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말에 민승현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공씨 가문 셋째의 오만하고 잔인한 성격은 이미 그들 사이에서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해원에서의 공씨 가문 세력은 경성에서 민씨 가문 세력에 맞먹기에 그 여자가 얼마나 막 나가는지 안 봐도 뻔했다.‘그런 여자와 결혼하면 남은 평생 잡혀살게 뻔해.’“원래도 제 차례가 오지 않거든요. 할아버지가 도준 형의 짝으로 그 여자를 점찍어 두셨잖아요.”“됐다 그래. 민도준이 어떤 사람인데 네 할아버지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할아버지 말을 듣겠어?”“하긴.”민도준의 얘기를 하자 갑자기 자기를 바라보던 민도준의 눈빛이 떠올라 민승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깊은 밤 밖에서는 여전히 차가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한민혁이 권하윤을 데려다주고 돌아왔을 때 민도준은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그리고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며 느긋하게 물었다.“잘 바래다줬어?”흐트러진 가운과 몸 이곳저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흔적에 나지막한 목소리까지 더해지자 한민혁의 얼굴이 오히려 화끈 달아올랐다.“응. 지금쯤 매원에 있을 거야.”“음.”민도준은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짧게 대답했다.하지만 그때 한민혁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사람을 빼냈으면서 왜 다시 돌려보냈는데? 이 기회에 확 낚아채면 좋았잖아.”“왜? 네가 낚아채고 싶어?”“하하하하.”애매모호한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하는 민도준의 말에 한민혁은 자기 얼굴을 살짝 때리며 헤실 웃었다.“내가 막 말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그리고 민도준의 낯빛을 살폈다.“그런데 형. 아무리 그래도 권하윤 씨가 민승현 약혼녀인데 괜찮겠어? 민승현이 아무리 등신이라고 해도 민재혁이 만약 뭔가 눈치채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뭔 말이 하고 싶은데?”“내가 형 곁에 몇 년 있으면서 형이 밑지는 장사하는 건 처음 봐서 말이야.”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지훈처럼 이익을 따지는 놈이 민도준을 도와주고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게다
권하윤은 낮게 깐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왜 지금 전화해요? 별원 쪽 사람들에게 들킨 건 아니죠?”“…….”“뭐라고요?”권하윤의 머리는 아직 반응하지 못했지만 가슴은 미친 듯이 요동쳤다.“깨어났다고요? 제가 당장 갈게요!”갑자기 밀려오는 기쁨에 권하윤은 손마저 떨렸다. 차 키가 자꾸만 손에서 미끌어 떨어지는 바람에 한참이 지나서야 동네를 나섰다.2년 전 집에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그녀의 아버지는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했고 유일하게 내막을 아는 오빠는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다.만약 그녀의 얼굴이 권미란의 눈에 들어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그래서 죽은 것처럼 꾸며 경성으로 도망치지 못했다면 그의 가족은 모두 해원에서 죽었을 거다.그렇게 남은 생명을 허비하면서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줄 알았는데 오빠가 깨어났단다.권하윤은 기쁜 소식에 당장이라도 오빠한테로 날아가고 싶었다.감속 구간에 진입한 권하윤은 1분이 1년처럼 느껴졌다. 다급한 마음에 경적을 울렸지만 매번 빨간불에 걸렸다.별원은 교외에 위치해 있었지만 북적거리는 시내 못지않았다. 요양원도 많았고 리조트도 많았다.별원은 밖에서 볼 때 평범한 요양원과 다를 바 없지만 사실은 권씨 가문의 산업 중 하나다. 대외로는 개방되지 않은.하지만 권하윤이 문밖에서 반나절을 기다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이곳에 처음 온 것도 아니고 경비가 그녀를 모르는 것도 아니기에 들여보내지 않는 게 이상했다.권하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 차에서 내리기 바쁘게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멸 걸음 걷지 않았을 때 경비가 그녀를 막아 나섰다.“아가씨.”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다.“죄송하지만 저희는 통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없습니다.”“누구 통지요?”“사모님이요.”권하윤은 멈칫했다 그제야 별원은 권씨 가문이 관리하는 곳이며 권미란이 자기보다 더 빨리 소식을 접했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게다가 얼마 전 이번 달 내로 가족 방문을 허락하지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권미란의 차가운 말투에 권하윤은 말을 잃었다.