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호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무조건 여자들만 고생한다고 그래?”원경릉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혼인은 여자가 전적으로 손해지. 남존여비 사회에서 남편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업으로 삼아야 하고, 그나마 출세할 수 있는 방법은 애 낳는 방법 밖에 없는데 이것도 첩들하고 경쟁해야하고! 남자들은 진정한 사랑을 눈곱 만치도 몰라.”우문호는 말문이 막혔다. 이게 무슨 무논리인가? 무엇을 업으로 삼고? 무슨 경쟁? 또 무슨 근거로 남자가 사랑을 모른다고 말하는거지? “본왕이 뭘 모른다는거냐?” 우문호의 눈썹 사이의 흉터가 일그러졌다. “뭘 안다는거죠? 만약에 당신이 주명취랑 결혼했다고 치고 평생 그녀를 위해 첩을 두지 않을 겁니까?”원경릉이 물었다. “본왕이 첩을 두든 말든 너랑은 무슨 상관이고, 왜 갑자기 주명취를 들먹여?”“툭 까놓고 애기해보자구요. 당신은 그 여자를 위해서 평생 첩을 들이지 않을건가요?”“주명취는 너랑 달라. 그녀는 너처럼 논리 없는 사람이 아니다.”“그래, 논리! 논리있는 주명취는 아마 친히 당신에게 첩을 소개해줄 수도 있겠네요. 내가 묻고 싶은건 당신이 한 여자와 평생 살고 싶으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거에요!”원경릉은 남존여비 사회에서 나고 자란 남자에게 마치 이혼 연애 상담 전문가라도 된 듯 쏘아붙였다. 그녀는 연애 관련 글을 읽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시공간을 초월하기 전 그녀의 조교였던 에이미가 그런 글들을 많이 읽고 그녀 앞에서 사랑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에이미는 뚱뚱한 대학원생으로 아직 키스도 한번 못해 본 모태솔로이다. 하지만 에이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도 언젠가는 꼭 반쪽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한참을 쏘아 붙이던 원경릉은 지쳤다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잠을 청했다. 우문호는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도대에 누가 한 사람만을 바라보며 산다는 말인가? 본래 첩을 두는 것은 자손 번
원경릉은 밖으로 나와 크게 심호흡을 했다. 밖에는 야간 수위를 하는 태감이 있었는데, 원경릉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지금 시진은?”“왕비님 돌아가시지오. 자시(밤 11시~오전 1시)가 막 지났습니다.”원경릉이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문 앞에 걸려 있던 풍등의 불빛으로 마당을 어슴푸레했다. 그녀는 몇 걸음 걸어 마당 밖 가까운 목련나무 아래에 앉았다. 쥐 죽은 듯 고요하다. 벌레가 내는 소리, 개구리의 울음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원경릉은 눈을 감고 자연의 소리를 즐겼다. 잠시 후, 천천히 눈을 뜬 그녀가 깜짝 놀라 수풀을 보았다. 벌레와 개구리가 우는 소리를 놀랍게도 그녀가 이해할 수 있었다. 푸바오의 말을 알아들는 것 자체도 그녀에게 큰 충격이었는데, 지금은 벌레나 개구리와도 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설마 내가 죽었다 살았난 걸까? 아니면 혹시 내가 귀신인가? 세상에 귀신이 존재한단 말인가?원경릉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귀신에게 쫓기듯 궁 안으로 뛰쳐 들어갔다. 탕양과 서일은 그녀의 다급한 발걸음에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허둥지둥 침상으로 오르더니 다급하게 이불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에서 깬 우문호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왜 그러느냐?”원경릉은 그에게 가깝게 붙었다. “무서워!”“뭐가 무섭느냐?” 그는 원경릉이 덜덜 떨고 있는게 느껴졌다. 그녀는 이불 속으로 머리를 파묻고 혼란스러워했다. 이유 모를 두려움이 그녀를 휘감았다. 차가운 손이 그녀의 떨리는 손을 잡았다. 까칠한 손바닥과 길쭉한 손가락이 그녀의 손을 꽉 잡는 것이 느껴졌다. 원경릉은 그의 손에서 강한 힘을 느꼈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그녀의 마음을 끌어내려 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문호가 그녀를 비웃을 줄 알았는데 이런 따뜻한 행동을 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머리를 천천히 이불 위로 들어올리며 그녀의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녀는 연약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우문호
