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는 눈을 곱게 접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한꺼번에 그렇게 많이 물어보면 내가 뭐부터 대답해야 해?”그의 목소리는 아직 회복하지 않아 조금씩 갈라졌지만 권하윤의 귀에는 그 누구의 목소리보다도 듣기 좋았다.그녀는 이승우를 향해 웃고 싶었다. 애써 입꼬리를 올렸지만 눈물이 흘러내렸다.“울고 싶으면 울어. 오빠 앞에서 참을 필요 없어.”너무 오랫동안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이승우의 한 마디 말이 권하윤의 마음의 벽을 무너트렸다. 권하윤은 마치 감정이 터지기라도 한 듯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흐느껴 울었다.이승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옥시미터를 낀 손으로 권하윤의 머리를 연신 쓰다듬었다.한참 뒤 진정을 한 권하윤은 눈물을 닦으며 밖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승우에게 설명했다. 그리고 일부러 한껏 가벼운 말투로, 권씨 가문이 자신을 괴롭힌 사실은 빼놓은 채 기쁜 듯 입을 열었다.“이제 경성에 왔으니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어. 오빠도 깨어났겠다 앞으로 우리 가족 점점 행복해질 거야.”애써 미소 짓는 권하윤을 꿰뚫어 본 이승우는 아무 말도 없이 미소 지었다.이 요양원의 사람은 그들을 보호하고 치료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감시하고 있다는 걸 그는 눈치챘다. 게다가 동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자기가 깨어나면 동생이 모든 일을 제쳐두고 달려올 거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야 왔다는 건 자유조차 없다는 뜻이었다.하지만 그는 아는체하지 않았다. 그저 손을 들어 동생의 귀밑머리를 넘겨주었다.“많이 야위었네.”“오빠도 그러면서.”오빠의 관심 어린 말에 권하윤은 코끝이 찡해났다. 하지만 약간 비음이 섞인 목소리는 마치 애교 부리는 것 같았다.“그래, 오빠 많이 못생겨졌지? 우리 윤이 오빠 이제 싫어하는 거 아니야?”참으로 공교롭게도 어릴 적 가족이 그녀를 부르던 애칭도 윤이였다.아마 그녀가 권하윤이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권하윤은 이승우가 일부러 장난치는 걸 눈치채고는 입을 삐죽거렸다.“못생겨도 좋아. 오
권하윤을 바라보는 이승우의 표정은 조금 차가웠다.“너 아버지를 믿어?”“믿어. 아버지는 한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분이셔. 그런 일을 할 분이 절대 아니야.”확고한 대답에 이승우의 표정은 조금 부드러워졌다.“그거면 됐어. 아버지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면 됐어.”“그게 무슨 말이야? 그거면 됐다니? 오빠, 그때 아빠 곁에 있은 사람이 오빠니까 알 거 아니야. 아빠는 대체 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났는데? 그리고 공은채. 공씨 가문에서 그 여자의 죽음을 침묵으로 일관하는 이유가 대체…….”“윤아.”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승우의 짤막한 부름 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에는 거역할 수 없는 엄숙함이 묻어 있었다.“더 이상 묻지 마. 다 지난 일이야.”“지난 일? 아빠처럼 사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음악가가 하루아침에 손가락 받으며 누명을 쓴 채 투신했는데, 그렇게 몸이 산산이 부서진 채 돌아가셨는데 나더러 어떻게 그냥 지나가라고!”눈시울이 붉어진 권하윤을 보자 이승우는 끝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동생이 이런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었다.“윤아, 그러지 마. 오빠가 이렇게 빌게.”그 한 마디에 권하윤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기라도 하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그래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공씨 가문 때문에 살길을 찾아 죽은 척 위장까지 했으면서, 그러지 않았더라면 죽었을 거면서 진실을 안다 한들 내가 뭘 할 수 있어?’갑자기 몰려오는 무력감에 목이 메어왔다.“알았어.”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나지막하게 한 마디 꺼냈다.“휴식 잘해. 며칠 뒤에 다시 찾아올게.”그런 권하윤을 보면서 이승우는 입을 벙긋거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병실을 나가는 순간 권하윤은 올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이었다.정신을 가다듬은 뒤 곧바로 떠나는 대신 요양원 의사를 찾아가 이승우의 상태에 대해 물어봤다.사실 어머니와 여동생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요양원 사람들이 계속 다그치는 바람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고 미련이 남은 듯 고개를 돌
