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지유.”이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네?”지유가 그를 바라보았다.“그 여자 너지?”지유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그녀는 빠르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대표님, 농담도 참. 저는 둘째 날이 돼서야 도착했잖아요. 게다가 윤정 씨 보고 대표님 옷도 가져드리라고 했고요. 만약 제가 그 여성분이었으면 대표님께서 진작 알아채지 않았겠어요? 차라리 저였으면 좋겠네요. 그러면 지금쯤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웃으면서 얘기하는 그 모습을 보니 이현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하지만 분명한 건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와 잠자리를 가졌다는데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그러면 쓸데없는 추측하지 말고 누군지 알아 와!”이현은 이 한마디만 남기고 병실을 나가버렸다.그가 나간 뒤 지유는 곧바로 웃음을 지워버렸다.그리고 몇 초 뒤 그녀가 한숨을 돌릴 새도 없이 의사 한 명이 병실로 들어왔다.의사는 병실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가족분은요?”“괜찮아요. 저한테 얘기해주시면 돼요.”의사는 진단서를 보더니 미간을 미세하게 찡그리고 말했다.“환자분 혹시 임신한 거 알고 있었어요?”그 말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임신?설마...고작 그 한 번으로 임신이 됐다고?지유는 조금 현실감이 없었다.“선생님, 혹시 다른 환자분과 헷갈리신 거 아니에요?”의사가 단호하게 말했다.“온지유 씨 맞으시잖아요. 온지유 씨는 지금 임신한 상태입니다. 이제 막 한 달 정도 됐네요.”가만히 생각해보니 생리가 며칠 늦어지기는 했다.하지만 몸이 피곤할 때면 이런 일도 많았기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설마 임신일 줄이야.“어제는 정말 위험했어요. 온지유 씨는 물론이고 아이한테도요. 그러니 다음에는 절대 이런 일 없도록 하세요. 그리고 남편분한테는 계속 옆에 있으라고 몇 마디 당부해야겠네요.”“선생님!”지유가 다급하게 말했다.“저 임신한 거 누구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그날 승아는 울면서 뛰쳐나갔지만 지금은 한껏 여유 있는 얼굴로 웃고 있다.그녀가 활짝 웃을 만한 즐거운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지유는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는데 승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조만간 그쪽은 아무것도 아니게 될 테니 일단 며칠은 봐주도록 할게요. 어차피 당신은 곧 오빠한테 버림받을 테니까요.”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지유는 벌써 이긴듯한 승아의 미소를 볼 수 있었다.지유는 주먹을 꽉 쥐더니 자기도 모르게 배를 바라보았다.아이가 생긴 이상 희망은 품어야 했다.사무실에 도착한 후 그녀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대표이사실로 향했다.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현은 온라인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잠깐 회의를 스톱하고 물었다.“무슨 일 있습니까?”“네.”이현은 컴퓨터를 끄고 소파에 앉아 그녀에게 물었다.“무슨 일인데?”그의 맞은편에 앉아 눈을 똑바로 마주쳐오는 모습이 뭔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사람 같았다.지유는 순간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지 몰라 일단 아무 말이나 던졌다.“아까 올라오는 길에 노승아 씨를 만났어요. 즐거워 보이더라고요.”“할 말이 그거야?”지유는 입을 달싹이더니 그와 다시 눈을 마주치고 본론을 꺼냈다.“저한테 그날 밤 함께 했던 그 여성분 찾아내라고 하셨잖아요.”“그랬지?”이현은 아직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만약에 말이에요. 정말 만약에 그 여성이 임신했다고 하면 대표님은 어떻게 하실 거예요?”지유는 이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에 서둘러 한마디 덧붙였다.“술 취한 상태라 아무리 대표님이어도 피임을 못 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만약 그 여성분이 임신이라도 했으면 어떡하실 생각이세요?”“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참 세심해?”지유는 흠칫하더니 이내 최대한 자신은 그날 밤 그 여자가 아니라고 선을 그으면서 말했다.“우리 아직 이혼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만약 다른 여자가 대표님 아이를 임신하면...
