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한 지 어느덧 3년.폭우가 쏟아지던 그 날 성보라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그런데 그 시각 깔깔 웃으며 다른 여자의 생일을 축하해주고 있는 남편 주재윤. 그렇게 성보라는 이혼을 결심하게 된다. 사실 결혼 생활 3년 동안 말이 부부지, 남이나 다름없었던 두 사람. 성보라는 마음을 굳히고 이혼 합의서를 주재윤에게 내민다. 죽어도 이혼은 안 된다는 그의 말에 성보라는 그제야 이 결혼이 그녀에 대한 복수라는 걸 깨닫게 된다.전 여자친구와 손잡고 그녀에게 복수를 시작한 주재윤. 그러다가 성보라와 전 여자친구가 동시에 납치됐을 때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 여자친구를 구하는데... 그 순간 성보라는 마음이 완전히 식어버리게 된다.그렇게 성보라는 주재윤을 하루하루 잊었고 이젠 반대로 주재윤이 그녀에게 매달린다.시간이 더 흘러 국내 OST 퀸이 된 성보라. 시상식 무대 뒤에서 주재윤은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늦은 사과를 건넨다.“미안해.”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해맑게 웃는 그녀.“누구시죠?”
더 보기성보라는 화가 나서 제대로 서지조차 못했다. 이런 자리에서 성보라의 남편인 주재윤은 발언권이 있었다. 그런데 성보라를 지켜줘야겠다는 생각조차 없어 보였고 한 무리 남자들이 대놓고 희롱해도 가만히 있었다.백아연은 주재윤에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오빠, 이건 좀 아니지 않아?”주재윤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늘따라 담배 연기가 더욱 매정하고 차가워 보였다.“자업자득이야.”성보라는 그의 한마디에 가슴이 저릿했다. 진작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는데 왜 도와줄 거라는 괜한 기대를 했을까?만약 성보라를 아내로 생각했다면 겨우 얻은 기회를 이렇게 쉽게 백아연에게 넘기지도 않았을 것이다.그냥 휙 가버려도 됐었지만 강현무가 그녀를 위해 썼다던 곡, 그리고 그 곡이 백아연의 손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물론 당연히 그녀 자신을 위해서였다.성보라는 술잔을 들어 오민수에게 들이밀면서 요염하게 웃었다.“감독님, 제가 술 한잔 올리겠습니다.”화들짝 놀란 오민수는 주재윤과 백아연의 눈치를 살폈다. 백아연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단번에 이해했다.“성보라 씨 이 기회 때문에 정말 용을 쓰네요? 그렇다면 화끈하게 놀아보는 건 어때요?”오민수는 손뼉을 치며 종업원을 부르더니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 분부했다.성보라는 여전히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곤란하게 굴든 이 자리에 서서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했다.주재윤의 표정은 여전히 무뚝뚝했고 화가 나는지 기뻐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백아연은 반찬을 집어주면서 속 버리지 않게 반찬을 좀 먹으라고 속삭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사람이 장난스럽게 말했다.“아연 씨 대표님을 참 많이 챙기네요. 보는 우리가 다 부럽다니까요.”백아연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러고는 성보라를 보며 걱정하는 척했다.“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적당히 해요.”“아연 씨는 너무 착해서 문제예요. 아연 씨 자리를 빼앗으러 왔는데도 편을 들어요?”백아연은 멈칫하며 억울한 척했다.“힘들게 오디션 준비했는데 떨어졌으니 얼
이건 비밀도 아니었다.성보라는 백아연의 이름을 듣자마자 배후에 주재윤이 있다는 걸 바로 알아챘다.“주재윤...”성보라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분노가 활활 끓어올라 도무지 진정할 수가 없었다.그렇게나 많은 기회 중에서 하필 백아연을 도와 이 기회를 빼앗았다. 백아연에게 사과하라고 몰아붙이는 건가?게다가 주제곡은 강현무가 작사 작곡한 곡이었다. 백아연처럼 됨됨이가 안 된 사람은 강현무의 노래를 부를 자격도 없었다.분노가 용기로 변했는지 성보라는 잠깐 생각하다가 허연지에게 전화를 걸어 드라마 음악 감독이 누군지 알아봐달라고 했다.성보라의 얘기를 들은 허연지도 화가 치밀어 올라 알아봤더니 음악 감독이 오늘 저녁에 음악팀 스태프들과 함께 해원 호텔에서 회식한다는 정보를 알아냈다.음악팀에 허연지의 지인이 있어 성보라도 함께 끼워주라고 했다.저녁 6시, 성보라는 메이크업을 하고 파란 원피스를 입은 채 룸으로 들어갔다. 룸 안에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주재윤과 백아연도 있었다.