그녀가 권씨 가문에 들어선 그때부터 권미란은 그녀에게 경고했었다. 신분을 들키면 절대로 도와주지 않을 거라고. 가족들이 모두 죽어가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권씨 집안 넷째 아가씨 역할을 완벽히 소화하라고 말이다.“내일 입을 드레스 챙겨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내일 일찍 보낼 테니까 그전에 다른 준비는 다 마치고.”“네, 어머니.”권하윤이 파티에 참석할 때 입는 드레스는 매번 권미란이 선택해 줬다. 심지어 약혼식을 할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이건 그녀뿐만 아니라 권씨 가문의 모든 여자애들이 똑같았다.권씨 가문에서 여자애는 사람이 아닌 상품이다. 아름다운 포장지에 곱게 포장해 내다 팔고 가끔 진열대에 올려놓고 가문을 위해 홍보까지 해야 하는 그런 물건.볼일도 끝났겠다 인사를 하고 가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 권미란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너 민도준이랑 사이가 어때?”권하윤은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가장 먼저 든 생각은 권미란이 자기와 민도준의 관계를 눈치챈 건 아닌가 하는 거였지만 그 일은 민씨 가문 사람들조차 모르는 일이기에 아닐 거라고 스스로 부정했다.그리고 최대한 담담한 척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성격이 괴팍하여 민씨 저택에서 만나긴 했지만 말은 섞지 못했습니다.”권하윤은 말하면서 권미란의 반응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얼굴에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것도 생각했던 반응이었다.‘보아하니 그냥 물어본 거였네.’그제야 긴장이 조금 풀렸다.“내일 연회에 참석할 대 기회를 봐서 둘째를 민도준한테 소개해 줘.”“네?”권하윤은 자기 귀를 믿을 수 없었다.“뭔 호들갑이야. 예의 없게.”그제야 자기의 실수를 눈치챈 권하윤은 놀란 가슴을 달래며 입을 열었다.“민 사장님은 가까이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가까이하기 쉽지 않은 거 누가 몰라서 그래? 그런데 둘째의 명성은 들어봤을 것 아니니? 남자라면 거
공씨 가문이 경성에서의 영향력은 해원에서보다는 못했지만 여전히 명문가는 명문가인 모양이다.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제국 호텔 주위의 교통이 마비됐으니 말이다.호텔 주위의 경비들도 질서 유지를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였으나 실제로는 귀빈들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권하윤은 자차를 끌고 호텔에 나타났다. 하지만 경비는 BMW mini를 보자마자 그녀에게 경멸하는 눈빛을 보냈다.“고객님, 죄송하지만 주차 구역이 남지 않았으니 길 옆에 세워두세요.”“저런 차를 끌고 오다니.”하지만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마세라티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권하윤은 옆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힐끗 살폈다. 차 안에 앉은 여자는 화끈한 몸매에 달라붙는 V넥 드레스를 입은 채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그리고 권하윤이 눈빛을 보내오자 불쾌했는지 째려보고 다시 립스틱을 발랐다.“여기요.”권하윤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초대장을 건넸다.초대장에 적힌 민씨 가문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경비의 태도는 바로 공손하게 바뀌었다.“이쪽으로 가시면 저희 직원이 주차를 도와줄 겁니다.”“고마워요.’권하윤이 들어가자 마세리티를 운전하던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그녀도 방금 길가에 주차하라고 들었는데 저런 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가 주차하는 게 못내 아니꼬웠다.“이봐요! 방금 주차 구역이 없다고 하지 않았어요?”“죄송하지만 방금 들어가신 고객님은 민씨 가문 다섯째 작은 사모님이셔서 주차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습니다.”허리 숙여 설명하는 경비의 말에 여자는 바로 입을 다물었다. 순간 방금까지 보였던 행동이 후회됐다.한편 권하윤은 주차를 마친 뒤 민승현에게 전화했다.하지만 상대는 헐떡이는 소리로 혼자 들어가라는 말만 남겼다.권하윤의 눈살은 저도 모르게 찡그러졌다. 솔직히 민승현이 무슨 짓을 하든 관심이 없었지만 약혼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고 약혼 후 함께 바깥 행사에 나오는 것이기에 함께 동행하지 않으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게 뻔했다.게다가
