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은 경성을 떠나던 날 자신에게 육신만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황야로 추방된 기분이었다.케빈은 시윤을 아가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그의 인생에서 유일한 아가씨는 단 한 사람뿐이었다. 다행히도 시윤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도준이었다. 시윤은 케빈보다 더 대담했다. 그녀는 도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런 남자는 다가가기만 해도 산산조각이 날 수 있는데 더구나 그와 얽히려 하다니.하지만 이런 일은 케빈과 상관이 없었다. 시윤을 따르던 중 케빈은 자신을 대신한 남자가 송민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송민우는 시영에게 어울리지 않지만 그래도 정상적인 사람이다. 시영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다. 또한, 시영이가 인간 세계로 돌아가는 입장권이기도 했다.케빈은 자신의 후반생이 이대로 끝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민재혁이 그를 찾아왔다.비록 케빈이 시영에게 손댄 사람들을 죽였지만 민용재 일가는 여전히 그때의 동영상을 빌미로 케빈을 위협했다. 그래서 케빈은 이번에 자기 손으로 모든 것을 완전히 끝내기로 했다.사실 케빈은 감옥에 갈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용서받을 기회를 너무나 필요로 했기에 스스로 자수했다. 케빈은 시영의 마지막 칼이 되어 자신의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인생을 끝내려 했다.하지만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시영이가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시영은 생각했던 것처럼 평온하게 지내지 않았다. 시영은 화를 내며 케빈의 생각을 지적했고 죽으려는 케빈을 막아 나섰다.왜...자신은 이렇게 썩어빠진 존재인데 시영은 왜 여전히 자신을 살리려는 걸까. 혹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걸까......쿵-천둥소리가 울리며 시영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누군가가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눈을 뜨자 케빈이 보였다.케빈이 돌아왔다.시영은 어둠 속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케빈은 떼어내려 했지만 끈질기게 시영에게 붙어있는 독종 같은 존재였다.케빈이가 떠난
몇 분 후, 케빈이 돌아왔다. 그는 문 앞에 서서 손을 내리고 있었다.시영은 말없이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가슴속의 공허함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감을 느꼈다. 시영은 케빈의 검은색 정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상의 벗어.”케빈은 외투를 벗었다. 속에 입은 하얀 셔츠에는 이미 피가 배어 있었다. 그것은 어젯밤 채찍에 맞은 상처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 물에 젖었고 치료하지 않아서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시영의 허락이 없었기에 케빈은 스스로 상처를 치료할 수 없었다. 셔츠를 벗을 때 피부가 당겨지면서 케빈의 이마가 잠시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한순간에 외투를 벗어던졌다.“이리 와.”시영은 발끝으로 바닥을 가리켰다. 케빈은 순종적으로 다가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다.시영은 의약 상자를 열고 알코올과 과산화수소를 훑어보았다. 그리고 알코올을 집으려다 잠시 멈추고 과산화수소를 집어 들었다.차가운 액체가 상처에 닿는 순간 케빈은 본능적으로 이를 악물고 고통을 기다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시영이가 사용한 것은 알코올이 아니라 과산화수소였다. 상처에서 거품이 이는 것을 보며 케빈은 놀란 표정으로 시영을 한 번 쳐다보았다. 케빈은 그녀가 실수한 줄 알았다.“아가씨...”“닥쳐!”시영은 거칠게 상처를 소독한 후 가정의를 불러왔다. 그사이 시영은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가정의는 케빈의 몸에 종종 나타나는 상처에 익숙해졌지만 그의 조수인 청순한 소녀가 숨을 내쉬었다.“이렇게 심한 상처를 입다니, 경찰에 신고해야 하지 않을까요?”가정의는 그녀를 꾸짖었다. “헛소리하지 마.”소녀는 입을 삐쭉 내밀더니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치료를 마친 후 방에서 나온 가정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곳에서 의사로 일하려면 벙어리가 되는 법을 배워야 해. 알겠어?”“삼촌, 너무 하시는 거 아니에요? 의사로서 환자를 걱정하는 게 뭐가 잘못이에요?”가정의는 소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넌 책만 봐서 바보가 된 거야. 어쨌든, 기억해. 말은 적게 하고 참견도 적
