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키아토가 달기는 했지만 그걸 마신다고 연애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나는 쓰디쓴 아메리카노 같았고 서란은 달콤한 마키아토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나는 때때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머릿속으로 내일모레 그녀와 배인호가 만나는 시간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서울시 비즈니스 심포지엄은 오전 9시 반부터 시작되고 서란은 서빙 알바로 일찍부터 회의장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배인호는 문을 통과할 때 그녀를 발견할 것이고 그렇게 큐피드의 사랑의 화살을 맞을 것이다.“서란 씨, 다른 아르바이트해볼 생각 있어요? 과외 알바 소개해 줄까요? 내일부터 가능한데, 페이도 좋고.”서란이 옆자리 테이블을 정리하는 틈을 타 나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서란이 고맙다는 듯 나를 보며 웃어 보였지만 내 제안은 거절했다.“지영 언니,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근데 제가 며칠 뒤면 개학이라 내일모레 임시 서빙 알바까지만 하고 학교 가서 등록해야 돼요.”생각해 보니 개학이 다가오긴 했다.내가 한발 늦었다. 며칠만 더 일찍 말을 꺼냈으면 서란이 배인호 앞에 나타나는 걸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하지만 이내 마음이 다시 놓였다. 배인호와 서연 정도의 인연이면 한 번을 막으면 두 번 세 번 더 막아야 할 것이다...“고맙긴. 그냥 갑자기 떠올라서 얘기해 본 거야.”나는 커피를 한 모금 하고는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그럼 이 알바도 그만두는 거야?”“네, 개학하면 시간이 안 나서요.”서란이 아쉬운 듯 주위를 한번 빙 둘러본다. 그러고는 보기 좋게 씩 웃어 보인다.“지영 언니, 보고 싶을 거예요.”나는 조금 난처했다. 서란이 이 모든 걸 안다면 아마도 멀찌감치 나를 피했을 것이다.이때 손님이 들어왔고 서란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제야 마음이 가벼워졌고 계산을 하고 가게를 나섰다.아마 이 저렴한 가게에 다시 올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운명의 수레바퀴는 이미 돌아가고 있었다. 방관자로서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다시 한번 감상하는 게 전생보다 쉽지는 않았다.이우범
서란은 우리에게 헤드셋을 나눠주러 온 것이었다. 그녀는 공손하게 헤드셋을 우리가 앉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고 나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다음은 배인호였고 똑같이 미소를 지었다.배인호는 보기 드물게 그녀를 보며 웃었다. 곧이어 한 마디 덧붙였다.“고마워요.”서란이 그에게 남다른 의미임을 알 수 있었다.서란의 시선이 다시 한번 배인호로 향했고 그 시선에는 경이로움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일편단심이라고 해도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보고 무시할 수는 없었다.소녀는 “고마워요”라는 말 한미디로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수줍음이 많았다.혹시 반할 가봐 배인호를 보고도 못 본척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이 소소한 에피소드는 금방 지나갔다. 심포지엄이 시작되었고 주요하게는 서울시와 세종시의 연합 발전 및 주변 도시의 발전에 대한 토론과 실현 가능한 방안을 작성하는 것이었다.서울시는 최근 몇 년간 무서운 기세로 발전했고 그중 여러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라 확장이 필요했다.나는 잘 모르는 내용이라 아빠의 견해, 배인호의 생각, 아버님의 의견을 듣는 것 외에 나는 줄곧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심포지엄이 끝나고 아빠가 찾아왔다.“영이야, 여긴 어쩐 일이야?”“집에 있으려니까 심심해서 와 봤어.”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빠는 내가 태생부터 장사나 정치와는 안맞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런 행사를 지겨워하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내가 여기에 있으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인호랑 같이 온 거냐?”아빠가 고개를 돌려 배인호를 쳐다보았다. 배인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동작 하나하나에서 그가 상위자임을 알 수 있었다.기타 비즈니스 거물들과 비기면 배인호는 젊은 편이었지만 이미 그는 빼어난 능력자였다.“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기 좋네. 집사람으로서 이런 자리에 참석해 그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필요해.”아빠가 의미심장하게 당부했다.“사돈, 오랜만입니다.”“아이고 이게 누굽니까. 우리 배 사장님 아