“하.”전화 건너편에서 곧바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변명 하나는 빨리 찾네.”그리고 권하윤에게 더 이상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고 곧바로 주소 하나를 불렀다.“20분 주지.”“20분 내에 도착하는 건 불가능…….”권하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는 끊어졌다.그 시각, 전화 건너편.“도준 형, 혹시 화났어?”한민혁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민도준은 느긋하게 소파에 기대며 핸드폰을 소파 위에 던져버렸다.“내가 화났으면 네가 거기 서있는 게 아니라 누워있었어.”“하하하…… 형도 참, 무슨 그런 말로 사람을 놀라게 해. 나 겁 많은거 알면서.”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협박에 한민혁은 헛웃음을 지었다.하지만 여전히 가타부타 말이 없는 도민준의 반응에 한민혁은 그의 표정을 슬쩍 살펴봤다.“형 하윤 씨 의심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왜 또 만나려는 건데? 그것도 여기로 불러내기까지 하고 말이야.”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에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알고 싶어?”“알고 싶긴 하지…….”약간 자신 없는 말투였다.“안는 맛이 꽤 좋거든.”“…….”“권하윤은 권희연과 달라. 그 여자는 권씨 가문에서 보낸 사람 아니야.”“어.”대답은 했지만 한민혁은 믿기지 않았다. ‘도준 형 성욕에 뇌가 절었나? 머리가 어떻게 됐나?’한민혁이 온갖 생각을 하고 있을 그때. 민도준은 마치 그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표정을 읽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동림 지역 땅을 입찰하려 한다는 소문은 냈지?”갑자기 훅 들어온 질문에 한민혁은 멍해 있더니 갑자기 정신을 차렸다. 민도준이 왜 갑자기 이 일을 입에 담는지 알 수 없지만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형이 입찰한다는 소문 슬쩍 흘렸더니 요즘 내 핸드폰에 아주 불이 날 지경이야. 전화가 아주 쉴 새 없이 와.”“그 땅 아주 큰 고기 덩어리거든. 너도 챙겨 둬.”싱긋 웃는 민도준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리만치 오싹하게 느껴져 대답을 하고 있지 않던 그때, 민도준의 다음
민도준은 오늘 검은 셔츠에 심플한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만은 여전히 사람을 압도했다.손끝에 반쯤 탄 담배를 끼운 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힐끗 확인하더니 입꼬리를 천천히 말아 올렸다.“왔네.”그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권하윤은 자기 목숨이 위협받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목이 메어왔고 다리는 추를 단 듯 무거워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어 그저 선 자리에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지 못한 것처럼 자기 옆자리를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거기 서서 뭐해? 와서 앉아.”권하윤은 마치 끈 달린 인형처럼 삐걱거리며 민도준의 명령에 따랐다.권하윤이 그의 옆 소파 위에 앉는 순간 소파가 푹 꺼져들어가며 그녀를 감싸안았다.그리고 그때, 담배를 쥔 손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담배를 쥔 손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지나는 순간 머리카락이 담뱃불에 닿아 곱슬곱슬하게 말렸다.뜨거운 온도가 귓가에 맴도는 바람에 권하윤은 꼼작도 못하고 자리에 얼어붙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민도준이 자기를 재떨이로 쓸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였다.뜨거운 손길이 볼을 타고 점점 올라가자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그때, 손은 그녀의 눈꺼풀에 살짝 닿았다.“울었어?”민도준의 한마디에 권하은 몸을 흠칫 떨더니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마침 민도준의 장난기 섞인 눈과 마주했다.“나 만나러 오기 그렇게 싫었어?”“그런 거 아니에요.”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부인했다. 그리고 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아주 처참한 결과를 맞이할 거란 직감에 다시 입을 열었다.“오전에 다른 일 때문에 운 거예요.”“민승현 때문이야?”눈썹을 치켜뜨며 물어오는 민도준의 물음에 권하윤은 부인하지 않았다. 좋은 방패막이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게 바보니까.하지만 그녀의 거짓말을 민도준은 한눈에 알아차렸다.그리고 마치 불만이라도 표하는 듯 손을 움직였고 갑자기 어깨에 전해지는 통증에 권하윤은 어깨를 움츠렸다. 순간 뜨거운 담뱃불