원경릉은 잠에 들었다. 이후에 그녀는 어떻게 우문호 곁에서 울다 잠이 들수 있었을까? 생각하다가 우문호의 몸에서 난 소독약 냄새가 마음에 안정을 가져다준게 아닐까 라고 결론을 내렸다.다음날, 그녀는 오랜만에 단잠으로 원기가 회복된 것 같았다.원경릉이 고개를 들자 우문호의 까만 눈동자가 보였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좋은 아침!”“네가 자는 내내 침을 질질 흘려서 내 소매가 이리 더러워졌다.”“엇! 미안해!” 원경릉은 우문호의 소매가 젖은 것을 보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랐다. 우문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원경릉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니 탕양과 서일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들이 준비해 둔 세숫물로 간단하게 입과 얼굴을 닦고, 머리를 빗은 후,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희상궁과 궁녀가 있었다. 그들은 원경릉을 보고 희상궁이 고개를 숙이며 “왕비님. 태상황님께서 왕비님이 깨시면 병구완을 들러 오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왕야의 상처를 먼저 치료하고 가도 될까요?”“어의가 치료할 것 입니다.”“하지만……”희상궁이 미소를 지으며“태상황님 말을 그대로 전하자면. ‘그 자식은 안 죽으니, 어의에게 맡기고 빨리 오라’고 하라고 하셨습니다.” 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다시 안으로 들어와 우문호를 보며 말했다. “저는 태상황님 병구완을 하러 가야합니다. 어의가 상처를 치료해줄 때 짜증내지 마시고, 상처에 소독약을 꼭 발라주셔야 합니다.”우문호가 인상을 쓰며 “내가 언제 짜증을 냈다고 그러느냐? 말이 참 많구나! 가보거라!” 라고 소리쳤다. 어휴. 할아버지나 손주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건 마찬가지구나.건곤전에 이르니 제왕과 주명취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제왕이 그녀에게 우문호의 상태를 물었다. “괜찮습니다.” 그녀는 제왕에게 대답하며 주명취를 바라보았다. 주명취의 눈빛에는 증오가 가득했다.원경릉은 그녀를 무시하고는 희상궁을 따라 건곤전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희상궁에게
태상황은 주사를 맞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기에 어쩔 수 없이 약을 마실 수 밖에 없었다. 약을 마시는 얼굴이 마치 소금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일그러졌다. 원경릉은 미소를 지으며 약사발을 상선에게 건네주었다. 상선은 비워진 약사발을 받아들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왕비님 건곤전에 계속 계셔주셔야 겠습니다!”상선을 말을 마치고 사발을 들고 나갔다. 원경릉은 미소를 지으며 침대 앞에 섰다. “태황상님 약도 드셨으니, 이제 주사를 맞을 차례입니다.”태상황의 얼굴이 한순간 일그러지며 원경릉에게 욕을 퍼부으려던 찰라 원경릉이 잽싸게 말을 이어나갔다. “보아하니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으니 화를 가라앉히는 주사를 한대 더 놓아드려야겠네요.”그러자 태상황이 입을 다물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또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전에는 손에 바늘을 꽂지 않았느냐? 왜 이번엔 바지를 벗으라고 하는것이야? 너는 수치도 못느끼느냐?”“꼭 엉덩이에 맞아야 하는 주사가 있습니다.” 원경릉이 주사기에 들어간 공기를 빼내며 대답했다. 공기가 다 빠지고 바늘위로 물약이 튀어나오자 그녀는 주사를 놓을 준비를 했다. “잘 협조하시면, 제가 살살 놔드릴게요.”태상황은 그녀가 주사를 놓는 것에 협조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그는 살고 싶었다. 그는 원경릉의 주사가 무슨 성분으로 이루어졌고, 어떤 용도로 쓰이는지 묻지도 않았다. 주사를 다 맞은 후 상선이 들어오자 태상황은 눈을 치켜뜨고 물었다. “밖에 사람이 아직 있는가?”“있습니다.” 상선이 대답했다. 원경릉은 건곤전 앞에서 태상황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제왕 내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상황이 그들을 만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태상황은 눈을 감고 말했다. “그냥 서 있게 냅두어라.”원경릉 앞에 푸바오가 보였다. 푸바오가 약을 잘 먹기는 했지만, 원래 개들이 자가치유 능력이 강해서 상처는 금방 아물어 있었다.“아유 착하지.” 원경릉이 푸바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걸