집에 돌아왔을 땐 이미 어둠이 내린 뒤였다.청담동은 불이 환히 켜져 있었다. 집에 도착했고 나는 이 기사한테 들어가 보라고 했다.아버님 어머님은 집에 있었지만 배인호는 아직이었다.“지영아, 인호는? 같이 들어오는 거 아니었어?”혼자 들어오는 나를 보고 어머님이 물었다.“심포지엄이 끝나고 친구랑 밥 먹었어요. 인호 씨 이미 들어온 줄 알았는데.”나는 놀란 듯한 표정으로 답했다.내 추측이 맞다면 배인호는 오늘 집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사냥감이 생겼으니 그의 마음은 진작에 다른 사람한테 가 있을 것이다.아버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들이 세종시로 돌아가기 전인데도 이렇게 밖으로 돌아치는데 돌아가면 이 집을 호텔처럼 사용할게 뻔했다.“인호한테 전화해. 안 받으면 친구들한테 전화 돌려!”아버님이 성질을 내더니 손을 저으며 말했다.어머님이 나한테 눈치를 주었고 나는 전화기를 건넸다.돌아오는 건 욕밖에 없을 텐데 멀리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일을 어머님께 돌린 건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 같았다. 배인호가 자기 어머니를 욕하진 않을 테니 말이다.배인호의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이우범 빼고 있어야 할 번호는 다 있었다.어머님이 전화기에 저장된 연락처들 뒤지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서너 사람쯤 연락했을 때 스피커폰으로 노성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인호 형, 형수님 전환데?”“안 받아!”배인호의 목소리에서 짜증이 가득 묻어 나왔다. 아버님과 어머님은 이 모든 걸 똑똑히 듣고 있었다.다른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는 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그 사람들한테 난 그저 사랑받지 못해 원망으로 가득한 여자일 것이다.“형 어머니신데...”노성민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맞장구 소리가 갑자기 끊겼고 배인호가 전화를 넘겨받았다.“엄마?”“인호 너 지금 어디야. 저녁은 집에 들어와서 먹어야지. 맨날 이상한 별 볼일 없는 애들이랑 어울리고 다니다 몸 망가지면 어떡해!”어머님은 평소에 부드럽고 차분한 분이셨지만 지금은 기세가 호랑이 같
“정아가 찾아서요.”나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자정이 넘어 클라우드 호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기선우는 이미 온몸에 성한 곳 하나 없었다.오버스러운 금목걸이를 한 뚱뚱한 남자 서너 명이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고는 비웃었다.“저분이 네가 연락한 빽이냐 이 자식아. 고작 아줌마를 불러왔어?”“설마 우리랑 하룻밤 보내는 걸로 목숨 값하려고?”입에 담을 수 없는 모욕적인 말이었다.나는 기선우 쪽으로 걸어가 그를 일으켰다. 멀쩡하던 젊은 사내가 눈탱이가 밤탱이 되어 못 알아볼 정도였고 그 모습은 꽤나 딱했다.“누나, 여기서 알바로 발레파킹 중이었는데 실수로 저분들 차를 살짝 긁었어요. 배상해 드린다고 했는데 2000만 원이나 달라고... 그렇게 많이는 없는데...”기선우가 작은 소리로 나에게 자초지종을 말해줬다.“무슨 차길래? 한번 봐봐.”내 물음에 기선우가 멀지 않은 곳을 가리켰다. 밝지 않은 불빛 아래 하얀 티구안이 세워져 있었다.고작 이 차로? 나는 자기도 모르게 눈쌀이 찌푸려졌다. 한 대가 4000만 원 정도일 텐데 조금 긁힌 거로 1000만 원이라니, 장사도 이런 장사가 없었다.“어때요 아가씨, 보상은 어떻게 하실라고?”“삐쩍 마른 게 가슴이 나보다도 작네. 하룻밤으로는 안되겠는데!”뚱뚱한 남자들이 상스러운 말을 계속 뱉어내자 기선우가 기를 쓰고 몸을 일으켜 세웠고 피로 얼룩진 손으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말 가려서 해! 아님 그냥 날 때려죽여!”그 말에 나는 살짝 놀랐다. 요즘 대학생들 다 이렇게 혈기왕성한 건가? 일이 해결되기 전까지 내 뒤에 숨어 덜덜 떨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을 빗나갔다.기선우의 남자다운 모습에 뚱보들은 다시 으르렁대기 시작했다. 나는 기선우를 몸 뒤로 숨겼고 무섭게 뚱보들을 쏘아보며 말했다.“3분만 기다려.”이렇게 말하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여기는 클라우드 호텔 소속이었고 기선우는 호텔 알바생이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호텔 책임자가 나서서 해결하는 게 맞지만 아직까지 그 누