그녀의 행동에 이현은 인상을 찌푸리더니 손을 거두어들였다.“내가 무서워?”지유는 아무 말 없이 그저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그녀에게 거절당했다는 사실에 어쩐지 심기가 불편해진 그는 그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다른 일 없으면 이만 나가 봐.”지유는 오랜 시간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아이가 생기고 나니 어딘가 변한 것 같기도 했다.지유는 아이를 꼭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같은 것이 생겼다.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예를 갖춰 말했다.“회의 중 실례했습니다. 분부하신 일은 꼭 완수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러고는 그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그녀의 말에 이현은 또다시 기분이 나빠졌다.몇 분 뒤 진호가 들어와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회의가 아직...”“나가.”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이현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사무실에서 나온 지유는 그만 다리가 풀려버렸다.이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충동적으로 감정적으로 굴면 안 된다. 항상 이성적으로 절대 이현에게 임신했다는 사실을 들키지 말아야 한다.결혼식 당일에도 선을 넘지 말라는 엄포를 놓았던 그였기에 방금 한 말도 허투루 들어서는 안 된다.여기까지 생각한 지유는 서둘러 지희에게 문자를 보냈다.[지희야, 나 좀 도와줘.][무슨 일인데?][여자 한 명 알아봐 줄래?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필요해.][??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두 사람 잘 되어 가고 있는 거 아니었어? 여이현이 반할 만한 여자가 왜 필요한데 네가??]지유는 이현의 성격을 잘 알고 있다. 그가 직접 포기하겠다고 얘기하지 않는 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날 밤 그 여자를 찾아내고 말 것이다.만약 인내심이 다 한 여이현이 직접 그 여자를 찾아내게 되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그에게 들키는 순간 배 속의 아기는 빛도 보지 못하고 사라지게 될 것이다.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게든
“주소영이요...”주소영이라는 아이는 풍성하고 긴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무척이나 연약하고 또 낯도 가리는 듯했다.체형은 지유와 비슷했지만 얼굴은 승아와 닮아 있어 청순하고 여린 것이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성상이었다.사장이 지유에게 그녀를 소개했다.“우리 클럽에 막 들어온 신입인데 얼굴이 반반해요. 아직 교육 기간이라서 제대로 된 일은 해본 적이 없어요. 집은 시골이고 엄마가 아프다고 돈이 필요하다고 왔고요. 문제 될 거 아무것도 없이 깔끔해요.”그녀는 지유의 조건에 딱 들어맞았다.예쁘고 청순하며 남자들의 보호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이현도 좋아할 만한 그런 여자였다.“이분으로 할게요.”지유의 말에 소영은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저, 저는 신입이라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뭘 원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몸 같은 거 안 팔아요.”지유는 그녀의 두려움을 캐치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소영 씨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돈은 만족할 만큼 줄 생각이에요. 물론 강요는 안 해요. 하고 싶으면 연락 줘요.”그녀는 소영에게 명함을 내밀었다.소영은 잔뜩 겁먹은 채로 명함을 받았다.지유는 행여나 일이 어그러질 것을 염려해 사장에게 말했다.“몇 명 더 알아봐 줄 수 있으실까요? 돈은 추가로 드릴게요. 제가 하루빨리 이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요.”사장은 돈을 더 주겠다는 말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는 대로 더 찾아드릴게요.”지유는 고개를 끄덕이고 룸을 빠져나왔다.소영은 명함을 손에 꽉 쥐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그러다 지유가 룸을 나간 1분 뒤 그녀 역시 룸을 빠져나와 지유를 불렀다.“저기요, 잠시만요!”지유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소영은 그녀 앞에 서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금방이라도 피가 날 것만 같았다.“돈... 돈은 얼마나 주실 거예요?”그녀는 돈이 필요했다.엄마의 병원비를 대줘야 했고 어린 남동생 두 명도 돌
