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임세희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준혁 오빠는 그녀의 건강 상태를 걱정해서 하는 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준혁 오빠, 나 걱정할 필요 없어. 난 진짜 버틸 만해.”임세희가 온화하게 웃었지만 이준혁은 쌀쌀한 표정으로 불쌍한 척 그를 쳐다보는 임세희를 힐끗 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품에 갇혀 있던 윤혜인이 예의 바르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이준혁 대표님, 대표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 대표님을 기다리고 있네요.”윤혜인은 더 이상 다정한 두 사람의 모습을 보기 싫었으며 얼른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쓰러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윤혜인의 초췌한 모습에 이준혁은 갑자기 마음이 움찔했고 뭔가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난…”“괜찮아!”그 찰나,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준혁 오빠, 날 위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혜인 씨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돼. 난 괜찮으니까 혜인 씨 보내줘.”임세희의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린 윤혜인이 처음 보는 듯한 낯선 눈빛으로 이준혁을 빤히 쳐다보았다.그러니까 이준혁이 지금 이렇게 그녀를 잡고 있는 것도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과를 하라는 의도밖에 없는 건가?이런 생각에 윤혜인이 다시 씁쓸하게 웃었다.이준혁에게 사랑을 받는 여자는 진실을 왜곡해도 괜찮고 막무가내로 억지를 부려도 다 괜찮다. 어차피 이준혁 마음속의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사과만 하면 되는 건가요?”윤혜인이 쌀쌀하게 웃으며 이준혁에게 물었고 임세희가 갑자기 끼어들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던 이준혁은 창백한 윤혜인의 얼굴을 보며 마음이 불편했다.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의 손을 홱 뿌리치더니 임세희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죄송합니다, 임세희 씨.”머리를 숙이는 순간, 공을 들여 겨우 쌓았던 그녀의 자존감은 또다시 산산조각이 났지만 어차피 마음도 완벽하게 죽어버렸기에 전혀 상관이 없었다.모든 걸 잃고 나서야 윤혜인은 다시 태어날
임세희는 오래전부터 그 반지를 가지고 싶었지만 이준혁은 끝까지 그녀에게 주지 않았다.그런데 그 반지를 윤혜인 그 나쁜 계집애에게 줬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임세희가 이준혁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고 왠지 모르게 이런 스킨십에 거부감이 든 이준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거두었다.그의 행동에 임세희가 흠칫 놀랐다.이준혁은 갑자기 뭔가 떠오른 듯 차가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았고 그 눈빛에 겁을 먹은 임세희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혜인이한테 내가 너에게 반지를 사줬다고 얘기했어?”이준혁의 질문에 얼굴이 창백해진 임세희는 당황한 듯 입술을 살짝 깨물며 대답했다.“난 그냥 우리가 반지 샀다고만 했는데… 다음 달 우리 이모 생신에 선물로 드릴거라고 했잖아. 설마 혜인 씨가 뭘 오해한 거야?”“세희야, 난 누가 내 앞에서 잔머리 굴리는 걸 제일 싫어해. 내가 나중에 네가 원하는 쥬얼리는 뭐든 사준다고 했지만 지금은 아니야.”이준혁이 임세희를 빤히 쳐다보며 쌀쌀하게 말하자 임세희는 안절부절못했다.‘준혁 오빠가 뭘 눈치챈 건가? 내가 말 몇 마디로 윤혜인 그 여자를 자극한 게 뭐 어때서?’예전부터 임세희를 애지중지 여긴 이준혁은 단 한번도 그녀를 서운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윤혜인 그 여자 때문에 계속 그녀에게 따져 묻고 있다니! 역시 윤혜인 그 여자를 철저하게 없애야 한다!임세희는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임씨 아주머니의 말이 생각이 나서 가까스로 참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카톡 대화 내용을 보여주며 말했다.“준혁 오빠, 지금 날 의심하는 거야? 못 믿겠으면 오빠가 직접 봐!”카톡 대화 내용으로 보면 임세희는 며칠 전부터 그녀의 이모에게 반지 사진을 보내주며 좋아하는 디자인을 물었었다.카톡 내용을 확인한 이준혁은 싸늘하게 굳었던 표정이 조금 풀렸다.“아니면 다행이고.”“준혁 오빠, 어떻게 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어? 내일이면 오빠 이혼할 텐데 내가 굳이 그런 행동을 할 필요가 없잖아?”말을 하던 임세