민지가 떠난 후 케빈은 문을 닫고 침실 앞으로 가서 두 번 두드렸다.“아가씨.”침실 안에서는 오랫동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케빈은 다시 두드리지 않았다. 오랜 침묵 끝에 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기분이 안 좋으니까 꺼져.”케빈은 팔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방 안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시영은 이 보름 동안 채찍질을 제외하고는 케빈에게 모질게 대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무릎을 꿇는 케빈에게 뺨을 몇 대 때리는 정도였고 예전처럼 고문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다.케빈은 시영의 태도가 예전과 다름을 느꼈다. 그가 느낀 것은 기쁨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한 번 버림받은 적이 있는 케빈은 이번이 두 번째 예고일까 봐 두려웠다.지난번 시영이가 그를 버리며 한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개처럼 말을 잘 듣네. 정말 재미없어.”시영이가 또다시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까 봐 너무 두려웠던 것이다.그래서 오늘 케빈은 시영의 명령을 일부러 조금 늦게 수행했고 그 결과 처벌을 받았다.고통이 밀려오는 순간 케빈은 오히려 마음이 놓였다.하지만 케빈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시영이가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영은 더 이상 상처로 그를 괴롭히는 데 흥미가 없었고 그더러 스스로 의사를 찾아가 치료하도록 했다.시영이가 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속죄할 수 있을까....이튿날.시영이가 회사에 가보기로 했기에 케빈은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타려 했으나 시영이가 입을 열었다. “기사를 불렀으니 이만 돌아가.”케빈은 잠시 어리둥절했다. “전 아가씨의 안전을 지켜드려야 합니다.”시영은 비웃으며 말했다. “지금 누가 나를 해치겠어?”케빈은 말문이 막혔다. 시영의 현재 지위에서는 아무도 그녀를 해칠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케빈 역시 쓸모가 없어졌다.케빈은 그 자리에 서서 시영의 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그 오랜 시간 동안 케빈은 매일 시영과 함께 했고 대부분의 시간을 그림자처럼 시
시영이가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자 케빈은 방 문을 열었다. 이때 문 앞에 앉아 있던 민지가 벌떡 일어섰다. “하하! 저한테 딱 잡혔죠!”가벼운 목소리가 케빈의 기억을 자극했다. 케빈의 눈앞에는 소녀가 그의 앞에 뛰어와 치마를 휘날리던 모습이 떠올랐다. “케빈 오빠, 어디 갔었어? 드디어 찾았네.”케빈이가 잠시 정신을 잃은 동안 민지는 이미 그를 지나쳐 그의 방을 보았다. 민지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이런 곳에서 지내셨던 거예요?”어두운 방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심지어 전등조차 비어 있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해 방안에는 곰팡이 냄새와 먼지 냄새가 섞여 있었다. 민지는 직접 보지 않았다면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민씨 저택에 이런 곳이 있을 줄 몰랐을 것이다.민지가 자세히 살펴보기도 전에 케빈은 문을 닫고 그녀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민지가 따라오며 물었다. “케빈 씨는 시영 아가씨의 보디가디 아닌가요? 그렇다면 케빈 씨의 지위가 가장 높을 것인데 왜 이런 곳에서 지내는 거죠? 그리고 몸의 상처는...”민지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눈을 크게 떴다. “설마 시영 아가씨를 화나게 하신 거예요?”민지는 케빈의 냉랭한 눈빛을 발견하지 못한 채 계속 말했다. “시영 아가씨처럼 친절하시고 젊은 나이게 백제 그룹의 부대표이신 분이 사람을 이렇게 때릴 리가 없잖아요. 그럼 직장 내에서 따돌림당하신 거예요?”케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민지는 그의 앞을 막아섰다.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케빈은 차가운 눈빛으로 민지를 쳐다보았다. 그가 무언가를 하려던 순간 옆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그쪽이 구민지 씨인 거죠?”시영이었다.그녀는 방금 회사에서 돌아온 듯 옅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회색 바지 아래에는 구두를 신은 모습이었다. 시영은 당당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민지는 말로만 듣던 민씨 가문의 아가씨가 자신에게 이렇게 친절하게 이야기를 하자 격동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네, 제가 바로 구민지입니다. 제 삼촌이 민씨 저택의 가정의
