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공아름 씨와 함께 나타날 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얘기 들었어요.”권하윤의 자연스러운 대답에 그녀를 한참 동안 훑어보던 문태성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죄송해요. 제가 사람을 착각했어요.”권하윤은 괜찮다는 듯 싱긋 웃었다.“그러시다면 전 먼저…….”“하윤 씨는 경성에서 나고 자랐죠?”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태훈이 먼저 그녀의 말을 잘랐다.“저는 해원 사람인데 이번에 경성에는 처음 왔거든요. 혹시 재미있는 여행지 소개해 주실 수 있나요?”“그래요.”권하윤의 담담하게 대답했지만 솔직히 누구보다도 긴장했다. 이게 모두 문태훈이 저를 의심해서 일초라도 더 옆에 붙잡아 두려는 꼼수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하지만 그렇다고 거절하자니 오히려 더 의심을 살 수 있었다.한참 동안 대화를 이어가며 문태훈이 묻는 말에 대답했지만 그의 물음은 끊이지 않았다.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마치 심문하는 듯했다.그렇게 몇십 분을 붙잡혀 질문을 받던 그때 호텔 직원이 다급하게 다가오며 권하윤에게 인사했다.“권하윤 씨, 언니분이 지금 휴게실로 잠시 와달라고 하십니다.”권하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미안한 듯 문태훈을 향해 미소 지었다.“죄송해요. 언니가 저 찾아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당연히 가보셔야죠.”…….한참을 걸어 거리를 넓히고 나서야 감시를 받는 듯한 감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권하윤은 그제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거의 동시에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혹시 언니가 무슨 일로 절 찾는다고 했나요?겨우 진정한 권하윤은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직원에게 물었다.“아무 말도 없으셨습니다. 그저 빨리 오라고만 하셨습니다.”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은 휴게실 문 앞에 도착했다.호텔 직원이 안내를 마치고 이내 사라지는 바람에 권하윤은 멍하니 문 앞을 서성거렸다.‘권희연이 민도준과 함께 있는 거 아니었나? 왜 갑자기 날 불러내지? 설마 들어갔다가 이상한 장면 목격하는 건 아닌가?’한참 동안 고민
“네?”권하윤은 놀라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그렇게 참하고 우아하던 권희연과 민도준이 묘사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매치가 되지 않았다.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권하윤의 표정에도 민도준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입에 담배 하나를 물더니 손에 들고 있던 라이터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그녀를 바라봤다.“와서 불 붙여.”권하윤은 몇 초 침묵하더니 앞으로 다가가 금색 라이터를 주워들었다.하지만 라이터의 생김새는 지금껏 그녀가 봐왔던 것과는 달랐다. 뚜껑도 없는 데다가 구멍이 옆으로 나있었다. 몇 번을 시도했지만 불은 여전히 붙지 않았다.짧은 순간 모든 정신이 라이터에 빠져 민도준이 자신을 훑어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이리 와. 가르쳐 줄 테게.”일인용 소파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있는 민도준을 보니 어디에 앉아야 할지 답은 정해진 듯싶었다.더한 짓도 했기에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모든 잡생각을 버리고 다가가 남자의 한쪽 다리 위에 앉았다.하지만 민도준은 웬일로 정말 라이터를 켜는 방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권하윤의 등 뒤에서 그녀를 안은 자세로 손에 있는 라이터를 켜며 인내심 많은 선생님인 양 입을 열었다.“이건 빈티지 디자인이라 이쪽을 당기고 이렇게 밀어야 돼…….”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돌며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남자의 품에 안긴 채 몸을 붙이고 있어 한껏 좁아진 공간 때문인지 권하윤은 산소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해 봐.”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도 잠시, 라이터는 다시 그녀의 손에 놓여졌다.금속 라이터는 남자의 손에 한참 쥐어 있었던 탓인지 처음처럼 차갑지 않았고 오히려 따뜻한 온기를 띠고 있었다.권하윤은 모든 신경을 라이터에 쏟았다.전에 라이터를 손에 쥐어보지도 못한 데다가 이상한 디자인 때문에 아무리 애써봐도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몇 번의 시도에도 미약한 불꽃이 튀었다가 다시 사라지기를 반복했다.두 사람의 맞닿은 피부에서부터 미세한 열기가 점점 피어올랐고 방 안의 온도는 점차 높아졌다. 하
