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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도둑이 제 발 저리다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

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

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

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

“콜록콜록…….”

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볼만하군.’

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민승현:?]

[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

[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

‘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

“어디 가려고?”

“저 돌아가야 해요.”

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

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

“…….”

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

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

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자의 모습을 감상했다.

백화점의 환한 불빛 때문에 권하윤의 꼴은 여실히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그 모습이 스스로도 부끄러웠는지 권하윤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외투 좀 빌려줄 수 있어요?”

잘생긴 얼굴에 살짝 웃음기가 띄었다. 민도준의 얼굴에 미소까지 더해지자 눈이 정화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입술을 비집고 나온 한 마디는 사람 속을 긁었다.

“내 외투 이미 그쪽한테 줬던 거 같은데.”

그제야 민승현 집에서 남자가 외투를 벗어줬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렇다는 건 그 외투가 민승현 집에 있다는 뜻이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어.”

민도준은 깜짝 놀라는 권하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쌩 떠나버렸다. 그가 떠나간 자리에 매캐한 배기가스를 맞은 권하윤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콜록콜록…….”

순간 욕지거리가 입을 비집고 나올 뻔했지만 권하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그저 머리를 풀어 키스마크를 덮은 채로 낯 두껍게 안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한편, 차 안에서 민도준은 입꼬리를 씩 올렸다.

전화를 받는 목소리도 평소와 달리 살짝 편안해 보였다.

“말해.”

“우리가 형 4시간 넘게 기다렸어. 준비까지 싹 마치고 기다렸더니 왜 나타나지 않는 건데? 대체 올 거야 말 거야?”

민도준은 힐끗 시계를 봤다.

‘그 여자한테 4시간이나 시달렸을 줄이야.’

“안 가. 필요 없어졌어.”

한민혁은 이내 품에 안겨 있는 여자를 밀어내더니 조용한 곳으로 향했다.

“뭐야? 누구야? 설마 4시간이나 한 거였어?”

“권씨 가문 딸.”

“헉!”

“뭐? 형 설마 상대한테 약 먹였어?”

적잖이 놀랐는지 한민혁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졌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민도준이 오히려 언짢은 듯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야, 꺼져! 내가 강민우 그 새낀줄 알아?”

강 씨 가문 첫째인 강민우는 예전에 권씨 가문 둘째를 한 달 안에 따먹을 거라며 내기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차도 사주고 보트도 사주고 이것저것 다 가져다 바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결국 돈도 잃고 사람도 차지하지 못한 그는 화가 난 나머지 상대에게 약을 사용했고 상대는 끝까지 굴복하지 않으려고 3층에서 뛰어내려 다리 하나가 부러지기까지 했다.

그 일은 일파만파 퍼져 강민우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권씨 집안 여자들은 정조대를 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난 적 있다.

때문에 상대가 권씨 가문 딸이라는 소리에 한민혁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누군데? 설마 그 둘째야? 아니면 넷짼가? 아닌데? 넷째는 민승현과 약혼도 했잖아!”

“천천히 맞춰. 나 끊는다.”

“어허! 기다려봐 형, 형님, 끊지 말아 줘요!”

민도준이 끝까지 입을 열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한민혁은 포기할 수 없었다.

“형 그러면 상대한테 얼마 줬는데?”

“뭘?”

“당연히 돈 아니면 보석이지 뭐겠어.”

“골칫거리 하나 선물해 준 것도 속하나?”

“?”

한편 고급 빌라 안에서 민승현은 고급 정장 외투를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몇 번 밟았다.

“걸레 같은 년! 감히 집에 딴 남자를 들여? 날 아주 죽은 사람 취급하네?”

그는 권하윤을 좋아하지 않지만 배신은 참을 수 없었다.

남자의 그런 반응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강민정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솔직히 민승현더러 함께 집에 오자고 한 건 그녀였다. 사과의 명목으로 권하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런 의외의 소득이 있을 줄이야.

그녀는 이내 민승현의 팔을 두르며 애교를 떨었다.

“오빠, 화내지 마. 새 언니 친구가 흘리고 간 걸 수도 있잖아.”

그러면서 시선이 시계를 향했다.

“그런데 이렇게 늦었는데 아직도 안 들어오고 방금 전화도 꺼버리고, 설마 위험한 건 아니겠지?”

“위험하긴 뭐가 위험해? 아마 다른 놈이랑 뒹구느라 늦게 들어오는 거겠지!”

하지만 그때, 마침 문이 열렸다.

시간은 정확히 민승현이 전화 온 시각부터 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언니, 왜 이제야 왔어요? 오빠랑 제가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강민정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여상스럽게 행동했다.

활발하고 애교 많은 성격에 매번 언니 언니 부르며 살갑게 굴어왔기에 민승현에게 아무리 붙어있어도 그저 어린 동생으로 여겨왔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은 뒤 다시 마주하려니 두 사람이 몸을 섞던 모습이 계속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왔다.

그녀를 두르고 있는 손이 몇 시간 전 민승현의 등을 훑던 걸 생각하니 몸이 부르르 떨렸다. 때문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강민정을 밀어냈다.

“네, 일이 좀 있어서요.”

생각지도 못한 권하윤의 행동에 강민정은 흠칫 놀라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혹시 제가 오빠 불러냈다고 화난 거예요? 미안해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욕실에서 샤워하다가 넘어져서 할 수 없이 전화한 거예요.”

권하윤은 어이없는 변명에 입꼬리를 올렸다.

“괜찮아요. 오빠 동생 사이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그때 외투 하나가 그녀에게 날아왔다.

“내가 여동생 돌보는 건 당연한 일 아니야? 네가 뭔데 괜찮다 괜찮지 않다 하는 건데? 그 전에 그거나 좀 설명해 보지?”

익숙한 냄새가 배어있는 외투가 머리를 덮자 순간 권하윤은 다시 좁은 차 안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언뜻언뜻 스치는 몇몇 장면들 때문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허둥지둥 옷을 잡아끌었다.

그 순간 민승현이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그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씨발, 너…….”

하지만 채 말을 끝내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멈칫 굳어 의아한 듯 권하윤을 살폈다.

자기 몸을 훑는 민승현의 행동에 권하윤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었다.

‘방금 집에 들어서기 전 검사도 해보고 흔적을 옷으로 꽁꽁 가렸는데 설마 들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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