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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고객님, 아까는 제 불찰입니다. 제가 귀하신 분도 알아보지 못하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하십시오.”

사무실에 들어오자마자 남자는 연신 이마의 식은땀을 닦으며 사과하는데 등이 푹 젖어있었다.

자형화 은행 카드는 워낙 희귀해서 일반 은행 직원은 전혀 알지 못했고 이 카드를 알아보는 사람은 적어도 직급이 부장 이상인 높은 사람들이며 이 카드를 소지한 사람이 나타나면 본점의 은행장도 직접 허리를 굽신거리며 접대해야 했다.

남자는 당장이라도 피를 토할 것 같았다.

이런 대단한 인물이 왜 이런 구석진 곳으로 찾아왔을까?

심지어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렸다니?

일부러 골탕을 먹이려고 이러는 걸까?

천도준은 고개를 들어 평온한 표정으로 남자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많이 긴장한가 보네요?”

남자는 움찔하더니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우선 차부터 따라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어떻게든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고 싶었다. 무릎을 꿇어서 해결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면 임설아 뿐만 아니라 부장인 그도 영영 매장당할 수 있다.

“아니에요. 현금이나 꺼내줘요.”

천도준의 싸늘한 말에 남자는 자꾸만 맺히는 이마의 땀을 소매로 닦아냈다.

이건 용서할 수 없다는 뜻인가?

남자는 후회가 밀려왔다.

부장이라는 직급에 오르기까지 그는 십여 년을 분투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람으로 인해 그동안의 공든 탑이 이대로 무너진다면?

털썩!

남자는 주저 없이 천도준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고객님, 죄송합니다. 제발 용서해 주세요. 아까는 정말 오해입니다.”

천도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아까의 건방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천도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현금이 필요해서 왔으니 긴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빨리 처리해 주시죠.”

남자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억지로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네, 당장 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천도준의 손에서 자형화 카드를 건네받고 물었다.

“얼마나 인출하시겠습니까?”

천도준은 은행의 부장이라는 사람이 이 카드 앞에서 굽신거리는 모습을 보니 아마 거액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선 돈을 찾아 후속 치료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새집도 구해야 한다.

“1억?”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천도준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알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너무 무리인가요? 예약이라도 했었어야죠?”

“아니요, 그게 아니라. 고객님과 같은 귀빈은 예약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자는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이천억 현금이 있어야만 자형화 카드를 발급받을 수 있는데 예상외로 1억만 인출하신다기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쿵!

그 말에 천도준은 깜짝 놀라 심장이 벌렁벌렁 뛰기 시작했다.

이천억?

그것도 자산이 아닌 현금?

게다가 카드 발급 자격이 이천 억?

천도준의 아버지가 이렇게 대단한 부자라고?

남자만 놀란 것이 아니라 천도준도 깜짝 놀라 얼떨떨해졌다.

한참 뒤, 드디어 천도준은 평정심을 찾고 입을 열었다.

“일단 1억만 인출해 주세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급히 인출 업무를 처리했다.

천도준은 사무실에서 대충 검은색 봉지를 하나 집어 들더니 현금을 담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남자는 세상을 다 잃은 표정으로 멀어져 가는 천도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천도준 앞에 납작 엎드려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하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결국 남자는 땀 범벅이 된 채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은행 로비.

천도준은 검은색 봉지에 현금을 안고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에서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를 향했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수군덕거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시울을 붉힌 채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던 임설아는 부장 사무실에서 나오는 천도준을 발견하더니 즉시 사과하려고 로비로 달려 나갔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천도준은 이미 은행을 빠져나갔다.

임설아는 허탈한 한숨을 내쉬며 부장 사무실로 찾아갔다.

“부장님,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요?”

의자에 주저앉은 남자의 모습에 임설아는 심장이 철렁했지만 그래도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고객님은 자형화 카드를 소유하고 있었어. 그 카드를 발급받으려면 최소한 현금 이천억은 있어야 해.”

쿠웅!

임설아는 몸이 가늘게 떨려오더니 안색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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