양 끝을 잡아당기지도 않았는데 권하윤은 벌써 등골이 오싹했다.“제 얘기 먼저 들어보세요. 우리 사이에 벌어졌던 일은 우연이었어요.”조금만 늦으면 넥타이가 자기 목을 조여올 것만 같은 두려움에 권하윤은 다급히 설명했다.띄엄띄엄 많은 것을 설명했지만 가짜 신분이라는 말은 결국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저 민승현을 사랑하는데 배신감에 눈이 뒤집혀 복수하려던 것뿐이었다는 말만 몇 번 반복했다.그 사실은 민도준이 조사할까 두렵지 않았다. 진짜 권하윤이 예전에 충분히 보여줬으니까.같은 자세로 권하윤의 설명을 한참 동안 듣고 있던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배신감에 눈이 뒤집혀 복수하고 싶었다고?”“네.”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녀의 대답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일찍 말하지. 복수는 내가 전문인데.”그리고 끝내 권하윤 목에 둘렀던 넥타이를 벗기더니 어딘가로 전화했다.“응. 승현아, 지금 시간 돼?”“당연하죠. 혹시 무슨 시키실 일 있어요?”전화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아부와 긴장감이 섞여 있었다.그때, 민도준은 온몸이 굳어 있는 권하윤을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씩 말아올렸다.“그러면 지금 당장 휴게실로 좀 와.”남자의 말에 권하윤은 옆에 놓여있는 주먹을 그러쥐었다.그리고 상대가 전화를 끊은 걸 확인하고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설마 우리 사이에 있었던 일을 폭로하려는 건 아니죠?”“에이, 그러면 재미없지.:”민도준은 권하윤을 소파에 눌러 앉히고는 허리를 숙여 여자의 가는 목을 살짝 그러쥐었다.“직접 보게 하는 게 아무래도 더 재밌지 않겠어?”말이 끝나기 바쁘게 권하윤의 가슴 쪽에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옷은 어느새 찢어져 양옆으로 흘러내렸다.순간 민도준의 뜻을 눈치챈 권하윤은 속살이 드러난 것도 상관할 겨를이 없이 민도준의 팔을 잡았다.“제발 이러지 마세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저 민승현 약혼녀예요. 권씨 가문과 민씨 가문의 체면도 생각해야 하잖아요.”하지만 민도준은 고개를
권하윤은 민승현의 소리를 듣자마자 입술을 깨문 채 목소리를 참았다. 소리가 새어나가 상대에게 들킬까 계속 마음을 졸인 상태였다.‘그런데 힘들게 참고 있는 사람한테 인사를 하라니? 아예 마이크에 대고 생방송 하라는 소리는 왜 안 한 대?’권하윤은 화가 치밀어 올랐고 속이 뒤틀렸지만 표정에 드러내지 않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상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애초부터 상대의 사정을 봐주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입을 벌려 상대에게 들어오라고 말하려던 그때, 권하윤의 입술이 그의 입을 막았다.가는 팔은 넝쿨처럼 그의 목을 휘감았고 손톱으로 어깨를 간지럽히며 그의 환심을 얻으려 애썼다.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면서 귀엽다는 듯 권하윤의 동작을 받아들였다.하지만 권하윤이 이를 악물며 속으로 이대로만 넘어가라고 기도하고 있을 때 민도준은 그녀의 의도를 눈치챘는지 귓게에 대고 나지막하게 웃더니 고개를 들었다.“문 열렸어.”순간 권하윤은 그대로 굳어버렸다.게다가 민승현은 민도준의 말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다시 한번 노크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들어가요?”문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권하윤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습.”그런데 그때 민도준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힘 빼.”“도준 씨.”권하윤은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진 채 애원하는 듯 민도준을 바라봤다.순간 민도준은 몸이 찌릿했다. 낮게 자기 이름을 중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독약처럼 그의 마음속에서 퍼졌다.더 어두워진 낯빛과 흥분한 눈빛에 권하윤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민승현이 들어오는 게 싫어?”권하윤은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그러면 소리 내 봐.”그와 동시 민승현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형, 안에 있어요?”“…….”문을 비스듬히 여는 순간 안에서 밭은 숨소리와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민승현은 2초간 자리에 굳어있다가 곧바로 민도준이 뭘 하고 있는지 눈치채고는 헐레벌떡 밖으로 도망쳤다.“미안해요, 저 바로 나갈게
