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화는 분노했다. “그럼 우리 청하가 중간에 껴서 난처해하는 모습을 눈 뜨고 보고만 있겠단 말이에요? 아빠라는 사람이, 어떻게 이 중요한 순간에 딸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어요?”“알았어.”고덕화는 한숨을 푹 쉬었다. 어쨌든 동의한 셈이다. “그저 여기에서 며칠 더 묵었을 뿐이야. 천씨 가문쪽과의 협의를 또 지체해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 돼.”고덕화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천씨 가문의 여세를 몰아 당신이 한 단계 더 높은 성과를 올리려고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어요. 저도 그 생각에 동의하고요. 게다가 당신을 응원해요.”이은화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보, 우리에겐 자식이라고는 청하 한 사람 밖에 없어요. 당신이 이미 이룬 성공은 다른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는 것이예요.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돼요. 청하의 행복이야말로 지금 우리의 가장 큰 목표예요.”“하지만…”고덕화는 여전히 변명하고 싶었다.“저는 저희의 잘못된 생각으로 청하가 좋은 인연을 놓치지는 걸 원하지 않아요. 천씨 가문을 떠나서, 천도준은 이미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고요. 만약 청하가 우리 때문에 헤어지면 아버지라는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어요?”이은화의 목소리가 점점 더 높아졌다.“당신 설마 우리 청하가 석유 재벌이나 실리콘 밸리의 거물들의 자식들을 마음에 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죠?”고덕화는 잠시 멈칫하다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바로 명쾌하게 말했다.“그럼 이렇게 하지. 모레 여전히 이곳에서 파티를 열어 천도준에게 사과를 하는 거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상견례를 갖는 거지.”“좋아요. 이래야 좋은 아버지죠.”이은화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덕화와 정강수가 회관 주차장으로 달려갔을 때, 천도준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저 멀리에서 롤스로이스 한 대가 회관 밖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고덕화는 미간을 찌푸렸다. 정강수가 다급히 경호원에게 물어보니, 경호원은 천도준이 착잡한 표정으로 차량에 올라탔
“죄송합니다. 어머님은 이미 간암말기라......”고개를 흔드는 장민호의 모습에 천도준은 현기증이 나더니 눈시울이 붉어졌다.어려서부터 그는 어머니와 단둘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었고, 어머니는 천도준을 학교에 보내기 위해 한 평생을 고생만 했었다.그런데 복도 누리지 못하고 이 지경이 되다니.“박사님,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정말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천도준은 갈라진 목소리로 울먹이며 애원했다.장민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을 열었다.“마지막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바로 간이식입니다. 마침 병원에 알맞는 자원이 있어요.”말을 끝낸 장민호는 잠시 멈칫하더니 천도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장만호는 현재 천도준의 형편을 잘 알고 있다.“하지만 비용이...... 초기에 적어도 4,000만 원이 필요합니다.”4,000만 원?천도준은 눈을 반짝이더니 장민호의 손을 덥석 잡고 말했다.“살려주세요. 반드시 살려주세요. 저 4,000만 원 드릴 수 있어요.”돈이 없으면 다시 벌 수 있지만, 사람이 없으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그렇다면 빨리 돈부터 마련하세요. 더 늦어지면 간이식도 할 수 없습니다.”장민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한숨을 쉬더니 뒤돌아섰다.병원을 나서니 하늘에서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천도준은 다급히 집으로 돌아갔고, 그의 아내인 오남미는 소파에 웅크린 채 TV를 보며 과자를 깨작이고 있었다.그녀는 천도준을 힐끔 보더니 입을 열었다.“더는 버티기 힘들대?”“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는데, 간이식만 하면 살릴 수 있대.”천도준은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은 듯 기쁨에 겨워 말했다.“4,000만 원이면 당장 수술 할 수 있어. 집에 마침 그만한 돈은 있으니 엄마부터 살리자.”말을 끝낸 천도준은 은행 카드를 찾기 위해 바로 방으로 들어갔고 오남미는 순식간에 표정이 변하더니 다급히 그를 불러세웠다.“천도준, 거기 서!”천도준은 뭔가 눈치챈 듯 미간을 찌푸리고 몸을 돌려 오남미를 바라봤다.“돈은 어딨어?”오