이 모든 것들이 사전에 계획 된 것이었다. 어린 남나인은 그저 희생양일 뿐, 그의 집에서 찾아낸 은표는 초왕부에서 발행한 것이었고, 원경릉은 태상황을 치료해주다가 누군가에게 고발을 당했다. 만약에 구전단을 찾지 못했다면 그녀는 끝까지 태상황을 해하려고 했다는 혐의를 벗을 수 없었을 것이다.현재 그녀는 깨끗하게 혐의를 벗은걸까? 태상황은 원경릉이 그랬다 할 확실한 증거를 못 찾았을 뿐, 암암리에 이 사건을 뒤쫓고 있고, 초왕부는 여전히 의심을 받고 있다. 태상황은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원경릉은 자신도 모르게 태상황의 눈치를 살폈다. 태상황은 엄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원경릉은 푸바오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이고는 아무일 없었다는 듯 태평한 척했다. 그녀는 혹시 태상황이 이상한 낌새를 느낀건 아닐까 걱정했지만, 자신이 푸바오와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안심했다.“이리오거라!” 태상황 소리쳤다. “태상황님 분부하십시오.” 원경릉은 천천히 다가갔다.“아까 무슨 생각을 한 것이냐? 얼굴이 왜 갑자기 창백해졌느냐?” 태상황이 말했다. 원경릉은 상선과 희상궁 쪽을 힐끗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아침 밥을 먹지 않아서 그런지 갑자기 어지러워서 창백해진 것 같습니다.”희상궁이 웃으면서 답했다. “태상황님께서도 아직 드시지 않았습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으니 곧 식사를 하실 수 있을 겁니다.”“희상궁님 감사합니다!” 원경릉이 말했다. 태상황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해독을 한 직 후라 온몸에 기운이 없었다. 그는 원경릉을 노려보던 눈을 거두었다. 아침으로는 다진 고기를 넣은 죽이 준비됐다. 원경릉은 두 그릇이나 먹었다. 죽을 먹고 난 후 원경릉은 정신이 들고 온 몸에 기운이 솟는게 느껴졌다. 먹는 내내 푸바오가 혀를 길게 내밀고 침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원경릉은 이를 보고 웃으며 희상궁에게 “푸바오도 먹을 수 있게 소금을 넣지 않은 죽을 좀 내어주세요. 사실 태상황님도 소
원경릉은 이런 주명취가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아 예. 감사합니다.”“남주(南珠)는 미인에게 잘 어울린다고 하던데, 한번 보여주시지오.” 주명취가 말했다.원경릉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아직 안에서 태상황님을 모셔야합니다. 지금 보여드리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원경릉은 주명취의 말이 모두 의심스러웠기에 그녀가 하는 말마다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야 했다. “그건 그렇네요. 태상황님의 상태는 어떠신지요?” 주명취가 말했다. 원경릉은 그녀를 보며 “궁금하시면 제왕비께서 직접 들어와 문안을 드리는게 어떠십니까?” 라고 말했다.주명취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러자 제왕이 한걸음 다가와서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 “황조부께서 왜 본왕을 만나주시지 않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원경릉은 제왕의 말을 듣고 참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주명취가 못들어오는거지, 제왕이 못들어갈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원경릉은 사실을 말해 제왕에게 미움을 살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에 “태상황님은 원래 사람이 바글바글 한 것을 싫어하시니까 그런게 아닐까요.” 라고 웃으며 답했다. “하긴 본왕 생각도 그럽니다.” 제왕은 고개를 돌려 주명취를 바라보았다.“그럼 우리는 이만 돌아갑시다. 황조부께서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시면 찾아뵙시다.” 밖에서 줄곧 서서 기다리던 제왕은 급 피로감이 느껴졌다.주명취는 분노를 속으로 삼키며 두 주먹을 꼭 쥐었다. 태상황은 원래 제왕과 자신을 매우 아꼈는데 이럴수는 없다. 그녀는 이렇게 손도 못써보고 죽을 날만 기다릴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반드시 태상황의 총애를 되찾아야 한다. 만약 그녀가 건곤전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원경릉이 태상황 옆에서 주명취의 험담을 해도 막을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신경이 곤두섰다. 주명취는 제왕을 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건 도리가 아니지요. 조금만 더 기다려봅시다.”“하지만 어마마마의 몸도 좋지 않으신데, 돌아가서 어마마마를 돌보는게 어떠십니까?”제왕은 건