다음날.아침 일찍 일어난 윤혜인은 빠르게 준비를 마치고 법원으로 출발했다. 오전 9시 반으로 예약했기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그녀는 버스를 타고 천천히 이동하기로 했다.어제 쇼핑몰에서 나온 뒤, 속이 안 좋아진 윤혜인은 소원과 저녁식사를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아왔고 물건을 정리하다가 그제야 쇼핑몰에서 샀던 아이의 옷이 없어졌다는 걸 발견했다.쇼핑몰 분실 센터에 전화를 해봤지만 직원은 그런 분실물을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윤혜인은 누군가가 주워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버스가 법원에 도착하자 윤혜인이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문자를 남겼다.[저 도착했어요.]이전의 문자는 임세희가 돌아오기 전에 윤혜인이 이준혁에게 보냈던 문자였다.[여보, 언제 돌아와요?]그날 자신이 임신했다는 걸 알게 된 윤혜인은 문자로 이준혁에게 얘기를 하려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이렇게 큰일은 얼굴을 보고 직접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더 이상 문자를 보내지 않았다.그 문자를 보낸 지 2주밖에 안 된 사이에 모든 게 달라질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문자는 대부분 그녀가 보냈고 이준혁은 단답형의 답장만 보내왔었다. 예전에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게 확연히 보였다.윤혜인은 카톡 문자 기록을 지우며 다시는 멍청하게 그런 생활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그녀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법원으로 걸어가던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뒤에서 도둑을 잡아달라고 소리를 질렀고, 소리와 동시에 갑자기 튀어나온 한 남자가 그녀를 강하게 밀쳤다.그 남자는 빠르게 그녀 옆으로 지나갔고 손에는 빨간색 가방을 든 채 도망가고 있었다. 윤혜인이 반응이 빨랐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지금쯤 그 남자와 부딪쳐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빨간 원피스를 입은 여인이 뒤에서 그 남자를 쫓았지만 신고 있던 높은 힐 때문에 발을 삐끗한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그 여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도움을 청했다.“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저 가방 안에 저희 집안 어르
윤혜인의 말에 가방을 확인한 빨간 원피스 여인은 목청을 높여 대답했다.“그대로 있어. 아가씨, 너무 고마워. 힘든데 말하지 마. 구급차가 곧 도착할 거야.”이내 윤혜인은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했고 일련의 검사 끝에 팔에 살짝 스친 찰과상과 손바닥에 베인 상처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상처를 봉합하는 내내 빨간 원피스 여인은 계속 윤혜인의 곁을 지켰고 윤혜인은 그 여인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겁이 나서 봉합 과정을 단 한번도 쳐다보지 않았다.그녀는 어릴 때부터 주사바늘을 무서워했으며 작은 통증도 그녀가 느끼기엔 너무 아팠기에 이를 악물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심지어 뱃속의 아이를 위해 윤혜인은 자신이 마취제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마취없이 봉합을 강행했다.