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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어떤 놈이야?

윤을 보는 순간 민승현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오늘 왜 평소와 달라 보이지?’

권하윤은 누가 봐도 예쁜 미인인 것은 맞았으나 언제나 영혼 없는 인형 같았다.

눈빛은 늘 흐릿했고 언제나 정신이 반쯤 딴 데로 가 있는 듯한 멍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 한 번 본 적 없었다.

때문에 남자의 마음을 살살 녹이는 애교 많은 강민정에 비하면 통나무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권하윤은 눈가가 촉촉했고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으며 더욱이 눈매에 야릇함이 묻어있었다.

분명 목까지 올라오는 긴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었지만 그녀를 보고 있자니 욕망이 들끓어 올랐다.

민승현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끝내 화를 참지 못하고 권하윤의 뺨을 내리쳤다.

“당장 말해! 이렇게 입고 어떤 놈 만나러 갔어?”

새하얀 얼굴에 빨간 손자국이 올라왔지만 권하윤은 화끈거리는 얼굴을 만지지 않았다.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남자를 올려다볼 뿐.

“나 같은 여자는 다 벗고 길에서 돌아다녀도 볼 사람이 없다며? 그런데 이렇게 입고 다니는 게 어때서?”

“어디서 말대꾸야? 권씨 가문 가훈은 이제 지키지도 않겠다 이거야?”

민승현은 다시 손을 뻗었지만 옆에 있던 강민정이 그의 팔을 끌어안았다.

“오빠.”

그리고 서로 눈을 마주친 순간 민승현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이거 방금 내가 침대에서 민정한테 한 말인데 권하윤이 어떻게?’

“씨발. 너 나 미행했어?”

권하윤은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네. 다 아는 일을 굳이 입 밖에 꺼내야겠어?”

“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권하윤의 눈은 강민정을 한 번 훑었다.

“요즘 어머님께서 민정 씨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다던데. 괜찮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가려면 여자의 몸가짐이 중요하지 않겠어?”

강민정은 흠칫 몸을 떨더니 민승현의 팔을 잡아당겼다.

“오빠, 나 무서워.”

강민정의 반응에 민승현은 이성의 끈이 끊어졌다. 권하윤을 노려보는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녀를 갈기갈기 찢을 것만 같았다.

‘지금껏 이 고약한 심보를 숨기고 있었던 거야? 감히 나를 협박해? 정말 소리 없는 개가 사람을 문다더니!’

소문 때문에 강민정이 다치는 게 걱정되지 않았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권하윤의 옷을 벗겨 밖으로 내쫓고 싶었다.

권하윤은 그런 민승현의 반응을 보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2층으로 향했다.

“거기 서!”

하지만 민승현의 목소리가 그녀를 다시 불러 세웠다.

“이 옷 누구 거야?”

계단을 오르던 권하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민승현을 힐끗 봤다.

“누구 건지 뭐가 중요해? 지금 네 기분이 더럽다는 게 제일 중요하지!”

차가운 말투. 더 이상 예전처럼 상대의 기분을 살피느라 한껏 자세 낮춘 말투가 아니었다. 그런 권하윤의 변화에 민승현은 멈칫했다.

“너 설마 나 보라고 일부러 남자 외투 여기에 놓은 거야?”

권하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민승현은 권하윤을 이미 꿰뚫어 봤다.

‘하. 역시 그런 거였어? 하긴, 권하윤이 다른 남자와 붙어먹을 정도로 대담한 여자는 아니지. 내 주의를 끌려 발악한 거면 모를까’

속으로 그렇게 결론짓고 나니 민승현은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강민정은 권하윤의 자세와 갑자기 흘러나오는 여성스러움에 이상함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외투를 주어 자세히 살피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

“오빠, 아무리 봐도 이 외투 새언니가 남긴 게 아니라…….”

“됐어.”

민승현은 강민정의 말을 자르더니 자신만만해서 입을 열었다.

“권하윤이 나 얼마나 좋아하는지 넌 모를 거야. 게다가 권씨 가문이 어떤 가문인데 설마 쟤가 딴마음을 품겠어? 정말 그런 일이 있다면 내가 나서지 않더라도 권씨 가문에서 먼저 나섰을걸.”

확신하는 민승현의 모습에 강민정은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굳게 닫힌 2층 문을 살피며 마음속으로 의심을 삼킬 뿐.

솔직히 반년 전 권하윤이 큰 병을 앓고 다시 일어난 뒤로 그녀는 권하윤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었다.