성보라를 본 음악 감독 오민수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여긴 어떻게 왔어요?”성보라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오민수 앞으로 걸어갔다.“감독님, 메인 보컬 있잖아요...”“성보라 씨, 이미 스태프 통해서 메인 보컬을 다른 사람으로 정했다고 전달했을 텐데요? 백아연 씨로 정했거든요.”오민수가 알랑거리며 말하자 백아연이 입을 가리고 씩 웃었다.“전달하는 스태프가 언니한테 제대로 얘기 못 했나 봐요. 그러니까 여기까지 왔겠죠.”주재윤은 덤덤한 눈빛으로 성보라를 쳐다보면서 한 손으로 술잔을 흔들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성보라는 백아연을 가볍게 무시했다.“저는 오디션을 통하여 유아름 감독님이 직접 뽑았어요. 백아연은 오디션에 참가하지도 않았는데 당연히 자격이 없죠.”그녀는 자신을 위해 논리로 따져서 쟁취하러 온 것이었다.누군가의 한마디로 그녀의 일주일간의 노력을 바꿔버릴 수는 없었다. 이 오디션을 위하여 일주일 동안 대본을 연구하다가 결
성보라는 유아름의 말을 듣자마자 오디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건 강현무의 추천 덕이라는 걸 알아채고 무척이나 고마워했다.“고마워요, 선배.”잠깐 멈칫하던 성보라가 씁쓸하게 말했다.“그러니까 연지가 나한테 준 초대장도 사실은 선배가 준 거죠?”강현무에게 커다란 빚을 지고 말았다.“이번 곡은 내가 널 위해 쓴 거거든.”강현무는 성보라를 그윽하게 쳐다보았다.“보라야, 내가 그때 제안했던 거 말이야. 다시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그때 제안이라는 게 바로 그의 작업실로 들어와 국내 음악계에서 그들만의 시대를 만들자는 것이었다.강현무는 욕심이 있었고 성공할 자신도 있었다.사실 성보라의 일을 강현무도 그동안 많이 들었었다. 하여 몇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성보라에게 제안한 것이다. 성보라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강현무의 인정을 받자 아직 가치가 있는 사람이라는 걸 느꼈다.“역시 내 목소리를 인정해주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어요.”성보라가 흔쾌히 동의하자 강현무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우리 같이 노력하자.”“네.”“아침에 부담될까 봐 얘기 못 했는데 너한테 밥 한 끼 대접할 영광을 누려도 될까?”강현무는 매너는 물론이고 얼굴이 잘생긴 데다가 다정하기까지 해서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내가 선배를 사줘야죠. 고마워요, 선배.”“그래도 되고.”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호텔로 돌아왔다. 강현무는 더는 성보라의 결혼에 대해 캐묻지 않고 자신이 계획한 미래의 발전 방향을 얘기했다. 성보라는 그의 계획 속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마음이 따뜻해진 그녀는 그동안 주재윤에게 쏟아부은 시간이 얼마나 가치가 없고 낭비를 많이 했는지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꼈다.호텔로 돌아온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그제야 두 사람의 룸이 한 층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푹신한 카펫이 깔려있어 발걸음 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았고 불빛이 복도를 환하게 밝혀주었다. 성보라는 룸 앞에서 강현무와 작별 인사를 건네면서 호텔을 옮길 생각이라고 했다. 강현무도 동의하더
‘정말 심혈을 많이 기울였네.’성보라는 씩씩거리며 호텔을 나섰다. 빠르게 지나가는 차들을 보며 심호흡한 후 답답함을 억누르려 했다.오디션이 끝난 후 결과가 어떻든 반드시 이곳을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을 통과하면 호텔을 옮기고 떨어지면 바로 다른 도시로 갈 생각이었다.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그 인간쓰레기를 만나지 않을 곳이 어딘가는 있겠지.“보라야, 괜찮아?”강현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성보라는 살짝 미안했다. 조금 전 혼자 나오느라 강현무를 깜빡하고 말았다. 하여 바로 그에게 사과했다.“미안해요, 선배. 선배를 깜빡했네요.”강현무는 고개를 저으면서 성보라를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네가 꿈을 포기하고 결혼하고 싶은 남자랑 결혼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런 상황일 줄은 정말 몰랐어.”성보라도 씁쓸하게 웃었다. 이게 다 헛된 꿈을 꾼 그녀의 탓이라 생각했다.“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왜 이혼 안 해? 아직도 저 사람을 좋아해?”강현무의 질문에 성보라가 고개를 내저었다.