바늘이 그녀의 피부를 뚫는 순간, 극심한 고통에 그녀는 눈물을 줄줄 흘렸고 곁에서 안쓰럽게 쳐다보던 빨간 원피스 여인은 차라리 그녀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이었다.봉합이 끝나고 의사가 나간 뒤, 한참 숨을 고르던 윤혜인은 그제야 이혼 수속이 생각났다.‘설마 준혁 씨가 아직도 법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진 않겠지?’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려던 윤혜인은 손이 불편한 탓에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트렸고 핸드폰 전원이 꺼져버렸다.빨간 원피스 여인은 재빨리 핸드폰을 주워 윤혜인에게 건네며 다급하게 말했다.“아가야, 그렇게 마음대로 움직이면 안 돼. 하고 싶은 거 있으면 이 아줌마한테 얘기해.”조금 전에 구급차 안에서 윤혜인과 여인은 서로 통성명을 했다. 빨간 원피스 여인의 이름은 문현미였다.“아주머니, 혹시 아주머니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만 해도 될까요?”“당연하지, 전화번호 불러봐.”윤혜인이 전화번호를 부르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문현미의 손이 흠칫했고 고개를 들며 윤혜인에게 물었다.“이 번호 주인은 너와 어떤 관계야?”“제 남편이에요.”윤혜인의 대답에 문현미가 핸드폰을 그녀에게 건넸다.“아주머니, 너무 죄송한데 혹시 저 대신
“혜인아.”이준혁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다가갔다. 오늘 죽음의 문턱에 발을 들인 경험을 처음 하게 된 윤혜인은 이준혁이 이름을 불러주자 갑자기 코끝이 찡해져서 모든 걸 뒤로하고 한걸음에 달려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하마터면 그녀와 그녀 뱃속의 아이는 다시는 이준혁을 못 보게 될 뻔했다. 이준혁이 아무리 싫어한다고 해도 뱃속의 아이는 그의 핏줄인데 윤혜인은 그 사실을 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죽을 뻔했다.다시 생각해 보니 뱃속의 아이도 이준혁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권리가 있다!“준혁 씨…”윤혜인이 말을 꺼내려던 순간, 병실 문이 다시 한번 열렸고 임세희가 다급하게 들어왔다.“혜인 씨, 몸은 좀 어때요?”임세희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다급하게 말했다.“저랑 준혁 오빠가 법원으로 가려고 했다가 혜인 씨가 병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어요.”윤혜인은 멍한 표정으로 한참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뜨겁게 뛰고 있던 심장은 단 일초만에 차갑게 식었고 반짝이던 눈빛마저 빛을 잃었다.‘그래, 내가 왜 잊고 있었지? 우린 곧 이혼할 사이인데… 왜 그런 허튼 환상에 빠졌을까? 조금 전에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제정신이 아니었어.’“넌 왜 들어왔어?”이준혁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여 있었고 눈빛마저 다소 차가웠다.“준혁 오빠, 밖에 너무 추워. 내가 오늘 좀 얇게 입어서 도무지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어…”임세희가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윤혜인은 그제야 그녀가 하얀 레이스 원피스를 입고 있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상대방은 이미 혼인신고를 위해 드레스까지 입었는데 윤혜인은 눈치도 없이 혼자 설레고 있었던 것이다.윤혜인은 더 이상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혜인 씨, 이제 좀 괜찮아졌어요?”임세희가 윤혜인에게 다가가며 걱정하는 척 가식을 떨었지만 눈빛만큼은 분노에 들끓었다.아침 일찍부터 예쁘게 치장한 임세희는 2주 전에 맞춤 제작한 드레스 같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고 오늘 예쁜 모습으로 이준혁과 혼인신고를 하려고 최