“무슨 일이에요?”권하윤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었다.하지만 민도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옷을 입었다.“여기서 기다려.”그 말에 권하윤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짧은 시간 내에 일어나는 건 그녀에게도 무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손끝이 옷에 닿았을 때 민도준이 한 마디 보충했다.“옷은 입을 필요 없어.”“…….”민도준이 떠나간 뒤 공기는 유난히 조용했다.하지만 권하윤은 민도준의 명령을 무시한 채 바닥에 널린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었다.민도준은 뭐 하러 가는지 말하지 않았지만 권하윤은 언뜻 “도망쳤다”, “사라졌다”라는 단어를 들었다.하지만 남의 일에 파고드는 성격이 아닌지라 그녀는 자기와 상관없는 일이라며 무시해버렸다.게다가 아까까지만 해도 몰랐는데 평정심을 되찾자 권하윤은 그제야 목이 말르다는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곧바로 방 안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방 안을 아무리 찾아봐도 도수 높은 양주와 잠겨 있는 금고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물을 직접 찾아야겠다는 생각에 권하윤은 방문을 나섰다.그녀가 있는 층은 아래층보다 많이 조용했다. 게다가 문과 벽이 온통 검은색으로 되어있는 데다 문고리가 없어 제대로 보지 않으면 문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였다.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본 순간 권하윤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길게 뻗은 복도에 똑같은 방이 여러 개 놓여 이곳을 떠나는 순간 다시 찾아오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까.하지만 그녀가 다시 방으로 돌아가려 할 때, 인영 하나가 갑자기 어딘 가에서 튀어나왔다.“권하윤 씨, 혹시 무슨 시키실 일 있습니까?”깜짝 놀란 권하윤은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찾아봤지만 눈앞의 사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남자는 짧은 스포츠머리에 옷이 터질듯한 근육질 몸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반쯤 걷어올린 옷소매 아래로 커다란 문신이 보였다.그 모습에 순간 눈앞이 어질해난 권하윤은 최대한 예의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혹시 물 있어요?”“네.”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바닥에 꿇어앉은 여자애를 보고 있자니 권하윤은 옛 기억이 떠올랐다. 자기가 바닥에 꿇어앉 아 애원하던 그때 그 기억이.하지만 자기의 옷자락을 움켜잡고 애원하는 여자애의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끄집어냈다.“저 언니 방에 잠깐만 숨어 있게 해줘요. 절대 언니한테 피해 주지 않을게요. 저 정말 너무 무서워서 그래요.”잔뜩 여윈 얼굴로 애원하는 그녀의 모습은 보면 볼수록 불쌍했고 동정심을 자극했다.하지만 권하윤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는 순간 여자애는 자기가 성공했다는 걸 직감했다.“언니, 도와줘요.”“여기 있고 싶지 않다면서 왜 펜트하우스까지 올라왔어?”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묻는 권하윤의 말에 여자애의 눈에 싸늘한 빛이 언뜻 지나가더니 고개를 돌려 로건이 떠난 방향을 힐끗 쳐다봤다.솔직히 그녀는 권하윤을 속여 방으로 들어가 로건을 따돌릴 생각이었다.그러지 않으면 로건이 돌아와서 권하윤이 죽은 걸 보면 그녀는 쉽게 빠져나가지 못할 테니까.생각을 정리한 여자애는 다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권하윤을 바라봤다.“밖에는 사람들이 지키고 있어서 도망치지 못했어요. 언니도 저와 같은 여자애잖아요. 그러니 한 번만 도와줘요. 저 정말 어렵게 저들의 눈을 피해 여기까지 온 거예요. 저 몸 파는 일 하고 싶지 않아요.”권하윤은 그 말에 눈살을 구겼다.원혜정에게 한번 당하고 나니 아무 조건 없이 낯선사람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하지만 이 말이 모두 진짜라면? 만약 나의 불신이 여자애의 유일한 탈출 기회를 망친다면…….’게다가 같은 여자애로서 한 번만 도와달라던 여자애의 말에 권하윤은 이미 마음이 동했다. 때문에 애원하며 도움을 청하는 여자애를 그녀는 무시할 수 없었다.“그래. 들어와.”권하윤의 말에 여자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해댔다.“언니 정말 고마워요. 제가 여기에서 도망치면 앞으로 언니를 제 생명의 은인으로 대할게요.”그리고 권하윤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기 바쁘게 방 안에 놓인 금고에 눈을 고정했다.참 공교롭게도 그녀
