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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어젯밤 잘 잤어?

상처에 바르는 약 하나가 권하윤의 손에 놓였다.

하지만 설명서에 쓰인 상처 부위를 보는 순간 권하윤의 얼굴은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 열기는 본채 정원에 도착해서야 겨우 식었다.

집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치고는 규모가 대단했다.

휜 국과 꽃에 둘러싸인 중심에는 흑백으로 된 사진 두 장이 놓여있었다. 사진 속 사람은 다름 아닌 민도준의 부모님이었다.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건 크게 없었다. 그저 해외에서 폭동이 일어날 때 피습당했다는 것밖에는.

권하윤이 자리에 서기 바쁘게 강수연이 아니꼬운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지만 사람들 앞에서 화를 내기도 뭣해 째려보고 홱 돌아섰다.

그때 민승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일부러 나 망신 주려고 그래? 친척들 모두 아침 일찍 모였어. 민정이도 아침부터 엄마를 도와 제사 음식에 이것저것 일손을 도왔는데 넌 지금껏 잠이나 자다 난타나? 예의를 쌈 싸 먹었어?”

권하윤은 눈을 들어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어르신들께 차를 나르는 강민정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밤낮으로 참 대단하네. 내가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너 뭐라고 했어? 씨발 다시 한 번…….”

화를 내던 민승현은 민상철과 민도준이 나타나자 다급히 말을 삼켰다.

멀리서 걸어오는 민도준은 간밤에 칼에 찔렸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멀쩡했다.

주위 사람들은 두 사람을 보자마자 양쪽으로 갈라지며 길을 냈고 그 사이에 권하윤도 속해 있었다.

하지만 민도준이 곁을 지날 때 몸에서 나는 담배연기와 시원한 향이 한데 섞여 코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권하윤은 심장이 요동쳤다.

그러던 그때, 민도준이 갑자기 자리에 멈춰 섰다. 그 때문에 앞에서 걸어가던 민상철도 뒤를 돌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왜 그래?”

권하윤은 순간 머리가 찌근거렸다. 민도준이 또 이상한 말을 해댈까 봐 불안해났다.

그런데 민도준의 눈빛은 권하윤의 몸을 슥 훑고는 민승현에게 멈췄다.

“승현아.”

민도준의 앞에 서자 민승현의 건방진 태도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목소리마저 미약하게 떨림이 담겨 있었다.

“형.”

“어젯밤 잘 잤어?”

“아, 어젯밤…… 그게…….”

순간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자신을 향하자 민승현은 말을 더듬었다.

어제저녁 내내 권하윤을 옆방에 두고 강민정과 뒹굴었다. 배덕감과 스릴에 취해 아침까지 방으로 돌아가지 않았는데 갑자기 민도준이 어젯밤 얘기를 꺼내자 당황을 금치 못했다.

‘형이 내 일에 갑자기 왜 관심을 가지지? 설마…… 아니야. 그런데 도준 형 마음을 내가 무슨 수로 알아…….”

민승현의 머리는 깨질 것처럼 복잡했다. 그 순간 두렵고 긴장한 건 강민정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얼굴은 극도로 어두워졌다.

민승현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렸고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러던 그때 민도준은 그의 목을 가볍게 툭툭 쳤다.

“간밤에 아주 뜨거웠나 보네.”

민승현은 당황한 듯 목을 가렸다.

그 흔적은 어제 강민정이 권하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남긴 거였다. 그런데 일이 꼬이다 보니 민도준이 먼저 보게 된 거다.

강민정은 제 발이 저려 몸을 비틀거렸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나만 말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가 남겼다는 거 모를 거야.’

역시나 그녀의 생각대로 모든 사람의 눈빛이 권하윤에게 쏠렸다. 특히 당사자인 강민정은 죽일 듯이 권하윤을 노려봤다.

갑자기 억울한 오해를 받은 권하윤은 민도준의 등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순간 피가 거꾸로 솟아 눈앞이 핑글 돌았다.

9시 15분 제사는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긴 의식이 끝나고 가족들이 하나 둘 앞으로 나가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난 젊은 부부를 안타까워했고 비통하거나 슬퍼했다.

유독 민도준만 차가운 표정에 장난기 섞인 미소를 입가에 걸고 마치 이 일과 무관하다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

오히려 피도 섞이지 않은 강민정이 꽃을 놓은 뒤 그 앞에서 통곡했다.