연회의 주인공인 공씨 집안 셋째 아가씨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하지만 그녀는 자기한테 인사하는 사람들에게 미소 한 번 보이지 않은 채 오만한 태도를 취했다.다행히 그녀 곁에 있는 문태훈이 분위기를 푼 덕에 어색한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손님이 떠나간 뒤 문태훈은 끝내 참지 못하고 한 마디 했다.“공아름 씨, 아무리 그래도 저 사람들 모두 경성에서 잘 나가는 가문인데 체면 좀 봐주지 그래요.”“경성 가문이 뭐라고 내가 잘 보여야 하지?”문태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름은 그의 말을 먼저 잘랐다.“그만해. 그런데 민도준은 어디 있어? 지금이 어느 때인데 아직도 안 보여?”공아름이 연회에 참석한 이유가 민도준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문태훈은 일찍부터 대신 살펴봤다.“민도준 씨도 아까 왔던데 다시 돌아갔는지 한참 동안 보이지 않네요.”“돌아갔다고?”공아름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나한테 한 마디도 없이 먼저 갔단 말이야! 설마 불여우한테 붙잡힌 거 아니야?”“아.”“뭐야? 당장 말해! 어떤 년이야?”문태훈은 결국 공아름의 등쌀에 못 이겨 사실을 털어놓았다.“아까 모델 하나가 민도준 씨한테 접근했고 얼마 뒤 권씨 집안 둘째 권희연 씨와 얘기하더니 사라졌어요.”“감히 민도준 씨한테 꼬리를 쳐? 그년들 제대로 족쳐야겠어! 권희연이라는 그년도 가만두지 못해…….”“공아름 씨. 권희연 씨는 아무리 그래도 부짓집 규수인데다 여기는 해원이 아니라 경성이에요. 아무래도 몸을 사리는 게 좋아요.”문태훈의 경고에도 공아름은 들은체 만 체 하더니 이윽고 예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졌다.“해원에 있었더라면 당장 죽여저릴 거야! 먼저 그 모델 년부터 혼내줘야겠어. 권희연인지 뭔지는 천천히 두고 보자고.”“알았어요.”문태훈은 마지못해 몸을 돌려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익숙한 이름을 듣게 되었다.…….“혹시 권하윤 봤어요?”몇 사람에게 물었지만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민승현은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다.하지만 다시 휴게
하지만 다행히도 민승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자기가 권하윤을 한참 찾아다녔다는 거에 불만인 듯했다.“옷을 갈아입으러 가면 말해야 할 거 아니야? 왜 아무 말도 없이 사라진는데! 네가 뭐라도 된 줄 알아?”시간 낭비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그의 말투는 짜증이 섞여 있었다.“아, 그때 강민정 씨와 둘이 아주 꽁냥거리고 있는 것 같아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권하윤의 한 마디에 민승현은 마지막 의심까지 씻어버리고 풉 웃었다.“네가 민정이랑 같아? 어딜 비교해?”“그렇게 나 애타게 찾으니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누가 애타게 찾았다는 거야! 난 그저…….”버럭 하며 부정하던 민승현은 결국 말문이 막혔다. 이 상황에 권하윤과 그의 둘째 형이 붙어먹은 줄로 착각해 급하게 찾았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몰라. 이제 너 죽든 말든 상관 안 해!”마지막 한 마디를 던진 채 민승현은 전화를 끊어버렸다.그제야 전화 거너 편에 있던 권하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솔직히 방금은 일부러 민승현의 신경을 자극한 거다. 그렇게 되면 그가 자기를 냉대하며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역시나 그녀의 예상이 들어맞았다.권하윤은 긴장을 풀며 모든 일의 원흉을 분한 듯 째려봤다.아직까지 민도준이 일부러 민승현을 불러낸 것에 화가 났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그런데 입에 담배를 물고 옷을 입던 민도준이 마침 그녀의 눈빛을 발견하고 뿌연 연기 뒤에서 눈썹을 치켜떴다.“아직도 모자라?”권하윤은 상대의 뜻을 바로 이해하고 눈을 피했다. 하지만 침대 위에 널브러진 옷을 보니 더욱 심란했다.“민 사장님이 제 옷 다 망가트렸는데 어떻게 배상할 거예요?”화가 너무 쌓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그녀의 반응에 민도준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빼내고 손에 쥐었다. 이윽고 침대 곁으로 다가가더니 허리를 숙이며 여자의 얼굴을 위아래로 훑었다.“어떻게 배상할까?”그 눈빛을 보니 권하윤은 방금 전의 모습이 온데간데
