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요일.나는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고, 많은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서 조금 귀찮았다.회사에 도착하자마자 매일 떠들썩하던 사무실에서 갑자기 너무 조용해서 내가 층을 잘못 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사무실에 도착하자마자 유빈이 문을 두드리고 성큼성큼 걸어 들어와 다크서클이 깔린 얼굴로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한 대표님, 오늘 회의를 그대로 진행할까요?”“당연하죠! 왜 안 해요? 계획대로 해요!”나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그가 무엇 때문에 흥분했는지 묻고 싶었다.그러자 그가 씩씩하게 대답했다.“네, 그럼 바로 확인하겠습니다.”10시에 대회의실에 도착했는데, 안이 소란스러웠다. 많은 사람이 어떻게 나를 몰아붙이려는지 떠들고 있었고, 반드시 오늘 결제해야 한다고 했다.나는 회의에 오기 전에 구 변호사를 불렀다. 신흥을 인수한 후, 그와 위탁 계약을 체결했으니 그는 제 개인 변호사일 뿐만 아니라, 신흥의 법무이기도 하다.유빈은 회의를 주재하며 여전히 설명하고 있었는데, 내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서둘러 그 사람에게 소개했다.아래 사람들을 힐끗 보니 한결같이 적개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앞장선 사람은 내가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직접 물었다.“한 대표님, 오늘 실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가 여기 온 지도 며칠 됐으니 미루지 말아요. 먹고 마시는 것도 다 돈이에요!”“신호연이 오라고 했어요? 그럼 그 사람이 당신들을 위해 결제하라고 하면 되잖아요. 나한테 말할 필요 없어요.”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말하는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았다.그는 즉시 펄쩍 뛰더니, 흉악하게 나를 향해 으르렁거렸다.“뭐라고? 당신들 이리저리 돌릴 거야? 두 사람 이혼한다면서? 우리가 우스워? 갖고 노니까 재미있어? 앞에서 그렇게 보여주고 뒤에서 뭔 짓 하는지 모를 줄 알아? 우리가 거지야? 지금은 당신이 인수하지 않았어? 그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결제해.”다른 사람들도 모두 맞장구 치며 마치 들보를 치는 광대들처럼 굴었다.
나는 그들의 포효에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했다.“여러분, 당신들은 신호연과 협력하고 계약이 있어요. 어떻게 물건을 납품하고 결제하는지, 갑을 쌍방이 어떤 의무를 이행하는지, 모두 똑똑히 알고 있어요. 당신들은 정말 계약서가 휴지 한 장이라고 생각하나요? 매번의 계약이 완성되고, 대금이 결제되는데, 만약 연체된 것이 있다면 당신들은 신호연을 찾아서 결제받으면 되잖아요. 설마 신호연이 당신들에게 결제하지 않았단 말인가요?”“그럼 잔금도 많이 밀렸어요!”누군가 떠들어댔다.“잔금? 정말 뻔뻔하게도 그게 잔금이라고 말하고 있는 거야? 잔금을 나한테 달라고 하는 건, 당신들이 정말 거지라서야, 아니면 나 같은 여자가 만만하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 같은 낯짝으로 감히 장사판을 기웃거려?”나는 강경한 어투로 말을 뱉고 이해월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료 뭉치를 건네주었다. 자료는 ‘턱!' 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 테이블에 떨어져 멀리 미끄러져 나갔다.“정말 당신들이 하는 짓이 빈틈없는 줄 알아? 당신들은 신호연과 계약 기간 조잡한 물건으로 공사품질을 속이고 있는데,내가 개발업자를 함께 찾아서 이야기할까, 아니면 관련 부서에 보고해서 조사를 시작할까? 그 업주들 안 와도 돼, 명단은 나한테 있어!”나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란 사람에 대해 아마 들은 바가 있을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소송이고, 게다가 백승불패의 철부리 변호사도 불렀어. 모두 함께 수법을 써봐, 내가 반드시 당신들에게 좋은 의견을 줄 거야. 만약 당신들이 이런 방법으로 이길 수 있다면, 당장 당신들에게 결제해주고 한 푼도 빚지지 않을 거야.”회의실은 갑자기 조용해졌고, 나는 돌아서서 떠나려 했다.“이의 없는 사람은 내 회사를 떠나세요. 구 변호사님, 오늘 온 사람들의 모든 협력 계약을 해지해 주세요. 그들은 저 한지아와 협력할 자격이 없습니다.”“잠깐만요, 한 대표님! 오늘 회의라는 것이...”유빈은 나를 쳐다보더니 표정이 복잡해진 채 달갑지 않은 것