“생긴 것도 예쁜데 어리기까지 하잖아. 남자들은 이런 유혹 쉽게 못 떨쳐내.”지희는 그녀가 걱정되었다.아무리 이성적인 남자라도 어리고 예쁜 여자 앞에서는 충동적일 수밖에 없게 된다.하지만 지유는 이 방법 말고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가 없었다.“나한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지희야.”지유는 그녀를 향해 애써 웃어 보였다.“만약 여이현이 정말 저 애를 좋아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이렇게 해야만 해.”그녀는 자신의 아이로 도박을 걸 수는 없었다.지희는 그녀의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이렇게까지 얘기하는 걸 보면 분명히 그만한 사정이 있을 거로 생각해 더 이상 묻지 않았다.지유가 쉽게 털어놓을 수 있는 얘기였으면 진작에 털어놓았을 테니까.고작 며칠 안 본 사이에 이런 결정을 했다는 건 분명히 심각한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솔직히 가끔은 여이현이라는 남자와 엮이지 않았더라면 지유는 훨씬 더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뭐가 됐든 조심해. 여이현 뿐만 아니라 저 여자애도. 생긴 건 순진무구한데 또 누가 알겠어. 이상한 마음이라도 먹을지.”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어차피 그때가 되면 이미 이혼하고 난 뒤일 테니 당장은 크게 걱정은 되지 않았다.이혼하고 나면 여이현과는 더 이상 접점이 없게 되고 그러면 앞으로 그에게 어떤 여자가 달라붙든 그녀와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지유는 아무것도 묻지도 않고 도와주는 친구를 보며 이제껏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 지희와 친구가 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그녀는 그 생각에 마음이 따뜻해져 지희를 와락 끌어안았다.지희는 갑자기 안겨 오는 지유에 조금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뭐야 갑자기?”“그냥. 너밖에 없다 싶어서.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항상 나 도와주잖아.”“그 사실을 새삼 깨달은 거야? 나도 원해서 하는 거야. 너도 나 도와준 거 많잖아. 아무것도 없던 내가 여기까지 오는 데 네 도움이 컸어.”지유가 지희에게 고마운 마음이 있듯이 지희 역시 지유에게 고마웠다. 두 사
그 뒤로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 지희는 회의가 있다며 먼저 돌아갔다.지유는 그녀를 보내고 클럽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어릴 때가 생각나 중학교에 왔다.중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언 십 년이 넘었다.그간 시간이 많이 흘러서 그런지 학교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별관도 생기고 그 외에 실내 운동장도 더 커진 것 같았다.다만 학교 정문 앞에 있던 큰 돌덩이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돌덩이 위에는 [명랑중학교]라는 학교 이름이 새겨져 있다.이곳은 그녀가 다녔던 학교이며 여이현과 만날 수 있게 해준 곳이기도 했다.8월 13일, 지유는 아직도 이날을 기억하고 있다. 하마터면 세상과 작별할 뻔한 날이었으니까.지유는 그날 친구들과 함께 정문을 나서다가 큰 가방을 짊어지고 손에는 총을 든 복면 쓴 남자들과 마주하게 되었다.지금이라면 총기 소지는 상상할 수도 없지만 그때는 사회가 아직 어지러워 이러한 일이 이따금 일어나고는 했다.흉악범들은 아이들을 거칠게 끌어내고는 인질로 삼았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지유였다. 지유는 흉악범들의 팔에 목이 졸리고 머리에는 총이 겨눠졌다.당시 그녀는 고작 15살에 불과했다.처음 겪는 상황에 친구들은 패닉 상태가 되어 누군가는 소리를 지르고 누군가는 도망을 쳤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들려오는 요란한 총소리.지유는 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흉악범들은 아이들을 인질로 삼은 채 어느 한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백화점 안 손님들에게도 총을 겨누며 위협을 가했다. 그때 그들의 가방이 기둥에 부딪히고 그 순간 대량의 현금다발이 바닥에 쏟아졌다.지유는 그제야 이 사람들이 은행을 털고 나온 강도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사람 하나를 때려죽인 그 순간부터 강도들의 결말은 이미 정해졌기에 그들은 인질들의 목숨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백화점 밖에는 어느새 경찰들이 포위하고 있었고 그들을 향해 투항하라는 경고를 내렸다.강도들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 자리에 있
