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들의 손에 이끌려 박수혁의 사무실에 도착한 박예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곧이어 경비원이 바로 그녀의 휴대폰을 빼앗았다.“오빠, 갑자기 왜 이래?”모르쇠를 대는 박예리의 뻔뻔함에 박수혁은 어이가 없었다.“왜 이래? 내가 왜 이러는 것 같은데?”박수혁의 말에 흠칫 놀라던 박예리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몰라? 데리고 들어와.”박수혁이 이한석에게 말했다.그와 동시에 소은해에게 수표를 받은 기자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기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박 대표님, 박예리 씨, 안녕하세요.”박예리는 기자가 자신의 정보를 팔아넘긴 줄 알고 바로 박수혁의 팔에 매달렸다.“오빠, 저 기자 말 다 거짓말이야. 난 기자들을 매수한 적도 없고...”아차, 박예리는 입을 다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면 저 남자가 누구인지도 몰라야 하는 게 인지상정, 마음이 급해 스스로 모든 걸 인정해 버린 꼴이었다.박예리는 어색하게 손을 풀고 말했다.“일...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박예리,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박수혁의 차가운 말투에 박예리는 숨이 턱 막혔다. 무슨 짓을 해도 넘어가 주던 오빠였는데... 왜 이러는 걸까?오빠를 건드리지 말라며 당부하던 엄마 이민혜의 말이 떠올랐다. 그런데 왜... 소은정 그 여자를 건드린 것뿐인데. 왜 나한테 화를 내는 거야!박예리가 다시 불쌍한 척 연기를 하려던 그때, 기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박예리 씨... 아직 잔금도 안 치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저도 그 돈 못 받겠습니다. 그러니까 전 놔주시죠.”“닥쳐!”다급해진 박예리가 소리쳤다.멍청한 기레기 주제에 눈치 없이 어딜 끼어들어!“박예리, 이제 네가 할 일은 하나뿐이야. 은정이한테 직접 사과해.”“내가 왜? 내가 왜 그 계집애한테 사과를 해! 결국 그 계집애가 피해 본 건 아무것도 없잖아.”이번 사건으로 소은정은 털끝 하나 못 건드린 데다 태한그룹 주가까지 떨어져 이미 짜
자신의 작은 악의가 나비효과가 되어 태한그룹에 이렇게 큰 피해를 입힐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애초에 그녀의 목표였던 소은정은 여전히 멀쩡하다니.집으로 돌아가자 역시 화가 잔뜩 난 박대한이 당장 나가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누구도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할아버지의 뜻도 오빠와 마찬가지였다. 소은정에게 직접 사과하라.그리고 사당에서 밤새 무릎을 꿇고 반성하라는 말과 함께 박대한은 방으로 들어갔다.다음 날, 성준상의 기일.성준상의 유골함 앞에서 서민영과 박수혁을 보게 될 거라곤 생각지 못한 소은정이 흠칫 멈춰 섰다.역시 두 사람을 발견한 성강희는 소은정의 팔을 끌고 다가갔다.“준상아, 수혁이가 나한테 잘해줘. 그래서 잘 지내고 있어. 걱정하지 마.”서민영은 쑥스러운 듯 박수혁을 힐끔 바라보더니 말을 이어갔다.“수혁아, 나도 알아. 소은정 그 여자 때문에 너도 많이 힘든 거. 최대한 빨리 다시 프랑스로 들어갈게. 그럼 소은정 그 여자도 잠잠해질 거야.”지금은 일단 물러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였다. 수혁이도 화가 풀리면 그녀를 모른 척할 수 없을 테지.박수혁이 대답하려던 찰나,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린 두 사람의 시야에 소은정의 애매모호한 표정이 들어왔다.무릎까지 내려오는 블랙 원피스, 아무런 액세서리도 하지 않은 심플한 차림이었지만 오히려 그녀의 분위기와 찰떡처럼 어우러졌다.“박 대표가 눈에 밟혀서 떠날 수나 있겠어? 그냥 남지 그래?”소은정이 비아냥거렸다.어딜 도망가려고. 내 복수는 이제 시작이야.“은정 씨가 여길 어떻게?”갑작스러운 소은정의 등장에 서민영의 표정이 바로 표독스럽게 변했다.“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두 사람이 왜 우리 형 앞에 있는 건데.”성강희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박수혁은 진작 성강희가 성준상의 동생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반면 성강희는 어렸을 때 유학을 떠나 형이 박수혁과 아는 사이라는 건 전혀 모르고 있었다.서민영은 당황하기 시작했다.만약
