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문주는 처음부터 자신의 어머니 때문에 그녀의 아버지가 죽을 뻔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사실을 그녀한테 말하지 않았을 뿐이지. 그녀와 함께 아버지 앞에서 연기를 한 것도 그녀가 안타까워서가 아니라 제 어머니가 저지른 잘못을 조금이라도 더 줄일 수 없을까, 해서였다. 필경 그녀의 아버지가 정말로 죽게 되면 자신의 어머니가 법적 책임을 일부라도 지게 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니까 말이다. 조수아는 온몸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그나마 며칠간 남자한테 쌓였던 일말의 호감도 방금 전의 말과 함께 연기처럼 사라지는 기분이
하지만 조수아는 하나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흐르는 피를 본 연성빈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수아야, 어서 손 펴!”연성빈이 그녀의 주먹을 풀려고 할 수록 조수아의 손에 힘이 더 크게 실렸다. 결국 연성빈은 살살 달래는 지경에까지 갔다.“수아야, 내 말 들어. 빨리 주먹 펴. 그 영상이 없어도 내가 송사에 이길 수 있게 도와줄게.”드디어 조수아가 주먹을 폈을 땐 이미 핀이 살갗에 완전히 파묻힌 뒤였다. 연성빈은 심장이 조여지는 것처럼 아파왔다. 주머니에서 휴지를 꺼낸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수아는 육문주의 얼굴을 향해 뺨을 날렸다. 힘이 많이 실린 건 아니지만 지극히 모욕스러운 한 방이었다. 육문주가 누구인가. 그는 B시에서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인물이자, 누구도 감히 건드릴 자가 없는 대마왕 그 자체였다. 또한 육 씨 가문의 냉혈무정한 황태자였다. 그런 육문주에게 뺨은 고사하고, 그의 면전에 대고 안 좋은 소리를 해도 죽음의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허연후는 저도 모르게 조수아를 대신해서 손에 땀을 쥐었다. 육문주를 단단히 잡은 그가 좋은 말로 친구를 달래기 시작했다.“문주야, 조수아 씨 술 많이 마셨어.
육문주의 키스는 짧았으나 소유권을 주장하는 기세가 강렬했다. 조수아의 입술을 잘근 씹은 그가 야릇한 목소리로 말했다.“착하지. 나랑 같이 집에 가자.”허리 숙여 조수아를 안아든 육문주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연성빈을 보며 말했다. “이제 제 여자인 걸 알았죠?”말을 마친 그는 연성빈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밖을 향해 걸었다. 허연후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제 친구가 끼를 부리기 시작하면 아무리 자신이어도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오지 못한 얼굴로 허연후는 연성빈의 어깨를 두
육문주를 못 본지도 벌써 며칠째다. 남자는 송미진을 데리고 외국으로 출장을 나갔다. 송미진은 매일마다 사내 커뮤니티에 사진을 올렸고, 그 사진 속에는 모두 육문주의 모습이 있었다. 조수아와 육문주가 사실은 사귀는 사이라던 소문이 저절로 사라지고, 대신 육문주와 그의 오랜 사랑인 송미진이 결혼하는 날이 멀지 않았다는 소문이 자리했다. 개중에는 특별히 안혜원에게 그 소문의 진실성을 물은 사람도 있었다. 안혜원은 긍정하지도,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았다.조수아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그저 가십거리를 들은 셈치고 그저 웃고 넘겼다.
그 정도면 태아의 심장소리도 들렸겠지?기억을 더듬는 조수아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갔다. 침대가에 앉은 그녀는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물끄러미 아이를 쳐다봤다. 너무 정신을 집중한 나머지 다른 사람이 방에 들어서는데도 조수아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아이와 조수아를 번갈아 본 송미진이 웃으며 말했다.“아이 엄청 귀엽네요. 조 비서님도 아이 좋아하시죠?”조수아는 머리도 들지 않은 채 덤덤하게 답했다.“제가 아이를 좋아하든 말든 송미진 씨랑은 상관 없잖아요.”“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조 비서님께서 나중
아이의 얘기가 나오자 조수아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힘껏 육문주를 밀친 그녀는 반동에 의해 뒤로 몇 발자국 밀려났다. 씁쓸한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사람을 잘못 찾은 것 같습니다, 대표님. 대표님께서 사랑하시는 분이 지금 윗층에 계시거든요. 아이를 낳고 싶으시거든 그분 찾아가세요. 저는 죽어도 대표님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으니깐요.”말을 마친 조수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별장 뒤 정원으로 향했다.이 얼마나 황당하고 웃긴 현실이란 말인가.육문주와 송미진이 협심하여 자신을 농락하는 모습에 조수
조수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의 의식이 몸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잠기면서 흩어져갔다. 잠시 뒤, 그녀는 누군가가 제 몸을 강하게 끌어안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호흡을 나눠주는 감촉까지도.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육문주의 잘생긴 얼굴을 발견했다. 그의 얼굴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점철된 것 같았다. 제가 만들어낸 환상을 비웃을 힘조차도 그녀에겐 더 이상 남지 않았다. 조수아의 의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육문주는 조수아의 얼굴을 감싸쥐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인공호흡을 했다. 그리고 이따금씩 그녀의 얼굴을 살짝 치기도 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