원경릉은 태상황이 한 마지막 말을 흘려들었다. 그녀는 절을 하고 남주(南珠)를 들고서는 건곤전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온 원경릉은 희상궁이 푸바오에게 죽을 먹이고 궁녀를 불러 그릇을 가져가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왕비님 지금 별전으로 돌아가십니까? 그럼 쇤네랑 함께 가시지오.” 희상궁이 말했다. 원경릉은 자신이 가장 힘들 때 도와주었던 희상궁의 얼굴을 보니 문득 고마움 마음이 들었다. 별전으로 향하던 도중 희상궁이 물었다. “황제께서는 왜 왕비님께 남주 두 꿰미를 하사하셨을까요? 이 남주는 매우 귀해서 해마다 류큐에서 서너 줄 밖에 바치지 않는데, 태후마마, 황후마마, 그리고 현비마마에게 드리는게 태반입니다. 왕비께 두 꿰미를 하사하시면 아마 모자를텐데……”“오.” 원경릉은 건성 건성 대답했다. 희상궁이 그녀를 보며 “왕비님 쇤네가 하는 말을 건성으로 듣지 마십시오. 왕비님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현비마마를 왕비 편으로 만드셔야 합니다. 남주 두개 중 하나를 현비마마께 드리는게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했다. 희상궁의 말을 듣고 원경릉은 속으로 생각했다. “희상궁님 말이 일리가 있네요. 나중에 사람을 시켜 한 꿰미를 현비마마께 드리겠습니다.”희상궁이 웃으며 답했다. “지금 쇤네가 현비마마께 전해드리겠습니다.”“그럼 희상궁님 부탁드립니다.” 원경릉은 남주 한 줄을 꺼내 희상궁에게 건네었다. “제가 항상 현비마마를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도 꼭 전해주십시오.” 원경릉이 말을 덧붙였다. “좋습니다! 왕비님 그럼 먼저 별전으로 돌아가십시오.” 희상궁은 남주 한줄을 받아 들고는 몸을 돌렸다. “예.” 희상궁이 몇 발자국 가더니 고개를 돌려 원경릉을 불렀다. “왕비님!”“왜 그러십니까?”희상궁은 망설이는 눈빛으로 “혼자 찾아가실 수 있죠? 별전 가는길을 아시나 해서……” 라고 조심스럽게 원경릉에게 물었다. “알고 있습니다.”원경릉은 미소를 지었다.희상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가던길로 돌아갔다. “희상궁님!” 이번엔 원경릉이 그녀를
“아니 이건 부황께서 하사하신겁니다.” 원경릉이 답했다.원경릉은 남주을 받은 것만 말하고 차용증서에 관한 얘기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부황께서 하사하셨다고?” 우문호는 의아해했다.원경릉은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침묵하다 희상궁 일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왕야께서는 저를 믿으십니까?”“그건 왜 묻는거냐”“그저 하나만 묻겠습니다. 저를 믿으십니까?”우문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너를 믿냐고? 아니 전혀. 비록 원경릉이 다친 자신을 치료했지만, 그녀가 지금까지 저지른 일들을 생각하면 그녀를 믿을 수 없었다.“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저를 믿고 제 편이 되어주십시오.” 원경릉은 그를 보고 말했다.“무슨 일이 벌어지는데? 무슨 짓을 한것이냐?”우문호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경릉은 우문호의 눈빛에서 불신을 느꼈다. 그녀도 우문호가 자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살짝 웃으며 “왜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은 다 제가 했다고 하는거죠?” 라고 말했다. 우문호는 몹시 초조해 하며 “왜 자꾸 본왕을 불안하게 하는 것이야!”라고 말했다. 원경릉은 고개를 돌렸다. “주명취가 줄곧 일을 벌이고 있어요.”그녀의 입에서 주명취가 나오자 우문호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입 다물어라! 너는 주명취라는 이름을 언급할 자격이 없어!”별전 안이 조용해졌다. 그 둘의 눈빛이 잠시 교차하는 순간, 원경릉은 우문호의 흔들리는 눈빛을 발견했다. 원경릉은 속상하고 분한 감정이 들었다. “예. 맞아요. 저는 자격이 없죠!” 그녀는 기분이 매우 좋지 않았다. 어젯밤, 원경릉은 우문호에게 처음으로 따듯함과 안정감을 느꼈다. 그와 나눈 짧은 대화에서 잠시나마 이 남자를 믿어볼까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는 모두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우문호에게 원경릉은 주명취 발톱만도 못한 존재였던 것이다.원경릉은 한 손에 남주를 들고 무턱대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녀는 정처없이 걸었다. 이 별전은 어서방(御書殿)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