가슴 쪽이 시원해졌다. 나는 지금 분명히 옷이 벗겨진 채로 흐트러진 모습일 것이다.이 모든 상황의 장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아 보였고 머리를 파묻으려 했다.재빨리 손을 뻗어 배인호를 막았다. 하지만 말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또 날 시험하려는 거예요?”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배인호의 눈 속에 담긴 욕망이 반으로 사그라들었다. 그는 몇 초 정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까 상황이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행동은 빠르고 냉랭했다.나도 조용히 몸을 돌려 배인호와 등지고 누웠다. 마음속에 낙담만 커져갔다.언젠가 나도 배인호를 몸으로 유혹하려 했다. 그와 아이를 낳고 간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싶었다.하지만 지금은 그저 이혼하고 각자의 생활을 살기를 바랐다.새벽이 되어서야 잠든 탓에 나는 12시가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일어나 보니 문자가 여러 통 와있었다.한 통은 어머님이 보낸 문자였다. 볼일이 생겨 세종시로 돌아간다는 문자였다.또 한 통은 민정이었다. 상업성 콘서트 제안이었다.마지막 한 통은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내용이 아주 놀라웠다. 어제 기선우의 손을 잡고 주차장에서 나오는 사진이었고 각도로 봤을 땐 연인 같았지만 기선우는 많이 다쳐 있었고 조금 불쌍해 보였다.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머릿속에 여러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파파라치한테 찍힌 건가? 아니면 어제 그 뚱보들이랑 한패인 사람들이 찍은 건가?아빠와 남편의 신분이 특별하긴 해도 난 항상 조용하게 지내왔다. 배인호와 결혼하고 나서는 정아도 잘 만나지 않았는데 어떻게 파파라치한테 찍히게 된 거지?아무리 생각해도 그럴듯한 원인이 생각나지 않았다. 모르는 번호로 바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들리자마자 그쪽에서 끊어버렸다.할 수 없이 문자를 보냈다.「누군지 물어봐도 될까요?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만약 사진이 새나가면 기선우와의 사이가 아무리 결백하다 해도 자초지종을 모르는 누리꾼들에게 오해를 살 것이다. 그냥 조용히 얼굴 반반한 애와 잠시 즐기고
여기는 서울시 교외의 한 낡은 동네다. 90년대 말에 지은 직원 복지 아파트 단지 옆에 이미 폐업한 대형 화학공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그때 그 시절 서중석은 이 화학공장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의 아파트 한 채를 분양받았다.10년 전, 화학공장에 부도가 났고 배 씨 가문에 인수되었다. 하지만 그 뒤 별다른 계획 없이 계속 이곳에 방치해두고 있었다. 만약 어느 날 계획이 생긴다면 이 근처에 있는 모든 단지들을 모조리 철거해야 한다.자본가는 피도 눈물도 없다. 배인호 같은 천생 장사꾼은 더 계략에 능했다. 그가 허락한 철거 보상금은 딱 표준선을 맞췄고 한 푼도 더 주지 않았다.하지만 누구도 생각지 못했다. 배인호가 서란을 위해 자선가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말이다.서중석이 대표로 배인호와 면담했고 충돌을 예상했지만 배인호는 의외로 배중석에게 매우 친절했다. 곧이어 배상 표준을 바꿨고 입주민들 모두 표준선을 훌쩍 넘는 금액을 보상받게 되었다.이러한 행보는 서란을 화나게 하면서도 감동받게 했다. 화나는 건 이러한 상황을 애초에 배인호가 만들었다는 거고 감동받은 건 배인호가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많은 걸 해줬다는 거였다.나는 차 안에 앉아 단지에 켜진 불들을 올려다보며 사색에 잠겼다.전생에 나는 배인호가 철거 보상 방안을 바꾼 사실을 알고 아빠한테 알아봐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내막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배인호가 여자 하나를 위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건 모르고 있었다.계산해 보니 그때는 배인호가 서란을 쫓아다닌지 반년쯤 되던 때였다. 반년밖에 안되었는데 이렇게 그녀에 미쳐있었다는 거다.서란이 몇 동 몇 호에 사는지까지는 모르는 터라 나는 차를 운전해 크지 않은 단지를 천천히 돌고 있었다. 담장도 없고 경비도 없는지라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편했다.마침 한바퀴를 다 돌았을 때 익숙한 부가티 한대가 보였다.배인호가 올블랙 차림으로 차 앞에 기대어 있었다. 긴 다리로 차에 편안하게 기대어 있었고 머리는 살짝 아래로 떨구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몇 분 뒤, 기선우가 전화를 걸어왔다. 