“남미가 우리 부부에게 효도하려고 준 돈을 도로 가져가려고? 뻔뻔하기도 하지. 남준이 곧 결혼해. 그 돈은 남준이 집 사는 데 보탤 테니까 꿈도 꾸지 마. 한 푼도 못 줘!”뚜--통화는 그대로 종료되었다.천도준은 완전히 멍해졌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건가?“너 미쳤어?”오남미는 미친 여자처럼 천도준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댔다.“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가 부모님께 돈 드린 게 죄라도 돼?”천도준은 눈시울을 붉힌 채 막연한 표정으로 오남미를 바라보며 말했다.“당신 동생의 집 사는 일이 우리 엄마 목숨보다 더 중요해?”“닥쳐!”오남미는 천도준의 몸에서 손을 떼더니 손에 잡히는 대로 물건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눈 깜짝할 사이에 거실은 난장판이 되어버렸다.오남미는 눈물 콧물을 쥐어짜며 소파에 앉아 울부짖었다.“천도준 나쁜 자식, 난 왜 너 같은 자식과 결혼해서는. 당신 엄마한테 들어간 돈이 아직도 부족해? 여태 월셋집에서 살면서 고생했는데 넌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 남준이 내 동생이지만 당신 동생이기도 해. 결혼한다는데 누나가 돼서 도와주지도 못해?”“도와줘?”천도준은 기가 막혔다.“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야. 3년 동안 그 모자란 자식 적게 도와줬어?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된 건 다 당신 집안사람들 때문이야!”“내 동생 함부로 욕하지 마!”오남미는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천도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왜 안 되는데? 대학교 동기 임신시켰을 때도 내가 내 돈으로 해결해 줬고, 차 사달라고 억지 부려서 결국 내가 사줬어. 3년 동안 내가 당신 집안에 가져다준 돈이 적어? 당신 남준이 그 자식 노예라도 돼? 당신이야말로 내 생각 한 적 있어?”“으악! 그 입 다물어!”오남미는 미친 듯이 뒹굴며 비명을 질렀다.“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혼하고 싶어?”“우리 엄마 목숨값을 빼돌려서 그 모자란 자식한테 집을 사준다는 데 당신이야 말로 이혼하고 싶은 거야?”결국 천도준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이혼하
가는 내내 천도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눈앞의 모든 것은 마치 꿈만 같았다.그렇게 이수용을 따라 이율 병원의 중환자실에 도착했을 때, 유리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온 몸에 삽관한 채 수술을 마친 어머니를 보았고 그제야 그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기쁨, 감격, 고마움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강물처럼 밀려왔다.“어르신, 바라셨던 대로 이식 수술은 아주 성공적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장민호가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천도준은 멍해졌다.그의 어머니의 주치의인 장민호는 이율 병원의 유명한 닥터이자 의학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아까 간이식을 제안한 것도 역시 장민호이다.국회 의원들과도 편하게 담소를 나누던 장민호가 눈앞의 이 노인에게 이렇게 공손하다니?“고맙네, 장 박사.”이수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고마움을 전했다.장민호는 움찔하더니 다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제가 어찌......”이수용이 자상한 미소를 짓자 그제야 장민호는 한숨을 내쉬었다.갑자기 장민호는 고개를 돌려 천도준을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천도준 씨, 효심이 지극하더니 이렇게 복을 받네요. 어머님은 적응기만 지나면 좋아지실 겁니다.”그 말에 천도준은 더는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고맙습니다, 박사님. 정말 고맙습니다.”천도준이 무릎을 꿇으려고 하니 장민호는 다급히 그를 말렸다.“이러지 마세요.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입니다.”장민호는 이수용의 신분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그런데 이수용이 직접 나서서 천도준 어머니를 돕는 다는 건, 천도준도 평범한 신분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천도준도 바보는 아니다 보니 장민호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것 같았다.비록 의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했고, 또한 장민호도 그들 모자에게 늘 잘해줬지만 그는 느낄 수 있었다.전에 그에게 했던 행동들이야말로 의사로서 해야 할 일이었고, 지금 이것은 마치 을이 갑에게 대하는 태도와도 같았다.“어