사람이 무뚝뚝해진 건 둘째치고 민승현을 대하는 태도도 예전 같지 않았다.

특히 여태 본 적 없는 아우라는 그녀가 변했다는 걸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이 앓고 나면 성격이 변하나? 게다가 오늘 분명 남자한테 사랑받고 온 모습이었는데.’

이대로 넘어가자니 강민정은 속이 뒤틀렸다. 때문에 곧바로 민승현의 팔을 끌어안으며 훌쩍거렸다.

“오빠, 아까 새언니가 우리 일 소문낸다고 했는데 앞으로 오빠 명성에 흠이라도 가면 어떡해? 우리 앞으로 만나지 말자.”

“무슨 바보 같은 소리 하는 거야? 걱정 마. 권하윤을 가만두지 않을 사내가 가만있더라도 누군가는 가만있지 못할 테니.”

“그게 무슨 말이야?”

“권씨 가문에서 권하윤이 저렇게 날뛰는 거 보고만 있지 않을 거야.”

다음날 아침.

권씨 저택 거실에 무릎 꿇고 앉은 권하윤의 등에 가늘고 긴 회초리가 사정 없이 내리꽂혔다.

단단한 회초리가 몇 번 내리치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옷 위로 피가 보였다.

짝! 짝!

등 감각이 점점 없어질 때쯤 소파에 앉은 중년 여성이 손을 들었다.

“그만.”

권하윤은 가쁜 숨을 내쉬고 스스로 깨물어 흘러나온 입안의 피를 삼켰다. 순간 비릿한 맛이 혀를 감돌며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중년 여성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눈빛으로 땀에 흠뻑 젖은 권하윤을 지그시 바라봤다.

“뭘 잘못했는지 알겠어?”

“네, 어머니. 남편 될 사람을 거역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어렵사리 낸 목소리는 이미 갈라졌다.

권미란은 권하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입꼬리를 씩 올렸다.

“네 행동 하나하나가 권씨 가문의 명성에 영향을 준다는 걸 잘 기억해 둬. 권씨 가문이 이대 째 내려오면서 몇십 년간 쌓아 올린 명성이 네 손에 무너지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너도 알지? 그 벌로 오늘 오전 내내 여기서 무릎 꿇고 있어. 이번 달은 별원에 갈 생각도 하지도 말고.”

권하윤의 표정은 순간 어두워졌다.

“권 사모님…….”

“크흠!”

“어머니, 지난달 약혼할 때도 그분들 보러 가지 못해 걱정됩니다. 한 번만 보러 가게 허락해 주세요.”

소파에 앉아 있던 권미란은 검은 비단 치마를 손으로 슥 만졌다. 정갈하게 빗어 올린 머리 때문에 무뚝뚝한 표정이 더욱 엄격해 보였다.

“너도 알 거 아니니. 내 딸과 똑 닮은 너의 그 얼굴만 아니라면 너희 가족 모두 해원에서 죽었을 거란 거.”

“…….”

권하윤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 권하윤은 권씨 집안 넷째가 아니다. 진짜 넷째는 불치병으로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하지만 민씨 가문이라는 사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권씨 가문은 가짜를 데려다 딸의 인생을 살게 했다.

권미란 덕분에 권하윤은 원수의 눈을 피해 가족과 함께 해원에서 경성으로 도망쳐 올 수 있었고 그 대가로 권씨 집안 넷째로 평생을 꼭두각시처럼 살게 되었다.

권하윤은 처음에 권씨 가문이 그녀 인생의 동아줄이라고 생각했었다. 반년 동안 이 집에서 살면서 곧바로 이곳이 또 다른 지옥이라는 걸 알아버렸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다. 진짜 부모님 그녀의 유일한 약점이 권미란에게 잡혀있기에.

권하윤은 이번에도 결국 고개를 숙였다.

“네, 어머니.”

오전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있은 권하윤은 저택을 떠날 때쯤 무릎에 감각을 잃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오늘 저녁 민씨 가문에서 개최하는 가족 연회에 그녀는 처음으로 예비 며느리의 신분으로 가는 거였으니 일찍 가서 일손을 도와야 했다.

스스로 운전해서 이동하고 싶었지만 무릎에서 전해져 오는 통증에 그럴 수 없었다.

어디 무릎뿐이겠는가? 어제 종일 민도준한테 시달리고 나니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기조차 힘들었다.

권하윤은 스스로도 자기 꼴이 우스웠다.

‘민승현을 거역했다고 이런 벌을 받을 줄이야. 만약 민도준과 있었던 일을 들키면 권미란 손에 맞아죽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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