이 말을 듣자 시영이가 와인 잔을 잡던 손이 잠시 멈췄다. 시영은 태연하게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주길 바라는 거죠?”민지는 완전히 시영의 매력에 빠져있었기에 케빈의 상처가 그녀와 관련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본 것을 모두 말해 주었다. “케빈 씨는 아가씨의 개인 경호원인데 살고 있는 방은 너무 초라해요. 게다가 온몸에 새로운 상처와 오래된 상처가 겹쳐 있어요. 분명 누군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어요. 케빈 씨는 너무 불쌍해요. 아가씨께서 좀 도와줄 수 없을까요?”방 안은 몇 초간 고요했다.시영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올라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마치 한 겹의 안개가 낀 것처럼 속을 알 수 없었다. 시영은 케빈을 쳐다보며 말했다. “케빈, 민지 씨가 그렇게 걱정하니 방을 옮겨서 지내도록 해. 그리고 앞으로는 민지 씨가 너의 상처를 책임지게 될 거야.”케빈은 당황한 기색을 보이더니 다시 버림받을 것 같은 공포가 다시 그를 휩쓸었다. 케빈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고마워요, 아가씨!” 민지는 두 사람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케빈을 대신해 시영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케빈이 입을 열기도 전에 시영은 냅킨을 들어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케빈, 이제 필요 없으니 이만 가서 쉬어.”케빈은 감히 시영의 명령에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민지는 케빈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고개를 돌리자 시영은 미소를 지으며 농담하듯이 물었다.“민지 씨는 케빈에게 관심이 있나 봐요?”민지는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케빈 씨는 정말 신비로운 분인 것 같아요.”신비로운 남자는 천진난만한 소녀에게 가장 매력적이다. 시영은 민지를 보자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민지는 말문이 터져 흥미진진하게 물었다.“케빈 씨는 원래 이렇게 말이 없나요?”시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가에 지금과는 다른 미소를 띠었다. “네, 케빈이 처음 제 경호원이 되었을 때 제가 일부러 하루
시영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하긴 네 비천한 목숨을 살려줬으니까 감사하긴 해야지.”시영은 다리를 흔들며 천진난만한 소녀의 모습을 보였지만 눈에는 숨길 수 없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참, 내가 너에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 줬어. 맘에 드는지 함께 가서 보자.”케빈이 막 일어서려는 순간 시영은 발을 그의 상처투성이인 등에 올렸다. “네가 개라는 걸 잊은 거야?”케빈은 더 이상 고개를 들지 않고 천천히 기어 나갔다.시영은 이미 가정부들을 물러가게 했다. 케빈의 체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녀가 개를 훈련시키듯 자신의 보디가드를 훈련시키는 것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곧 방에 도착했다.시영은 방으로 들어간 뒤 손으로 문을 스치며 뒤돌아 케빈에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들어?”어두운 방에는 한 줄기 빛도 없었고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좁은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케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에 듭니다.”“그래, 그럼 앞으로 여기가 네 방이야. 매일 밤 여기서 자야 해, 알겠어?”“알겠습니다.”이곳은 마치 케빈의 전용 감옥처럼 어둠을 가득 담고 시영의 마음속에 드러낼 수 없는 또 다른 면을 담고 있었다. 시영을 보지 못할 때 케빈은 여기 누워 있어야만 안심이 되었다.하지만 지금 모든 것이 변했다. 그 불안함은 마치 케빈의 목을 움켜쥐는 손처럼 그를 죽도록 두려워하게 했다. 케빈은 허공에 손을 뻗어 목을 움켜잡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만약 시영이 그를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분명 그가 잘못한 것 때문일 것이다.케빈은 나무토막을 구해 자신의 방 창문을 하나씩 막았고 가구를 모두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그는 행복을 느낄 수도 누릴 수도 없다. 케빈은 날마다 속죄해야 하고 시영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케빈은 민지가 약을 갈아주는 것을 거절하고 팔의 상처가 아물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써갔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가 시영과 유일하게 연결된 상처였기 때문이다.여름이 되자 날이 더욱 길어지고 더 견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