말투는 몹시 황송했다.“누나, 이 돈 뭐예요? 학비쯤은 제가 마련할 수 있어요.”“너 아직 학생이고 공부가 본분이야. 학점 때문에 졸업 못하면 어떡해?”침대에 누운 채로 전화를 받아서 그런지 나는 목소리가 조금 풀려있었다.“누나 말 들어. 서울대 좋은 학교야. 시간을 알바에만 쏟아붓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 졸업해서 좋은 직장 얻으면 그때 갚아도 돼.”“그래도 저는...”기선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목이 메는 듯했다.내 마음도 씁쓸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너무 간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단순한 애를 잘 이용하고 있다. 기선우는 내가 착한 줄로만 알고 있다. 사실은 양의 탈을 쓴 승냥이인데 말이다.기선우 같은 출신으로 서울대에 입학하고 서울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노력을 감수해야 한다. 서란만 빼면 나는 기선우와 같은 불굴의 성품을 가진 사람을 진심으로 좋게 보고 있다.“아무 말도 하지 말고 앞으로 돈 부족하면 나한테 얘기해. 후원한다고 생각할 테니까. 졸업해서 직장 찾으면 그때 갚으면 돼. 그래도 마음에 걸리면 이자 조금 보태서 갚으면 돼.”나는 이렇게 덧붙였다.이 정도 돈은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선우를 도우면서 내 마음도 조금은 편해질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기였다.기선우도 많이 쪼들렸을 게 뻔했다. 아니면 개강 전날까지 알바할 리가 없었다.전화를 끊고 기선우는 돈을 받았다. 그러고는 카톡을 보내왔다.「고마워요 누나. 앞으로 꼭 갚을게요.」 답장은 하지 않았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잠에 들었다.이튿날 일찍 잠에서 깬 나는 정성껏 치장을 했다. 하얀 드레스는 우아함을 자아냈고 연한 화장으로 미모를 더 뽐냈다. 첼로를 챙겨 이기사와 서울대로 향했다.학교로 다시 돌아오니 감개무량했다. 생기발랄한 신입생들을 보아하니 갓 대학에 입학했을 때가 떠올랐다. 엊그제 같았다.그때의 나는 기쁨에 들떠있었다. 배인호가 다니는 학교에 합격해 그와 학우가 된다는 것만으로도
청담동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점심시간이었다. 윤 집사가 돌아온 나를 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여전히 때깔 좋은 음식들을 보니 배인호와 서란이 떠올라 갑자기 밥맛이 뚝 떨어졌다. 젓가락도 건드리지 않고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사모님,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의사라도 불러드릴까요?”윤 집사가 친절하게 올라와서 물었다.그녀가 서란의 어머니만 아니었어도 나는 진심으로 윤 집사와 같은 도우미를 좋아했을 것이다.“아니에요. 그냥 입맛이 없어서 그래요. 다른 도우미 분들이랑 같이 드세요.”침대에 누운 채로 짜증스럽게 말했다.윤 집사도 감히 더 묻지 않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온갖 사색에 잠겼다가 잠에 들었다. 정아가 연거푸 연락만 해대지 않았어도 나는 이튿날까지 쭉 이어 잤을 것이다.정아의 크나큰 목청에는 훙분이 가득 차 있었다.“와 대박!!! 여신님!!! 서울대 여신 첼리스트가 돌아왔다!!”“잉?”잠을 덜 깬지라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링크 보냈어. 한번 봐봐. 지금 당장!”민정이 이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부재중 통화를 확인하니 세희와 민정이 모두 3통이나 와 있었다. 역시나 모두 받지 못했다.민정이 보내온 카톡을 확인했다. 실눈을 뜨고 링크를 열어보니 동영상이었다. 내용은 오늘 서울대 콘서트홀에서 한 연주였다.나는 제일 좌측 자리에 있었다. 누가 찍었는지 몰라도 이따끔 나를 줌인해서 찍었다. 마치 날 짝사랑하는 사람이 찍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아래는 네티즌들의 열광적인 호응이었다. 아우라 미녀에, 전 서울대 음악과 여신에, 댓글을 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복잡해 잠이 확 깼다.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당연히 기분이 좋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 꽤 즐기고 있었다.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칭찬해 주는 사람이 적은 건 아니었지만 대부분은 아버니의 신분 덕이었다. 순수히 나의 개인 매력만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마지막 영상까지 보고 나니 정아가 때를 맞춰 전화를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