성강희의 말에 서민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웃음이 섞인 소은정의 눈빛에 입술을 꽉 깨물던 그녀는 바로 자리를 떴다.하지만 소은정은 그대로 그녀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서민영의 뒤를 바로 따르는 소은정의 모습에 박수혁도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성강희가 그 앞을 막아 나섰다.박수혁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성강희는 어떻게든 다시 확인받고 싶었다.차에 타려던 서민영은 그녀의 뒤를 따라온 소은정을 발견하고 당황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왜 따라오는 거야? 왜 날 비웃어주고 싶어서? 착각하지 마. 수혁이가 날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서 널 좋아한 건 아니니까.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벌써 다 잊은 건 아니지?”전 남자친구의 유언 때문이라지만 그녀는 유일하게 박수혁의 관심을 받았던 여자다.소은정, 넌 나한테 진 거야.말을 마친 서민영은 바로 차에 탔다. 붉은색 BMW, 그녀와 어울리는 화려한 차량이었다.멀어져 가는 서민영의 차량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소은정도 차에 올라타 엑셀을 밟았다.한적한 도로에 있는 납골당이라 넓은 도로에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차가운 눈빛으로 서민영을 추격하던 소은정은 그녀의 차량을 따라잡으려던 순간, 핸들을 오른쪽으로 홱 틀었다.“펑!”순간, 굉음과 함께 두 차량이 부딪혔다.찌그러진 차량 속, 서민영은 눈이 커다래진 채 소은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소은정은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그녀는 다시 유턴을 하며 서민영의 차와 마주 본 채 차량을 멈추었다.요란한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소은정은 서민영이 당황한 표정으로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 걸 지켜보았다.누구한테 전화를 하는 건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소은정은 다시 엑셀을 밟았다. “쾅!”굉음과 함께 공포에 질린 여자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찌그러진 채 옆으로 넘어진 차량, 자극적인 휘발유 냄새가 서민영의 코를 찔렀다. 소은정은 그제야 차에서 내려 또각또각 서민영 곁으로 다가갔다.무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서민영을 내려보고 있는 모습, 애초에 두 사람의
눈앞에 펼쳐진 참상에 항상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박수혁의 목소리도 살짝 떨려왔다. 엉망이 된 서민영의 차, 그 옆에 우아하게 서 있는 소은정, 굳이 묻지 않아도 누가 한 짓인지 알 수 있었다.항상 친절하고 착하던 소은정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보면 몰라? 내가 한 거야.”할 말도 다 전했겠다, 박수혁도 왔겠다 더 이상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이 바로 돌아섰다.이때 박수혁이 그녀의 앞을 막아 나섰다.“민영이랑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라 아니라고 말했잖아. 그런데 왜...!”박수혁은 소은정이 그와 서민영이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복수를 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느꼈던 질투에 대한 복수.비록 그 방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지만... 화는 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조금 기쁘기까지 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소은정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내가 너 때문에 이렇게 했다고 생각해?”순간, 박수혁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참 가만히 보면 은근히 자뻑이라니까. 세상 여자들이 다 당신을 좋아하는 줄 알지? 그래, 나도 좋아했었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말을 마친 소은정은 의아한 표정의 박수혁을 남겨두고 다시 차에 올라탔다. 천천히 움직이던 차는 박수혁 옆에서 다시 멈춰 섰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가고 소은정은 창문 틈으로 보고서를 휙 던진 뒤 바로 자리를 떴다.자뻑에 관종, 잘 어울리는 한 쌍이네.보고서를 집어 들어 내용을 확인한 박수혁의 얼굴에 분노가 피어올랐다.서민영과 남자가 소은정의 앞에서 얘기를 나누는 사진이었다.그날 밤, 일어났던 그 사고가... 설마...그날 박수혁이 끼어들지 않았다면 소은정은 분명 죽었을 것이다.그리고 소은정이 버리고 간 보고서는 서민영이 살인을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였다.그래서... 복수를 한 거였어?보고서를 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종이가 힘없이 구겨졌다. 성준상이 죽은 뒤로 이런 충격은 처음이었다.질투로 인한 복수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실망스러우면서