“그것은 두 분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이수용이 계속 말했다.“부친께서는 늘 두 분을 그리워하셨습니다. 이젠 드디어 가문의 모든 권력을 손에 넣으셨고 저를 보내 두 분에게 지난 20여 년에 대해 보상을 해주라고 하셨습니다.”“보상요? 어떻게 보상한답니까?”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20여 년 동안, 저와 어머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십니까? 전 늘 아버지도 없는 자식이라고 비난을 받았고, 제 어머니는 절 키우기 위해 하루 종일 일만 하시다가 결국 저렇게 되셨습니다!”툭!이수용은 자형화가 박힌 검은색 카드를 천도준의 손에 건네주며 말했다.“이건 부친의 작은 마음입니다.”손에 들린 카드를 보고 천도준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이런 카드는 태어나서 처음 본다.순간 짙은 분노가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20년 동안의 빚을 까짓 돈으로 해결하려고?하지만 이수용은 그에게 폭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이 카드는 단지 작은 성의일 뿐입니다. 저를 이곳에 보낸 진짜 이유는 두 분을 당당하게 집으로 모시기 위한 것입니다.물론, 도련님도 가문 사람들이 입을 꾹 다물 수 있도록 충분한 실력을 갖추셔야 합니다. 하여 저는 도련님 옆에서 도련님이 하루빨리 실력을 향상해 부친의 권력을 물려받을 수 있도록 보좌할 것입니다. 그리고 어머님이 마땅히 누려야 할 부귀도 반드시 전부 드릴 겁니다.”천도준은 완전히 멍해졌다.이수용의 말은 마치 메아리처럼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이수용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카드를 뒤집어보니 쪽지가 붙어있었는데 그곳에는 이수용의 연락처가 적혀있었다.얼굴을 벅벅 비비며 쓴웃음을 짓던 천도준은 중환자실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그에게 있어 어머니의 건강이야말로 가장 중요했다.다음날.아침부터 오남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와 날카로운 목소리로 천도준에게 당장이라도 이혼 절차를 밟자고 윽박질렀다.천도준은 짧게 대답한 후 병원을 나서 면사무소로 향했다.면사무소에 도착하니 오남
은행에 들어선 그는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천도준의 순서가 되자 그는 지정된 창구로 가서 의자에 앉았다.얼핏 머리를 드는 순간, 그는 깜짝 놀랐다.임설아!이런 우연이.천도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확실히 오남준의 여자 친구 임설아가 맞았다.두 사람은 비록 만난 적이 없지만 그는 전에 오남미를 통해 임설아에 대해 들었고 사진도 본 적 있었다.그는 임설아에게 원한이 없다. 그저 얄밉다는 정도일 뿐이다.예쁘장한 은행원이 오남준에게 걸렸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다.그러니 상대가 예물을 얼마를 원하던, 그것은 그녀의 마음이다.천도준이 증오하는 건, 빌어먹을 오씨 집안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 목숨값을 오남준에게 가져다주었다는 것이다.“고객님, 어떤 업무를 원하십니까?”임설아는 프로답게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천도준은 숨을 깊이 들이쉬며 울분을 가라앉히고 미소를 짓더니 카드를 내밀었다.“현금 인출할게요.”얼마를 인출할 거냐고 물으려는 순간, 자형화 카드를 확인한 임설아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고객님, 이 카드 맞으십니까?”임설아는 자형화 카드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만약 진짜 은행카드라면 은행원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었다.천도준은 멈칫했다.‘설마 그 어르신이 가짜 카드를 준 건 아니겠지?’하지만 거액의 수술비를 대신 내주고 굳이 가짜 카드를 줄 이유가 있을까?“맞아요.”천도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임설아를 훑어보았다.정확한 키는 알 수 없었지만 유니폼을 입었는데도 꽤 몸매가 드러났고 하얀 피부와 정교한 오관은 가녀리고 귀여운 느낌을 주었다.천도준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렇게 괜찮은 여자가 왜 굳이 그런 쓰레기한테 반한 거지?’임설아는 미간을 점점 더 찌푸렸지만 침착하게 카드를 확인했다.하지만 “삐-”하는 소리와 함께 컴퓨터에 에러가 뜨자 그녀는 인내심을 잃고 카드를 천도준 앞에 던지며 말했다.“고객님, 죄송합니다만 이 카드는 본 은행 시스템에서 읽을 수 없습니다.”‘헐, 설마 날