지유는 당시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구해준 그 남자애를 만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그녀를 서서히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다.반년을 휴학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간 지유는 그 남자애를 찾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그러다 드디어 그 남자애의 이름이 무엇인지 지금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를 알아냈다.남자애의 이름은 여이현으로 현재 이 지역에서 이름있는 명문고를 다니고 있었다.사고 당시 들었던 ‘변우석’이 아닌 ‘여이현’이라는 이름에 그녀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정황상 그가 분명했다.그녀는 어쩌면 친구들끼리 부르는 다른 이름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지유는 그를 목표 삼아 열심히 공부해 드디어 그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생각보다 소극적이었고 그저 뒤에서 그를 몰래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그도 그럴 것이 이현은 운동도 잘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으며 더군다나 집안도 무척이나 좋았다.이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그와 닿을 수 없는 하나하나의 두꺼운 벽과도 같았다.어쩌다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갈 때면 혹시 자신을 알아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지만 그날 일은 이미 잊은 것인지 이현은 매번 눈길도 주지 않고 가던 길을 지나갔다.“지유야.”추억 속에 젖어 멍하니 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고개를 돌려보니 나민우가 이쪽으로 다가오며 그녀에게 손짓하고 있었다.지유는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민우야, 여긴 어쩐 일이야?”“오늘 갑자기 어릴 때 생각나서 한 번 와봤어. 그나저나 네가 여기 있을 줄은 몰랐네.”“응, 나도 오늘 예전 생각이 나서 들렸어.”민우는 오랜만에 보는 학교를 보며 감개무량해졌다.“어떻게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가냐. 학교도 우리 때와는 많아 달라졌네.”“그러게.”지유는 학교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마치 자신들의 과거를 보는 것 같아 미소가 절로 나왔다.민우는 고개를 돌려 그런 지유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렸다.“너는 이곳에 영원히 안
“모교에 이렇게라도 보답할 수 있어서 저는 영광이라고 생각해요.”서승만은 자신의 학생이 이렇게 출세한 것도 모자라 모교를 잊지 않고 기부까지 한 사실이 무척이나 뿌듯하고 또 고마웠다.지유는 의도치 않게 두 사람을 만나게 되어 이대로 자리를 벗어나기 곤란해져 묵묵히 두 사람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민우가 100억이나 기부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그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어릴 때 해외로 갔음에도 여전히 모교를 잊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했다.요즘 시대에 자신이 다니던 학교에 기부할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을 테니까.“지유 너는 지금 여진 그룹에서 일한다며?”서승만이 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지유는 순간 어리둥절해져서 그를 바라보았다.“계속 잘 다니고 있는 거지?”“어떻게 아셨어요?”아무리 서승만이 그녀의 담임이었다고는 하나 제자 한명 한명이 지금 뭐 하는 것까지 다 알고 있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서승만은 웃으며 답했다.“여 대표님이랑 몇 번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네 얘기를 들었어. 그런데 그간 한 번도 만날 기회가 없었네.”지유는 이현의 비서이기에 그의 스케줄은 다 꿰고 있었지만 서승만과 만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그러게요. 마침 제가 옆에 없을 때 두 분이 만나셨나 봐요.”서승만은 그녀와 몇 마디 더 나누더니 뭔가 떠오른 듯 민우를 보며 말했다.“참, 며칠 뒤에 학교 행사가 있는데 그때 민우 네가 와서 아이들한테 얘기나 해주고 그래. 그리고 너 그때...”서승만은 민우와 얘기를 더 나누다 일이 있어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민우는 발걸음을 멈추고 학교를 구경하며 뒤에서 천천히 따라오는 지유를 기다렸다.그리고 그녀가 옆으로 다가온 뒤에야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힘들지 않아?”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조금 힘드네.”“이쪽 벤치에 앉아. 이따 선생님이 우리 밥 사주신대. 식사 하고 나서 너 데려다줄게.”민우는 먼저 벤치의 먼지를 털어준 다음 그녀를 앉혔다.“알겠어.”벤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