성강희도 박수혁도 고개도 돌리지 않고 차에 탄 채 자리를 떴다. 넓은 도로 위, 그녀는 쓰레기처럼 버려지고 말았다.이대로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민영은 떨리는 손으로 큰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전화를 받은 그는 다짜고짜 욕설을 내뱉었다.“야, 너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태한그룹에서 모든 투자금을 회수했어! 우리 가족 길바닥으로 쫓겨나게 생겼다고! 너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당황한 서민영이 입을 뻐금거리던 그때, 경적소리가 들려왔다.그래, 수혁이가 이렇게 날 버리고 갈 리가 없어. 아직 기회가 있는 거야.하지만 고개를 돌린 서민영은 다시 절망하고 말았다. 그 차량은 박수혁이 보낸 차량이 아니라 경찰 차였으니까.차에서 내린 형사가 사무적인 목소리로 물었다.“서민영 씨 되시죠? 살인미수로 긴급 체포합니다. 당신은 묵비권을...”무표정한 얼굴로 미란다 원칙을 읊는 형사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살인미수? 정말 감옥에 가는 거야?마지막 일말의 희망까지 사라지고 서민영은 그녀를 향한 박수혁의 자비가 드디어 바닥이 났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공포에 질려 부들부들 떠는 서민영의 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그대로 경찰차로 연행되었다.다음 날, SC그룹, 소은찬 덕분에 거성 프로젝트는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고 소은정은 다른 프로젝트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대표가 된 이상, 거성 프로젝트를 제외하고도 매일 그녀가 확인하고 검토해야 할 프로젝트와 보고서들은 넘쳐났다.회의를 마치고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나오는 소은정을 향해 우연준히 휴대폰을 건넸다.“대표님, 성강희 대표님께서 방금 전 전화를 주셨습니다. 급한 일이신 것 같은데요?”강희가?고개를 끄덕인 소은정은 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몇 초 후, 성강희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은정아, 서민영이 체포됐어!”기사를 확인한 성강희는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소은정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이혼 뒤에도 소은정을 괴롭게 만들던 종양 같은 여자
댓글 반응도 뜨거웠다.“이 정도면 사이코패스 아니야?”“청부 살인? 미쳤다 정말...”“박수혁... 여자 보는 눈이 저렇게 없는 사람이 기업 운영은 어떻게 하나 몰라? 아니면 취향이 좀 이상한 건가?”“요즘 태한그룹 주식이 너무 많이 떨어지는데 존버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버려야 하나?”......그리고 검색어 2위에는 소은해의 이름이었다.소은해는 자신의 공식 계정을 이용해 기사 링크를 공유했다.“쌤통이다. 복수의 마지막은 오빠가 대신 해줄게@소은정”게다가 덧붙인 말 덕분에 소은해의 팬덤이 들썩거리기 시작했다.“헐, 드라마 남주 같아!”“오빠, 저희도 동참할게요!”“오빠, 완전 사랑꾼!”“은정 누나는 솔로로 남겨주세요!”국내를 넘어 국제적으로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톱스타가 스캔들 상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전례 없는 일이었다.소은해의 발언에 그의 거대한 팬덤들도 소은정을 응원하기 시작했고 서민영은 물론 박수혁까지 싸잡아 욕을 먹기 시작했다.소은정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요즘 주가가 많이 떨어지긴 했지만 박씨 일가에게 큰 타격을 입히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3시간 뒤, 태한그룹이 정식으로 입장을 발표했다.“박수혁 대표와 서민영 씨는 지인일 뿐 연인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박수혁 대표를 향한 무분별한 인신공격과 모욕 댓글에 대해서는 법적인 수단으로 처리할 예정입니다...”하지만 몇 마디 입장 성명으로 사람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한편, 기사와 함께 소은정의 가족들도 그녀가 하마터면 사고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소찬식은 바로 형사, 검사, 판사에게 압력을 넣어 감형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었고 소은호는 회사 일은 신경 쓰지 말고 며칠 푹 쉬라고 말했다.소은찬은 평소대로 몸은 괜찮냐고 무뚝뚝하게 물어왔고 소은해는 자신의 인지도를 이용해 서민영을 향한 여론 공격을 주도했다.......그렇게 긴 하루가 흐르고 소은정이 퇴근을 하려던 그때, 우연준이 사무실로 들어왔다.“대