나는 이 기세를 몰아 회사 전체 직원들을 불러 회의까지 소집했다. 이로써 이번 이슈는 일단락되었다. 신호연은 지금쯤 형원그룹에 정신이 팔려 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것이다.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혜선에게 연락해 형원 그룹 내부 상황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가끔 어떤 일들은 사전에 예상하여 후폭풍을 미리 준비하고 조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위기의식을 항상 갖고 있어야 어떤 일이든 나중에 잘 방어할 수 있다. 도혜선은 정말 훌륭한 스파이 자질이 있었다. 도혜선이 나를 위하는 마음은 너무 잘 알고 있다. 그 마음에 보답하는 최선이 도혜선에게 하는 이런 내 부탁들이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내키지 않은 그 무언가가 계속 있었다. 머리가 복잡했고 어제저녁의 충격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해월은 종일 싱글벙글해 있었지만 나는 같이 즐길 수 없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이미연에게 전화해 언제 퇴근하는지 물었다. 이미연은 나의 조급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만날 시간을 바로 정했다. 약속 장소를 따로 정하지는 않았고 내가 술과 안주를 사서 강변 옆 잔디밭에서 만나기로 했다. 강변에 도착한 이미연은 강과 잔디밭의 어우러진 공기에 한껏 들떠있었다. “지아야, 여기 너무 좋다.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이미연은 좀 더 편하게 즐기기 위해 차에 있는 츄리닝으로 갈아입고 다시 자리에 왔다. 우리는 잔디밭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서로 마주 보며 맥주캔을 부딪쳤다. 이미연은 그 누구보다도 내 생각을 잘 알고 있는 친구다. 이미연은 맥주 한 모금 마시자마자 배현우에 관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 하자 이미연은 본인 생각에 대해 솔직히 말했다. “네가 좀 더 생각해 봤으면 좋겠어. 차이가 너무 많이 나. 한 명은 닿을 수 없는 저 하늘 끝에 있는 별 같고, 한 명은 수심도 안 보이는 바다 밑에 있는 것 같아. 물론 네가 엄청나게 노력은 하겠지. 근데 분명히 힘들 거야. 네가 배현우를 따라갈 수 있을까?”사실 나도 늘 생각해 왔던 문
장영식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요일이면 서울에 도착할 수 있다고 한다. 해외 나간 지가 벌써 20일이 넘었는데 그동안 온 연락은 두세 통의 전화가 전부다. 전화에서 장영식은 이번 출장으로 많은 정보를 얻었다고 했다. 그 말에 내 맘속의 큰 짐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어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왜냐하면 배현우가 나에게 준 시간은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지만, 기대를 만족시키기에는 아직 많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배현우가 홍콩으로 간 이후부터 지난번 발표회 날까지 그날 저녁 먼 곳에서 한 번 본 이후로 서로 연락을 하지 않았다. 배현우는 귀국 후 전화 한 통 없었고 나도 먼저 전화해야 할 특별한 용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전에 고객사와 미팅을 마치고 회사에 도착하니 점심이 다 돼 갔다. 진후빌딩 앞에 도착하니 이세림이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다. 나를 본 이세림은 활짝 웃으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한 대표님. 오셨어요? 우리는 정말 인연인가 봐요.” 이 말을 듣는 순간 이세림이 나를 만나러 왔음을 알았다. 너무 의외였다. “혹시... 날 보러 온 거예요?”“아니에요. E 파크몰에 갔다가 시간이 비어서 지아 씨와 점심이나 같이 하려고 온 거예요. 서프라이즈 주려고 연락 안 하고 온 건 데 없어서 서운할 뻔했어요.” 김빠진 얼굴을 했던 그녀는 방긋 웃었다.“안 그래도 정말 괜찮은 맛집이 있어서 지난번부터 같이 가보고 싶었거든요. 지난번에 못 봐서 너무 아쉬웠어요.” 이세림에게 얘기하면서 나는 조수석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이세림과 같이 할머니 집밥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난번 도혜선이 날 데리고 갔던 적이 있다. 그때는 유빈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스릴이 넘쳐나긴 했었다. 이세림도 역시 할머니 집밥 음식이 입에 너무 잘 맞는다고 했다. 이런 맛을 쉽게 찾을 수 없어 더 맛있다고 했다. 어릴 적부터 호주에 살면서 집에 한식 셰프가 있었지만, 한식을 먹는 일은 거의 드물다고 했다. 좋은 집안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금수저임