천도준은 어이가 없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새침한 표정을 짓던 여자가 갑자기 여우가 되었다고?오남미에게서 들은 바로는 임설아는 아주 보수적이고 착한 여자라 오남준과 남녀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손밖에 잡아보지 못했다고 했다.천도준은 시력도 정상이고 머리도 정상이다.그런데 이 모습이 보수적이라고? 중년 남자의 안색이 삽시에 굳어지더니 천도준을 향해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고객님. 자중하세요. 여긴 은행입니다. 부장의 신분으로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나가주세요. 아니면 경비를 불러 강제로 끌어낼 것입니다.”두 경비는 낄낄거리며 웃었다.이 은행에서 임설아가 부장의 여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그런데 감히 부장의 여자에게 눈독을 들이다니?부장의 말에 임설아는 더 요염하게 몸을 비틀며 아양을 떨었다.“부장님, 저런 사람과는 길게 말하지 않아도 돼요. 바로 끌어내라고 하세요.”천도준은 화가 났지만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자형화 은행 카드는 어르신이 준 것이고 그는 돈을 인출하러 왔을 뿐이니 이런 무례함을 당할 이유가 없다.아까만 해도 임설아가 그저 얄밉기만 했는데 지금 꽈배기처럼 몸을 배배 꼬는 그녀를 보니 화가 솟구쳤다.“당장 끌어내!”천도준이 꼼짝도 하지 않으니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경비원에게 명령했다.은행 부장이라는 신분이 아니었다면, 천도준이 임설아를 힐끔거렸다고 했을 때 바로 끌어냈을 것이다.두 경비원은 천도준에게 다가갔고 구경꾼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천도준은 뭐든 참는 성격이 아니고 닌자 거북이도 아니다.부정당한 대우에 그는 뚜껑이 열렸다.쿵!그는 자형화 카드를 올려놓고 큰 소리로 말했다.“난 정정당당하게 이 은행에 현금을 인출하러 온 겁니다. 그런데 고객을 이렇게 모욕하고 모함하다니, 이런 대우를 당하고도 내가 가만히 있을 거 같아요?”경비원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부장이라는 남자는 당장이라도 천도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본능적으로 그가 올려놓은 자형화 카드를 힐끔 보았다.순간.쿵!남
“고객님, 아까는 제 불찰입니다. 제가 귀하신 분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연신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사과하는데 등이 푹 젖어있었다.자형화 은행 카드는 워낙 희귀해서 일반 은행 직원은 전혀 알지 못했고 이 카드를 알아보는 사람은 적어도 직급이 부장 이상인 높은 사람들이며 이 카드를 소지한 사람이 나타나면 본점의 은행장도 직접 허리를 굽신거리며 접대해야 했다.남자는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았다.이런 대단한 인물이 왜 이런 구석진 곳으로 찾아왔을까?심지어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니?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이러는 걸까?천도준은 고개를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많이 긴장한가 보네요?”남자는 움찔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아닙니다. 우선 차부터 따라드리겠습니다.”남자는 어떻게든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무릎을 꿇어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아니면 임설아 뿐만 아니라 부장인 그도 영영 매장당할 수 있다.“아니에요. 현금이나 꺼내줘요.”천도준의 싸늘한 말에 남자는 자꾸만 맺히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이건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인가?남자는 후회가 밀려왔다.부장이라는 직급에 오르기까지 그는 십여 년을 분투했다.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으로 인해 그동안의 공든 탑이 이대로 무너진다면?털썩!남자는 주저 없이 천도준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고객님,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까는 정말 오해입니다.”천도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아까의 건방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천도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금이 필요해서 왔으니 긴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빨리 처리해 주시죠.”남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억지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네, 당장 해드리겠습니다.”남자는 천도준의 손에서 자형화 카드를 건네받고 물었다.“얼마나 인출하시겠습니까?”천도준은 은행의 부장이라는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