소은정이 차갑게 웃었다. 정말 날 바보로 아는 건가?그깟 사과가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지금 이 자리에서 박예리가 무릎을 꿇는다 해도 소은정은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다.소은정의 태도에 충격을 받은 박예리는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고개를 숙였다.소은정은 더 이상 그녀의 말에 고개를 숙이던 계집애가 아니다. 그녀는 이제 원하는 건 모두 다 얻을 수 있는 SC그룹의 대표이사, 실제로 그녀 덕분에 태한그룹도 요즘 주가 하락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소은정... 너 지금 그게 사과하러 온 사람한테 할 말이야? 적어도 예의는 지켜야지!”박예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차피 할아버지 말대로 사과도 했다. 소은정이 받아들이고 말고는 그녀가 더 이상 간섭할 수 없는 일이었다.소은정은 시간을 확인한 뒤 바로 사무실 책상 위에 있는 전화기를 들었다.“경비 불러요. 손님 나가십니다.”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이 커다래진 박예리의 얼굴을 보며 소은정은 한 마디 덧붙였다.“그리고 앞으로 SC그룹 사람들은 들여보내지 마세요.”“소은정, 너무 잘난 척하지 마. 네가 언제까지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사과하러 와서 쫓겨났다는 사실이 퍼진다면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그녀가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이다.“잘난 척? 박예리 씨, 일단 사과하는 법부터 배우고 오세요. 못 배운 티 내지 말고.”이때 노크와 함께 경비들과 우연준이 들어왔다.“박예리 씨, 가시죠.”우연준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분한 마음에 소은정을 한참 노려보던 박예리는 하이힐 뒷굽으로 바닥을 쾅 내리친 뒤 사무실을 나섰다.하지만 기세등등하게 SC그룹을 나온 지 얼마 안 돼 박예리는 후회가 밀려왔다.돌아가서 할아버지와 오빠한테 뭐라고 말해야 하지? 아, 조금만 참을걸.본가로 돌아가는 동안, 박예리는 불안감에 손톱을 물어뜯었다.집에 들어선 순간, 박대한은 그녀를 향해 찻잔을 던졌다. 다행히 제때에 피한 덕에 맞지 않았고 찻잔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할아버
박수혁과의 이혼으로 유명세를 얻은 주제에 이제 와서 능력 있는 여자인 척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스캔들이 끊이지 않는 소은정의 문란한 사생활도 꼬집었다.그제야 소은정은 고개를 들어 남자와 시선을 마주쳤다. 아름답지만 차가운 눈빛에 재벌 2세도 흠칫 뒤로 물러섰다.“네, 무시하는 겁니다.”별 어중이떠중이까지 다 들러붙네.더 이상 남자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소은정은 한유라에게 가기 위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이대로 물러서면 체면이 말이 아니라는 생각에 남자는 짜증스런 얼굴로 소은정의 손목을 잡아끌었다.“야, 네가 뭐가 그렇게 잘났어? 박수혁한테 버림받은 여자 주제에. 너 같은 중고품한테 관심 가져주면 감사합니다 하고 넙죽 받을 것이지. 어디서 도도한 척이야. 아, 너 돈 좋아하지? 야, 얼마면 되는데. 얼마 주면 나랑 마실 거냐...”남자가 말을 끝내기 전에 소은정은 그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빼앗아 얼굴에 끼얹었다.술 방울이 남자의 머리카락을 따라 뚝뚝 떨어졌다. 남자의 고함에 주위 사람들이 하나둘씩 두 사람을 바라보며 수군댔다.소은정은 욱신거리는 손목을 어루만지며 말했다.“중고품? 요즘 시대에 여자를 물건 취급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는 줄 몰랐네요. 정신 좀 차리라고 그랬어요. 그리고 술?”소은정은 남자의 행색을 훑어보았다. 로고가 조잡한 명품들, 졸부들이나 입는 옷차림에 소은정은 피식 비웃음을 날렸다.“내가 마시는 술, 네가 살 수나 있을까?”화가 난 듯 그녀를 노려보는 남자와 달리 여유롭게 미소를 짓는 소은정은 도도한 여왕처럼 빛났다. 그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는 타고난 귀티가 그녀의 아우라를 감쌌다.하지만 술을 뒤집어쓴 재벌 2세는 이미 이성을 잃기 시작했다. 돈 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여기저기서 갑질을 하는 게 일상인 남자는 이런 수모를 견딜 수 없었다.여기서 물러서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될 게 분명했으니까.박수혁한테 걸레짝처럼 버려진 계집애 주제에. 감히...“너... 죽었어!”남자가 이를 악물고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