나는 깜짝 놀라 이세림을 바라봤다. 그리고 서서히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세림은 물티슈 한 장을 뽑아 손을 닦으면서 나를 보고 웃었다. 이세림의 하얀 얼굴에 띈 웃음은 정말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매력이 있다.“오빠는 늘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사촌 동생이라고 소개하죠.”“아니에요?” 나는 이세림의 말이 끝나자마자 되물었다. 그동안 배현우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내색은 못 했지만 아주 불쾌했다.“맞긴 하죠. 그런데 사실 저는 양녀예요.” 이세림은 대수롭지 않은 듯 나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심장이 예고도 없이 쿵쾅거렸고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듯 팔다리가 축 늘어졌다. 혈연관계가 없는 동생이라... 나에게는 왜 항상 이런 일들만 생기는 걸까?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이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계속 얘기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것과 별개로, 후회되는 게 있다. 이세림과의 얘기가 길어지면서 배현우와 나의 관계가 사촌 동생 얘기까지 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무심결에 보여준 것이다.“우리 엄마가 현우 오빠 고모예요. 정말 강하고 훌륭한 분이에요. 천우 그룹 전임 집행관이셨죠.” 이세림은 물티슈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닦으며 말했다. 이세림은 정말 정갈하고 깔끔한 사람이다. 네일케어도 빠짐없이 손톱 하나하나 다 받았고 큐빅으로 장식해 놓아 흠집이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전임 집행관이요?” 나는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물었다.“네. 맞아요. 기존에 있던 천우 그룹 재단은 전부 저희 엄마가 관리했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겨우 현우 오빠에게 돌려준 거예요.”내 머릿속은 이들의 가족관계를 그리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인을 바꾸기 위해 오랫동안 불안정했다고 했는데 현우 씨와 고모 사이의 관계가 불안정한 거였을까?그러면 왜 이번에는 전부 현우 씨에게 넘길 수 있었을까? 이 사이에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었을까? 무슨 이유로 전임 집행관이 아예 손을 뗀 걸까? “돌려줬다는 건 무슨 뜻이에요?” 나는 의아한 얼굴로 이세림에게 물
갑자기 온 전화에 너무 당황스러웠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수많은 감정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처음에는 거절 버튼을 누르려고 했으나 손이 미끄러져 통화 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수화기 너머 배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왜 이렇게 늦게 받아요?” 통화 첫마디가 불평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나는 어이가 없어 아무 말 없이 듣기만 했다. 늦다고? 안 받으려고 했거든!내가 대답이 없자 배현우는 계속해서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무... 무슨일?” 나는 제 발 저린 도둑처럼 자신 없는 듯 낮은 소리로 물었다.“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요.” 배현우는 예민한 말투로 계속 묻고 있었다.“그러면 기분이 좋아야 할까요?” 인제야 연락해 놓고 내가 연락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드리길 바라냐고 외치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있었다.“왜 여태껏 전화 한 통이 없어요. 내가 귀국한 걸 알고 있었잖아요!” 배현우는 오히려 당연한 듯 나에게 불평을 토로했다. 배현우의 뻔뻔한 태도에 기분이 좀 상했다. “귀국하신 분이 휴대전화에 뜬 부재중 전화는 못 보셨나 보네요. 항상 본인만 사정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드릴까요? 이혼녀들은 사사건건 시비를 가리지만, 본인 주제는 잘 알고 있더든요.”말을 내뱉는 순간 내 표현이 너무 과했다는 걸 느꼈다. 무의식 속에 혀를 깨물었고 진한 피비린내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다시 얘기하려는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이가 없어 선 채로 휴대전화만 뚫어지게 바라봤다.무슨 이런 인간이 다 있어. 흐렸다! 개였다! 날씨도 이것보다는 덜하겠네! 전화는 항상 먼저 끊고 말이야!손에 있는 휴대전화를 바닥에 내팽개쳐 버리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 대체 뭐냐고? 항상 사람 마음을 헤집어 놓고 본인만 끊으면 다냐고!이틀 뒤, 장영식은 터벅터벅 걸으며 회사로 들어왔다. 내 눈앞의 사람이 장영식임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수염도 며칠 깎지 않았는지 지저분했고 얼굴도 햇볕에 꺼멓게 타 있었다.“영식