그리고 입구에 파티의 주인공이 나타났다.자기 구역이 아니지만 그녀는 당당하고 시원시원한 태도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바닥을 끄는 긴 드레스에는 보석이 수도 없이 달려 있었고 옆에 있는 남자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은 영락없는 여왕님이었다.여자의 눈에 띄는 행동에 권희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니꼬운 듯 고개를 돌려 권하윤과 뭔가를 얘기하려 할 때 옆에 있는 권하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발견했다.“하윤아, 너 왜 그래?”“하윤아?”권하윤은 권희연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몸이 저도 모르게 떨렸고 위경련이 일어나는 듯 헛구역질이 올라왔다.그녀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공씨 가문 셋째 아가씨 옆에 있는 남자는 문태훈이다.‘문태훈이 왔다는 건 설마 그 사람도 왔다는 뜻인가? 해원에서 항상 둘이 붙어 다녔으니까.’“하윤아?”권희연의 소리가 그녀를 다시 현실로 끌어냈다.“네?”“너 왜 그래? 안색이 안 좋은데.”“저 속이 좀 안 좋아서요.”변명을 대며 자리를 떠나려 할 때 옆에서 다른 사람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그런데 공씨 가문 가주는 안 왔대요?”“안 왔을걸요. 들리는 데 의하면 병 때문에 입원해 있대요. 그래서 딸을 문 씨 가문 도련님과 함께 보냈다 것 같더라고요.”“그래요?”두 사람의 무심한 대화에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 사람이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권하윤의 답답하던 가슴이 뻥 뚫렸다.하지만 이대로 안심하기는 일렀다. 왜냐하면 문태훈은 그녀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몇 번이나.권하윤이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권희연의 팔이 앞으로 쑥 나오더니 그녀의 팔을 둘렀다.“하윤아, 민도준 씨 왔어.”권희연에게 이끌려 도착한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민도준이 서 있었고 준비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의 눈은 마주쳤다.그 순간 권하윤의 심장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곧바로 시선이 흔들거리더니 누군가 그녀 앞을 막아섰다.방금 전 마세라티를 타고 문 앞에서 만났던 여자였다.여자는
사람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처음에는 가볍게 무시한 채 지나가려 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익속한 목소리는 뇌리에서 재생되는 흐느낌 섞인 여자의 목소리와 정확하게 들어맞아 민도준은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 섰다.그리고 그가 멈춰 선 사이 화면 속 주인공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높게 얹은 머리와 목을 반쯤 가린 하얀 드레스, 청초하고 단아한 모습이었지만 그만 볼 수 있는 야릇함도 묻어 있었다.하지만 그런 권하윤을 본 한민혁은 이내 눈살을 찌푸렸다. 전에 매우 이성적으로 보였는데 왜 또 아는척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민도준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는지 입술을 씩 올리며 나지막하게 물었다.“또 나한테 뭐 부탁할 일이라도 있나?”분명 아무 뜻 없는 한 마디였지만 남자의 눈빛에 권하윤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하지만 아무 말도 못 들은 척 입꼬리를 올리며 인사했다.“오늘 제 언니도 함께 와서 인사드리려고요.”“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가워요.”그녀의 눈짓에 권희연이 우아한 걸음을 내디디며 민도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힐끗 눈을 들어 민도준을 바라보고는 다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그 모습에 민도준은 재밌다는 듯 눈썹을 치켜세우며 눈웃음을 쳤다.“아, 우리 제수씨 언니분이시구나. 그런데 무슨 일이죠?”방금 전과는 대조되는 말투에 권희연이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이런 태도면 아까와 같은 대접은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용기가 생긴 모양이었다.“민 사장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는데 혹시 따로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조심스럽게 민도준의 눈치를 살피고 있을 그때.“그래요. 올라가서 얘기하죠.”민도준의 긍정적인 답변이 들려왔다. 하지만 뭔가 재밌다는 듯 호를 그린 눈은 오롯이 권하윤을 향해 있었다.그 대답에 권하윤은 오히려 놀랐다. 그런데 곧바로 스스로를 한심하게 비웃었다.‘이게 뭐가 의외라고. 날 받아들이면 권희연도 당연히 받아들이겠지.’그리고 민도준의 반응에 놀란 사람은 또 있었다. 두 사람이 휴게실 쪽으로 사라지