“저 사람이 싫대요.”강현무는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다른 여자까지 데리고 네 앞에 나타났는데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다고?”‘양쪽에 여자를 끼고 데리고 놀겠다는 거야, 뭐야?’성보라가 시간을 확인하더니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오늘 정말 미안했어요, 선배. 다음날에 내가 밥 한 끼 살게요.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강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먼저 일 봐.”성보라는 다급하게 택시를 타고 떠났다. 강현무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돌아섰다.오디션 참가자가 대략 백여 명 정도 되었다. 성보라는 식당에서 시간을 지체한 바람에 현장에 도착했을 때 맨 마지막 번호를 가졌다. 번호표를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오디션 시간이 꽤 길 줄 알았는데 참가자들 모두 1분 정도 들어갔다가 바로 나왔다. 하나 같이 울상에 풀이 죽은 모습이었다.성보라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목소리에 자신이 있었지만 감독이 원하는 건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아니라 어울리
가시가 돋친 말만 골라 하는 성보라는 예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주재윤이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자 백아연도 조급해졌다.“언니, 우리는 언니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잖아.”“걱정할 필요 없어.”성보라가 몸을 옆으로 돌리며 나가려 하자 주재윤이 다시 앞을 가로막았다. 성보라는 답답하기만 했다. 백아연까지 데려와 무시했으면 됐지 시비까지 걸겠다는 건가?“재윤 씨, 당신 미쳤어? 왜 막아?”성보라는 참지 않고 비웃었다.“아연 씨가 질투라도 하면 어쩌려고?”주재윤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도발적인 눈빛으로 강현무를 쳐다보았다.“새 애인 소개 안 해줘?”말끝마다 새 애인이라고 했다. 마치 성보라가 먼저 바람이라도 피운 것처럼.“이분은 내 선배셔. 예의 있게 굴어.”“선후배라... 엄청 가깝겠네, 그럼.”백아연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주재윤을 보며 웃었다.“언니 설마 지금 이 선배랑... 데이트하는 거야?”가뜩이나 아침부터 주재윤과 백아연을 만나 기분이 잡쳤는데 역겨운 얘기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성보라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백아연, 난 네가 내 남편이랑 이곳에 나타난 것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구랑 있든 너랑 무슨 상관이야? 불륜녀면 불륜녀답게 눈치 있게 굴어. 내 앞에서 알짱거리지 말고. 역겨우니까.”“아연이가 잘못 얘기한 것도 아닌데 왜 그래?”주재윤이 차갑게 웃었다.“억울한 척 집을 나가더니 여기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나 하고 있잖아.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역겹네 마네야?”“선배라는 사람 설마 언니가 먹여 살리는 기생오라비는 아니지?”백아연이 까르르 웃었다. 성보라는 반쯤 남은 토스트를 백아연의 얼굴에 확 뿌렸다. 지금까지 모욕했으면 그만할 때도 됐는데 그것도 모자라 강현무까지 모욕했다.‘내가 그렇게 만만해?’백아연은 2초 동안 넋을 놓다가 소리를 질렀다. 공들여 정리한 앞머리와 새로 산 원피스에 얼룩덜룩한 자국이 묻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분노가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마구 끓어올랐다.곧이어 백아연이 입술을 깨물고
화들짝 놀란 성보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주재윤의 차갑고도 어두운 눈빛과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심성 시에서 주재윤을 만나다니, 기분마저 더러워진 것 같았다.백아연은 일부러 주재윤의 손을 더 꽉 잡고 입꼬리를 씩 올렸다.“여기서 언니를 만날 줄은 몰랐어. 이런 우연이 다 있구나.”그러더니 잠깐 멈칫하다가 이어 말했다.“설마 재윤 오빠 따라온 건 아니지?”주재윤의 표정이 급변했다.‘어쩐지 쉽게 떠난다 했더니 우연히 만나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던 거구나. 허.’성보라는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어찌나 차분한지 전혀 주재윤의 아내 같지 않았고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웃어 보였다.