오늘 저녁 우리 집은 그야말로 명절 분위기였다. 이곳으로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보낸 즐거운 시간이었다. 부모님이 이렇게 행복해하는 모습도 정말 오랜만이다. 저녁 내내 우리 모두 입이 귀에 걸려있었다. 아빠는 맥주 한 캔까지 원샸했다. 혹시나 많이 취하셨을까 봐 걱정됐지만 아빠는 전혀 문제없다고 했다. 저녁 식사 후 거실로 자리를 옮겨 과일까지 함께 즐기며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을 나눴다. 시간이 늦어지자, 장영식은 집으로 가려고 준비했고 나는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자청했다. 장영식의 집은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다. 집을 나와 같이 걷고 있는데 장영식이 먼저 말을 건넸다. “배가 너무 부른데 좀 걷지 않을래? 유빈이 얘기 좀 해봐.”나는 흔쾌히 승낙하고 골드 빌리지 대문을 나와 가로등 불빛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유빈이의 일에 대해 전부 얘기했다. 장영식이 회사에 들어온 이상 우리는 같은 배를 타고 있는 파트너로서 회사 일에 대해 숨길 이유가 없다. 한참 얘기하며 걷고 있는데 외투 주머니에 있던 전화벨이 울렸다. 나보다 먼저 벨 소리를 들은 장영식이 나에게 알려줘서야 내 벨 소리임을 알았다. 휴대전화 화면에는 배현우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나는 벨 소리를 끊어 버리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으며 하던 얘기를 이어갔다. 회사 일에 대해 우리는 생각이 통하는 부분이 많다. 그래서 얘기가 항상 길어진다.이때 다시 한번 전화벨이 울렸고 장영식은 나를 보며 물었다. “왜 전화 안 받아?”나는 멋쩍은 듯 웃으며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배현우의 불쾌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는 왜 또 안 받아요? 나와 연락 안 할 거예요?”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 어딘데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용차 한 대가 내 옆에 멈춰 섰다. 뒷좌석 창문이 스르륵 내려오더니 배현우가 성난 목소리로 나를 행해 외쳤다. “타요!”갑자기 나타난 배현우의 모습에 나는 깜짝 놀라 차 옆으로 두 발짝 걸어갔다.
배현우와 탄 차는 또 리조트를 향했다. 리조트에 도착한 후 배현우는 혼자 차에서 내려 앞으로 걸어갔다. 미행은 본인이 해 놓고 오히려 화를 내는 이 상황에 너무 어이가 없었다.기사 아저씨도 같이 따라 내리며 낮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지아 아가씨!”나는 차에서 내려 기사 아저씨를 바라봤다. 기사 아저씨는 저 멀리 걷고 있는 배현우를 보며 나에게 말했다. “도련님이 일주일 내내 쉬지도 못했는데 일 끝나자마자 아가씨 만나려고 평택에서 급히 올라온거예요. 아직 저녁도 못 드셨는데 아가씨가...”“빨리 따라와요!”배현우의 성난 목소리에 나는 흠칫 놀라 발걸음을 옮겼다. 기사 아저씨는 하던 얘기를 멈췄지만 하고 싶은 말이 아직도 많이 남은 듯 나를 계속 쳐다봤다. 입장 바꿔 생각하면 배현우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왜 갑자기 화를 냈는지도 너무 잘 알 것 같다. 나는 기사 아저씨에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빠른 걸음으로 배현우 뒤를 따랐다. 그제야 배현우의 차가운 뒷모습도 어느 정도 화가 가라앉은 듯했다. 현관으로 들어간 배현우는 외투를 벗어 손에 쥔 채 소파를 향해 걸어갔다. 나도 뒤따라갔다. 배현우는 손에 쥔 외투를 소파에 던진 후 안지 않고 오히려 내 쪽을 향해 몸을 돌려 멈춰 섰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걷다가 배현우 가슴에 머리를 부딪히고 말았다. 배현우는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는 나를 소파 쪽으로 끌어당겼다. 나는 뒤로 넘어지면서 소파에 누웠고 배현우는 내 위로 덮쳤다. 순간 배현우는 내 얼굴을 향해 거친 키스를 퍼부었고 아무런 준비 없이 들이닥친 그의 입술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배현우의 키스는 거칠었고 화가 나 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한참 후에야 배현우는 천천히 입술을 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나 보고 싶었어요? 말해봐요.”그의 거침없는 모습에 나는 민망하여 눈을 피했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나는 화제를 돌려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 좀 준비해 줄게요. 배고프죠?”“말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