권하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그런데 보아하니 민도준이 그녀의 말을 믿는 눈치였다. 물론 비웃긴 했지만 말이다.이미 골치 아픈 일이 넘쳐나는 그녀로써는 한 가지라도 덜고 싶은 마음에 억지 미소를 지었다.“더 할 말 없으면 저 먼저 가볼게요.”“잠깐만.”긴 다리를 들며 막아서는 민도준의 동작에 권하윤은 할 수 없이 걸음을 멈췄다.“무슨 일이시죠?”말투도 한껏 인내심이 묻어났다. 민도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감상하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내일 내 전화 기다려.”그 말에 권하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에 민도준의 태도는 아주 명확했다. 그걸 그녀도 눈치챘고. 게다가 오늘 있은 일은 정말 해프닝에 불과한데 앞으로 또 더 만나자니 놀랄 수밖에.‘설마 계속 만나자는 건가?’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민도준은 “선심” 쓰듯 되물었다.“내가 데리러 가길 원하나?”“아니요!”권하윤은 곧바로 억지 미소를 짜냈다. 여기서 더 버티면 당장이라도 표정이 와르르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어떻게 그래요. 제가 찾아가죠.”“그래, 가 봐.”-휴게실을 떠난 권하윤의 얼굴은 아니나 다를까 바로 와르르하고 무너졌다.곧이어 욕지거리가 입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상대는 당연히 휴게실 안에 있는 민도준이었다.그렇다고 한들 크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큰 신분 차이 때문에 한껏 조심한데다가 집에 큰 변고가 찾아온 그날부터 그녀는 자기 인생이 평화와 자유가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한민혁 덕분에 같은 색 같은 기장의 비슷한 드레스로 갈아입은 덕에 그녀는 사람들의 관심을 피할 수 있었다. 존재감을 한껏 숨긴 채 사람들 사이에 숨어 있다가 연회가 끝날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비로소 연회장을 떠났다.하지만 전화상으로 그녀에게 불같이 화내던 민승현은 그녀를 집에 데려다줄 마음도 없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강민정이 그의 팔짱을 낀 채 승리자의 자태를 뽐내며 그녀를 힐끗힐끗 뒤돌아 볼 뿐.강민정은 권하윤
“그게……”권희연은 머뭇거렸다.“말하기 불편하면 말하지 않아도 돼요.”이건 두 사람의 사적인 문제이기에 그녀에게 따져 물을 이유도 권한도 없었다.“그건 아니야.”하지만 권하윤에게 미안한 감정뿐인 권희연은 있었던 일을 모두 사실대로 털오놓았다.“내가 민도준 씨한테 무례를 범했어.”“그런데 언니 치마가 왜?”“민도준 씨가 나 발로 찼거든.”권희연의 머쓱한듯한 말에 권하윤은 할 말을 잃었다.‘민도준이 권희연에게 강압적으로 관계를 요구했다고 생각했는데 민도준 말이 맞았을 줄이야.’전화를 끊은 뒤 권하윤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 의아하기도 했다.권희연은 아름다운 외모뿐만 아니라 그때 일이 있고 난 뒤 명성도 많이 높아져 전설처럼 불러지고 있다.그로 인해 그녀를 며느리로 들이고 싶어 하는 가문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권미란은 그녀의 혼인에 대해서는 한 번도 얘기하지 않고 오히려 민도준에게 접근하게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설마, 권미란이 오래전부터 권희연과 민도준을 엮으려 했나?’갑자기 뇌리를 스치는 대담한 생각에 몇 년 전 강민우가 권희연에게 약을 쓴 일도 의심스러웠다.권씨 가문은 명문가 말단에 속해 있지만 그래도 명문가라 불릴 수 있는 집안이었기에 재산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그런데 강민우의 돈과 선물을 많이 받아먹고도 모른 척해 상대를 자극했으니 더욱 이상했다. 그들이 일부러 강민우를 자극해 이 모든 일을 꾸몄다면 모를까.‘그 일로 인해 권희연의 깨끗한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더욱 각인됐고 권씨 집안 여자의 위신도 함께 올라갔으니……’권하윤은 입꼬리를 씩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보이지 않았다. ‘권씨 가문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더럽고 무서운 가문이었네.’권하윤은 차 안에서 잠시 동안 앉아 있다가 천천히 주차장을 빠져나갔다.그리고 그 시각, 불빛 하나 없는 어두운 곳에서 가슴까지 깊게 파인 V넥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가 누군가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 차에 실렸다.그녀는 버둥거리며 앞에서 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