“아연 씨 오해했나 본데 난 이미 일주일 전에 여기에 왔어. 따라와도 주재윤 대표님이 따라온 거겠지.”‘구역질 나는 소리를 내가 할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나.’백아연은 성보라를 무섭게 째려보았다. 주재윤에게 딱 붙어있으면서 몰래 주도권을 쥐려 했다.“오해한 건 언니야. 재윤 오빠가 여기 풍경이 예쁘다고 날 데려온 거야.”성보라는 오만함과 비웃음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하긴. 아연 씨는 출신이 좋으니까 이런 곳에도 처음 와봤겠지. 방해 안 할 테니까 두 사람 천천히 구경해, 그럼.”성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려는데 훤칠한 남자가 앞을 막아서서는 날카롭고 무섭게 몰아붙였다.“성보라, 나랑 이혼하자더니 고작 이 남자 때문이었어?”주재윤은 경멸 섞인 눈빛으로 강현무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는 사이 질투가 짙게 배어있었다.강현무는 그런 주재윤을 몇 초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여전히 매너를 잃지 않고 다정하게 물었다.“이분은?”성보라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내... 남편이에요.”그녀가 지금 얼마나 낯뜨겁고 어색한지 아마 하늘만 알 것이다. 남편이 불륜녀와 함께 나타나 다정한 스킨십도 스스럼없이 했다. 아내로서 참으로 창피한 일이었다.강현무가 화들짝 놀랐다.“남편?”강현무는 시선을 백아연에게 옮겨 의아해하며 물었다.“그럼
성보라가 고개를 들자 준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야윈 얼굴로 해맑게 웃고 있었고 말투가 다정하면서도 살짝 놀란 듯했다.“성보라?”성보라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현무 선배?”강현무는 환한 눈웃음을 지었다.“정말 오랜만이야. 괜찮다면 같이 먹을까?”“당연히 되죠. 얼른 앉아요.”성보라가 재빨리 말했다.성보라는 음악학과를 졸업했고 강현무는 성보라보다 2년 선배였는데 어린 나이에 벌써 음악계에서 유명한 작곡가, 작사가가 되었다.그녀가 대학교 3학년에 다닐 때 아주 중요한 시합이 있었는데 음악학과 교수는 강현무를 불러 작곡과 작사를 부탁했고 성보라가 메인 보컬을 맡았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 알게 되었다.그리고 성보라가 졸업할 때 강현무는 그녀에게 자신의 작업실에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었다. 그런데 성보라가 주재윤과 급히 결혼한 바람에 무산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재윤과 잘 살 줄 알고 강현무를 거절했었는데 이곳에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강현무는 장난스럽게 활짝 웃었다.“네가 그렇게 빨리 결혼할 줄은 몰랐어. 네 목소리 참 좋았었는데.”그러자 성보라가 멋쩍게 웃었다. 그녀가 강현무를 거절할 때 아쉬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그 좋은 목소리를 지금까지 너무 낭비했어.”성보라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사랑에 눈이 먼 자신을 뭐라 설명해야 할지...다행히 강현무가 눈치 빨라 더는 캐묻지 않았다.“여기서 며칠 있으려고?”성보라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일이 잘 풀리면 아마 꽤 오래 있을 것 같아요.”만약 그 기회를 손에 넣는다면 녹음을 시작할 것이다. 그녀의 말에 강현무가 고개를 끄덕였다.“잘됐다. 나도 여기 한동안 있으려 했는데. 번호 안 바뀌었지?”“네.”성보라는 연락처에서 강현무를 찾아내 웃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기분이 좋아진 강현무가 휴대 전화를 흔들었다.“일 다 끝나면 밥 사줄게.”두 사람은 학교 때 이야기를 거리낌 없이 나누었다. 성보라의 얼굴에 오랜만에 찬
주재윤은 성보라가 그 얘기를 임영옥에게 말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성보라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온 거고.주재윤은 그들의 해명을 귀담아듣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임영옥의 말이라면 그들은 거짓말을 해서라도 성보라의 결백을 밝힐 테니까.그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최혜자와 장원혁도 주재윤이 믿지 않는다는 걸 눈치챌 정도였다.최혜자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도련님, 작은 사모님은 정말 좋은 분이세요. 절대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할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제발 한 번만이라도 작은 사모님을 믿으시면 안 될까요?”