방금 전.권하윤이 물을 받아들면서 로건에게 입 모양으로 10초 뒤에 들어오라는 사인을 보냈다.그리고 문이 닫기는 순간 여자애는 역시나 그녀를 공격해왔다.하지만 미리 준비하고 있던 권하윤은 단번에 피했고 그녀가 다시 공격해 오려 할 때 로건은 말없이 들어와 그녀를 제압했다.“대박이네요.”한민혁은 과정을 들은 뒤 권하윤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말했다.“역시 도준 형의 여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니까.”두 사람의 관계가 그렇게 대놓고 폭로되자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민도준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은 듯 손가락을 까닥거렸다.“이리 와.”권하윤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끝내 결심을 내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다쳤어?”팔을 만지작거리며 묻는 민도준의 말에 권하윤은 고개를 끄덕였다.“살짝 스쳤어요,”여자애가 보통내기가 아니라 조금 다치는 것도 어찌 보면 정상이었다.하지만 민도준은 바닥에 묶여 있는 여자애를 흘깃 스쳐보더니 로건에게 고개를 까닥 움직였다.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린 로건은 나이프를 들어 여자애의 팔 위 똑같은 위치에 상처를 냈다.당연히 살짝 스친 권하윤보다는 심각하게 난 상처에 여자애는 낮게 신음했고 어느새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데려가서 처리해.”민도준이 손을 저으며 명령을 내리자 여자애는 곧바로 끌려갔다. 하지만 끌려가는 도중에 권하윤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불만이 가득했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눈치였다.분명 믿은 것 같은 눈치였는데 갑자기 자기를 곤경에 빠트린 권하윤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의문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이제 그걸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었다.-“아.”솜이 상처 위에 닿자 권하윤의 입가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참아.”하지만 민도준의 동작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사정없는 그의 동작에 견딜 수 없었던 권하윤은 끝내 나긋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해달라고 할게요.”“그래.”‘민도준이 이렇게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라고?’권하윤은
“우리 관계, 더 이상 지속하면 안 될 것 같아요.”더 이상 얻을 게 없는데 자기 몸까지 바쳐가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물론 민도준과의 관계에 점점 매료되고 있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까지 스스럼없이 그 행위를 지속하려는 남자를 봐왔던 그녀로서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다.경성에서 명성이 자자한 민도준은 아무리 그런 소문이 터져도 그를 뭐라 말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지만 그녀는 아니다.그녀는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살 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고 그 어떤 실수도 용납될 수 없었다.때문에 눈앞에 기회가 찾아온 지금 이 관계를 끊어버리는 게 맞았다.그녀의 요구를 들은 민도준은 눈썹을 치켜뜨더니 입을 열었다.“이젠 나랑 관계 유지하는 게 싫다는 건가?”“아무래도 저는 민승현 약혼녀 신분이기에 이런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닌 듯싶습니다.”남자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할까 봐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지만 민도준은 재미를 잃었는지 여느 때보다도 차가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나가.”아까와 같은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주위에는 위험하고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권하윤은 자기가 민도준의 흥미를 깨트렸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것 역시 그녀가 원하던 결과였다.때문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권하윤 씨?”구석에서 로건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한민혁은 권하윤을 보자 놀란 표정을 지으며 핸드폰을 들여다봤다.‘고작 10분이 지났는데 끝났다고? 도준 형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다고?’권하윤은 그가 오해했다는 걸 눈치채고는 끝내 참지 못하고 마지막으로 민도준의 편에 서서 말했다.“저 상처 치료 다 했으니 이만 가볼게요.”그제야 한민혁은 뭔가 알아차린 듯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아하, 하윤 씨 다쳤었죠? 하하하, 이번에 하윤 씨 공이 컸어요.”하지만 갑자기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참고 있더니 끝내 입을 열었다.“저기, 혹시 질문 하나 해도 돼요?”“뭔데요?”“그 계집애가 잡혀가고 나서 계속 자기가 하윤 씨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