“방금 공아름 씨와 함께 나타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권하윤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그녀를 한참 동안 훑어보던 문태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착각했어요.”권하윤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그러시다면 전 먼저…….”“하윤 씨는 경성에서 나고 자랐죠?”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태훈이 먼저 그녀의 말을 잘랐다.“저는 해원 사람인데 이번에 경성에는 처음 왔거든요. 혹시 재미있는 여행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그래요.”권하윤의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솔직히 누구보다도 긴장했다. 이게 모두 문태훈이 저를 의심해서 일초라도 더 옆에 붙잡아 두려는 꼼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 있었다.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가며 문태훈이 묻는 말에 대답했지만 그의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마치 심문하는 듯했다.그렇게 몇십 분을 붙잡혀 질문을 받던 그때 호텔 직원이 다급하게 다가오며 권하윤에게 인사했다.“권하윤 씨, 언니분이 지금 휴게실로 잠시 와달라고 하십니다.”권하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미안한 듯 문태훈을 향해 미소 지었다.“죄송해요. 언니가 저 찾아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히 가보셔야죠.”…….한참을 걸어 거리를 넓히고 나서야 감시를 받는 듯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권하윤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동시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혹시 언니가 무슨 일로 절 찾는다고 했나요?겨우 진정한 권하윤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빨리 오라고만 하셨습니다.”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휴게실 문 앞에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안내를 마치고 이내 사라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멍하니 문 앞을 서성거렸다.‘권희연이 민도준과 함께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날 불러내지? 설마 들어갔다가 이상한 장면 목격하는 건 아닌가?’한참 동안 고민
“네?”권하윤은 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참하고 우아하던 권희연과 민도준이 묘사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매치가 되지 않았다.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권하윤의 표정에도 민도준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입에 담배 하나를 물더니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그녀를 바라봤다.“와서 불 붙여.”권하윤은 몇 초 침묵하더니 앞으로 다가가 금색 라이터를 주워들었다.하지만 라이터의 생김새는 지금껏 그녀가 봐왔던 것과는 달랐다. 뚜껑도 없는 데다가 구멍이 옆으로 나있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불은 여전히 붙지 않았다.짧은 순간 모든 정신이 라이터에 빠져 민도준이 자신을 훑어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이리 와. 가르쳐 줄 테게.”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민도준을 보니 어디에 앉아야 할지 답은 정해진 듯싶었다.더한 짓도 했기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다가가 남자의 한쪽 다리 위에 앉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웬일로 정말 라이터를 켜는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권하윤의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 자세로 손에 있는 라이터를 켜며 인내심 많은 선생님인 양 입을 열었다.“이건 빈티지 디자인이라 이쪽을 당기고 이렇게 밀어야 돼…….”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며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남자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붙이고 있어 한껏 좁아진 공간 때문인지 권하윤은 산소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해 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라이터는 다시 그녀의 손에 놓여졌다.금속 라이터는 남자의 손에 한참 쥐어 있었던 탓인지 처음처럼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권하윤은 모든 신경을 라이터에 쏟았다.전에 라이터를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데다가 이상한 디자인 때문에 아무리 애써봐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몇 번의 시도에도 미약한 불꽃이 튀었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두 사람의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미세한 열기가 점점 피어올랐고 방 안의 온도는 점차 높아졌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