주재윤이 코웃음을 쳤다.“보라 씨는 왜 안 나와요? 두 분한테 맡기고 본인은 숨었어요?”그의 인내심이 거의 바닥을 드러냈다.“작은 사모님은...”“편들어줄 필요 없어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아요. 직접 나오지 않는다면 절대 안 믿어요.”주재윤이 얼음장같이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하지만...”“뭐가 하지만이에요?”성보라와 한 지붕 밑에 있고 싶지 않았던 주재윤이 밖으로 나가려 했다.“보라 이미 떠났어.”임영옥이 위층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방금 안방과 주재윤의 방에 가봤는데 딱 봐도 3년 동안 두 사람의 관계가 좋았던 적이 없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그동안 꾹 참고 살아온 성보라가 안쓰러웠고 주재윤의 독단적인 행보도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성보라가 왜 이혼하려 했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런 결혼 생활이라면 그 어떤 여자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주재윤은 이미 떠났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임영옥을 빤히 쳐다보았다.임영옥은 아들에게 너무도 실망했다. 타일러도 보고 욕도 해봤지만 전혀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 아들을 그녀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임영옥은 주재윤을 째려보고는 최혜자와 함께 나가려 했다. 그리고 가기 전 이 말을 남겼다.“이제부턴 네가 알아서 해.”주재윤이 눈살을 찌푸리고 몇 걸음 따라갔다.“보라 씨 어디 갔어요?”성보라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한 게 아니라 또 몰래 숨어서 수작을 부릴까 걱
성보라는 임영옥과 함께 차에 올라탔다. 임영옥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아까 왜 말렸어? 재윤이가 옆에 있어도 꼭 보낼 생각이었는데.”성보라는 임영옥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고마워요, 어머님.”그녀 걱정을 이렇게까지 해주는 사람은 임영옥밖에 없었다. 임영옥도 더는 뭐라 할 수가 없었다.“많이 힘들지?”“괜찮아요.”성보라는 조리 있고 또박또박하게 말했다.“제 몸의 상처는 지난번에 남북 대교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생긴 거예요. 재윤 씨가 때린 게 아니라.”그녀는 임영옥이 시름을 놓을 수 있게 사실대로 얘기하기로 했다. 그러자 임영옥이 화들짝 놀랐다.“재윤이가 때린 게 아니라고?”임영옥도 주재윤을 가정 폭력범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성보라의 몸에 난 상처가 정말로 맞은 것처럼 보였다. 임영옥은 성보라가 솔직하게 얘기해줘서 너무도 기뻤다.‘정말 오해였구나. 어머님은 재윤 씨가 날 때렸다고 생각해서 스카이 캐슬에 들어오신 거였어.’성보라는 그제야 다 깨달았다.“폭우가 쏟아진 그 날에 교통사고를 당했어요.”성보라가 한마디 보탰다. 기쁨도 잠시 임영옥은 그날 뉴스에서 봤던 참혹한 교통사고 현장이 떠올랐다.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끔찍했다. 임영옥이 성보라의 손을 꼭 잡았다.“너도 참,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서도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어디 또 불편한 데 없어? 내일 병원 가서 정밀 검사받자.”그러자 성보라가 재빨리 말했다.“이젠 다 나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은 어머님 건강만 신경 쓰시면 돼요. 그리고 저랑 재윤 씨 일은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그냥 순리에 맡겨주세요.”성보라는 진짜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했다. 그 모습에 임영옥은 마음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의 결정을 존중했다.“보라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난 항상 네 편이라는 거 잊지 마. 재윤이가 널 괴롭히면 꼭 나한테 말해, 알았지?”“네.”성보라는 임영옥을 본가까지 데려다주었다. 다시는 백아연을 찾아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후에야 집으로 돌아갔다.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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