈의 충동을 일으켰다. 그는 애써 욕망을 억누르며 차분하게 말했다.“알겠습니다.”욕실에는 김이 자욱했다. 케빈은 물을 채우고 고개를 돌려 시영을 부르려던
케빈이가 시영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벗겼을 때 그의 이마에는 이미 땀방울이 가득했다.시영은 그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고 검은색 하이힐을 신은 발을 들어 그의 무릎에 올렸다. “이거 잊었잖아.”케빈은 시영의 힘에 따라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발목을 잡았다. 하이힐 한 짝이 벗겨진 뒤 시영은 다리를 들어 나머지 하이힐을 벗게 했다.하이힐이 바닥에 떨어졌지만 케빈은 그녀의 발목을 놓지 않고 오히려 시영의 발목을 더 세게 쥐었다.시영은 그의 동요를 눈치채고 얼굴을 손으로 받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내가 좋아? 갖고 싶어?”케빈은 전기 충격을 받은 듯 시영의 발목을 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부끄러운 표정에 시영은 웃음을 터뜨리고 물을 움켜쥐어 그의 머리에 뿌렸다. “뭐가 걱정이야? 전에 안 해본 것도 아니잖아.”케빈은 그런 장면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더 숙였다. 시영은 인내심을 잃고 호되게 말했다. “고개 들어!”케빈이가 고개를 들자 시영은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케빈 오빠, 오빠가 날 안 보면 보면 내가 매력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게 될 거야.”“아닙니다.”분명 한마디뿐이었지만 케빈은 말하기가 매우 어려웠다.시영은 만족스러워하며 케빈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럼 마음을 보여줘. 케빈 오빠, 응?”분명히 애교를 부리는 목소리였지만 그 속에는 분명한 조롱이 담겨 있었다. 시영은 그가 가장 비참한 욕망을 드러내도록 만들고, 케빈이가 자신에게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케빈은 시영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아가씨가 원한다면 그가 못할 일은 없었다....욕실의 수증기는 점점 더 많아졌고, 호흡의 열기가 더해지면서 물방울이 벽 욕조 가장자리 남자의 등에 맺혔다.욕실의 수증기가 비처럼 내릴 정도로 가득 찼을 때 시영은 케빈의 머리카락을 잡고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해 봐, 지금 뭐 하고 싶어?”건장한 가슴이 격렬하게 오르내리며 케빈은 시영을 갈망하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케빈은 시
다음 날.시영이 깨어났을 때 케빈은 소파 옆에 서서 그녀가 일어나 아침을 먹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영은 침대에 엎드려 머리를 받치고 케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케빈, 내가 말했잖아. 이제 넌 내 남자친구니까 이런 거 안 해도 돼.”케빈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제가 하고 싶습니다.”이 말이 듣기 좋은지 시영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는 세수하고 나서 소파 옆에 앉았다.아침을 먹고 나서 시영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말해봐. 나한테 할 말이 있거나 부탁할 게 있는 거지?”케빈은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시영이 어떻게 알아차렸는지 궁금해했다. 시영은 립스틱을 꺼내며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밥 먹는 동안 계속 날 쳐다보잖아. 내가 눈치 못 챌 줄 알았어?”케빈은 몇 초 동안 침묵했다. 지금의 시영은 예전처럼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똑똑하고 예리하며 자신의 모든 행동을 알아차리고 있었다.“아가씨, 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시영은 화장을 하며 무심코 말했다. “말해봐. 내 옆에서 운전하고 싶은 거야? 아니면 날 매일 볼 수 있는 자리라도 원해?”케빈은 무릎 위에 놓인 주먹을 꼭 쥐며 말했다. “저희 정말 연인인가요?”퍽-시영은 파우더 팩트를 닫으며 미소를 지으며 케빈을 바라보았다. “나를 의심하는 거야?”“아닙니다.”“그런데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단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혹여나 제가 당신을 다치게 했는지...”“그만!”방금까지 침착했던 시영은 순간적으로 폭발했다. 시영은 탁자 위의 주스 잔을 집어 그의 얼굴에 던지며 소리쳤다. “케빈! 내가 그동안 너무 잘해줘서 내 말을 안 듣는 거야? 내가 뭐라고 했어? 과거를 묻지 말라고 했지! 너 귀머거리야?”기억을 잃은 케빈이든 예전의 케빈이든 시영의 벌을 받을 때는 피하지 않았기에 잔이 눈썹 뼈에 부딪혔다.케빈은 눈을 감고 나직하게 말했다. “아가씨가 저를 미워한다면 저는 제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오빠.”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씨발. 너 나 미행했어?”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오빠, 나 무서워.”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