아침부터 제사상을 차리며 일손을 돕고 또 제사에 이렇게 울기까지 하자 사람들은 저마다 칭찬을 늘어놓았다.

“민정이 너는 어쩜 이렇게 애가 착해.”

칭찬을 들은 강민정은 눈물을 훔치며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민씨 가문에서 자라며 은혜를 입었으니 응당해야 할 일인걸요.”

그때 강수연이 권하윤을 힐끗거리며 끼어들었다.

“민정이가 얼마나 착한데요. 아침 일찍 와서 일손도 돕고 역시 가정교육이 중요하다니까요. 예의는 어찌나 바른지.”

끊이지 않는 칭찬에 강민정은 탄력을 받았는지 더욱 세게 흐느꼈다.

“그렇게 속상한가?”

허스키한 목소리에 강민정이 고개를 들었을 때 민도준이 입꼬리를 올린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콩닥거리른 가슴을 진정하며 강민정은 저도 몰래 침을 삼켰다.

‘혹시 내 모습에 감동했나? 그래서 날 다시 봤나?’

그녀는 스스로 답을 확정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둘째 숙부와 숙모처럼 좋은 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난 것도 서러운데 마지막도 곁에 있어주지 못해 슬픔을 주체하지 못했어요.”

“그래?”

민도준은 말끝을 흐리며 강민정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때문에 강민정의 얼굴은 발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그러면 너도 보내줄까?”

“네?”

강민정은 민도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민도준의 싸늘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가여우면 같은 곳으로 가서 곁에 있어주면 되겠네. 내가 보내줄까? 아니면 네가 갈래?”

충격적인 말에 강민정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렸고 두려움에 연신 뒷걸음쳤다.

“저…… 그게…….”

“민도준!”

보다 못한 민상철이 끼어들었다.

“농담이에요.”

민도준은 할아버지의 반응에 손을 들며 장난기 섞인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다들 그렇게 안타깝다면 두 분 곁으로 보내드릴 수는 있어요.”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툭 내뱉으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빙 둘러봤다.

원래도 우울하던 현장이 더욱 조용해졌다. 민도준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울음소리도 확연히 작아졌다. 다들 악마 같은 민도준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봐 몸을 사리는 눈치였다.

강민정도 이내 분위기를 눈치채고 사람들 틈에 숨었고 더 이상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권하윤의 순서가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든 국화꽃을 위에 올려놓고는 바닥에 엎으렸다. 가식적인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불쌍하다는 듯 사진을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공손하게 절만 올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보는 순간 민도준의 머리에 다른 화면이 떠올랐다. 자기 아래에서 울던 여자의 모습이. 오히려 그 눈물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가식적인 눈물보다 더 진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하윤은 민도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리 없었다. 그저 모든 신경이 앞에 놓인 흑백사진에 집중됐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민도준의 부모님은 무척 점잖은 인상을 하고 있었다. 특히 민도준의 아버지는 안경을 끼고 있어 문학가의 분위기가 물씬 났다.

이런 부모 밑에서 어떻게 민도준 같은 고약한 성격이 나왔는지 의문이었다.

-

제사가 절반쯤 되었을 때 민도준은 전화를 받고 떠났다.

민상철은 그의 행동에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민도준이 간 뒤 제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민도준에게 보여주기 위한 제사였기에 아들인 그가 떠났으니 사람들의 정성은 당연히 식었다.

제사가 끝나고 권하윤은 매원으로 불려갔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강수연은 어두운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고 강민정은 그녀 뒤에서 어깨를 주물렀다.

“이모, 오늘 하루 힘드셨을 텐데 제가 어깨 주물러 줄게요.”

“힘들다기보다는 망신을 당한 게 가장 큰 문제지!”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인지 강수연의 목소리는 제사를 지낼 때와는 확연히 달랐다.

“어르신들이 있는 자리에 어린 것이 감히 시어머니보다 늦어? 게다가 오늘 제사가 있는 걸 알면서 승현의 몸에 그런 자국이나 남기고 그걸 민도준 앞에서 들키기까지 하고 말이야! 다행히 민도준이 화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집안 말아먹으려고 작정했어 아주!”

강수연의 말에 강민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잘못을 권하윤에게 뒤집어 씌웠다.

“새언니도 오빠를 너무 좋아해서 그랬겠죠. 이틀 전에도 오빠가 무뚝뚝하다고 가출까지 하는 바람에 오빠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뭐? 이게 감히…….”

“어머님.”

그런데 그때 권하윤이 갑자기 나타나 강수연의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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