임세희는 기세 등등한 여자를 상대로 당연히 질 수가 없었다. 어차피 궁상맞은 윤혜인이 대단한 인물과 알고 지낼 리가 없을 테니까.임세희가 고고한 자태를 뽐내며 오만하게 물었다.“아주머니는 혜인 씨와 무슨 사이죠?”“나?”코웃음을 치던 문현미가 고개를 돌려 아니꼬운 눈빛으로 임세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난 혜인이 시어머니야!”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고 문현미의 얼굴을 그제야 확인한 임세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이 늙은 여자가 왜 여기 있지?’문현미가 임세희를 날카롭게 째려보자 깜짝 놀란 임세희가 얼른 이준혁 뒤로 몸을 숨겼고 이준혁이 입술을 오므리다가 물었다.“엄마, 왜 갑자기 귀국하셨어요?”“내가 돌아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흥미진진한 장면도 보지 못했겠지! 와이프가 다쳤는데 위로 한마디도 없이 거기서 애인이랑 애정행각 나누기 바쁘다니. 내 배에서 어쩌다가 너 같은 놈이 나온 거야? 남의 가슴에 칼이나 꽂고 말이야.”문현미가 코웃음을 치며 아들을 사정없이 나무랐다. 애인이라고 칭하는 문현미의 말에 임세희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가 이내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저 늙은이가 예전부터 그녀를 싫어했는데 오늘은 아예 대놓고 그녀를 모욕하다니.임세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아주머니, 저 임세희예요. 저희 아빠는 임요한인데 혹시 저를 잊으신 건가요?”“세희? 네가 임씨 집안 딸이야?”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문현미가 물었다. 임요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문현미의 표정이 조금은 풀린 듯했고 그 모습에 임세희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웃으며 대답했다.“네, 제가 어릴 때…”하지만 임세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문현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내 기억으론 임씨 집안은 학자 가문으로 교양이 넘치고 가풍이 올발랐던 거 같은데… 그런 분들이 키워낸 딸도 당연히 훌륭하겠지. 염치도 없이 유부남 몸에 그렇게 찰싹 달라붙는게 아닌!”문현미의 한마디에 임세희 얼굴의 미소가 그대로 굳
전까지는 허약한 척 연기한 거였지만 지금의 임세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경험하게 되었다.그녀는 막말을 하는 저 늙은 여자 때문에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녀는 분명 서울에서 모든 사람이 알아주는 명문 가문 규수인데 오늘 계속 저 늙은 여자에게 애인이라는 소리를 듣게 되다니.그뿐만 아니라 문현미는 분명히 임세희를 알아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모른 척하고 있었기에 임세희는 더욱 짜증이 났다.그녀는 어쩔 수 없이 몸을 이준혁에게 살짝 기대며 허약한 목소리로 울먹였다.“아주머니, 아주머니께서 오해하신 거예요, 전…”“세희 양, 본인 입으로 아니라고 하니 다행이네. 그리고 앞으로도 똑똑히 기억해둬. 가정이 있는 남자와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게 기본적인 사회 예의라는 걸!”말을 하던 문현미가 싸늘한 눈빛으로 이준혁의 팔을 잡고 있던 임세희의 손을 째려보았고 깜짝 놀란 임세희가 재빨리 손을 놓았다. 눈치 빠른 이준혁이 그녀를 잡아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지금쯤 바닥에 넘어졌을 것이다.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엄마, 세희가 많이 아프니 그런 말투로 얘기하지 마세요. 세희가 놀래요.”이준혁은 임세희를 등 뒤로 보호한 채 든든한 장벽 마냥 그녀를 향한 모든 공격을 막아냈고 조용히 이를 지켜보던 윤혜인은 붉어진 눈시울로 가까스로 참고 있었다.윤혜인은 자신이 이제 충분히 적응됐다고 여겼는데 저런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있으니 마음이 여전히 너무 아팠다.그녀는 이미 저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있게 이준혁을 놓아줬는데 왜 이준혁은 굳이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다른 여자를 저토록 감싸는 걸까?팍!문현미가 테이블을 강하게 내리치더니 이준혁을 노려보았다.“저 여자가 죽을 병에 걸렸다고 해도 너랑 상관없는 일이야. 넌 병실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네 와이프를 조금이라도 걱정하긴 했어? 혜인이가 네 할아버지 목숨을 살릴 수 있는 약을 도로 가져오기 위해 어떤 사투를 벌였는지 알기나 해? 도둑놈이 휘두르는 칼에 찔리고 마취도 없
문현미는 아무 말도 못하는 윤혜인을 보며 그녀의 손을 살짝 잡았다.“네가 내 며늘아기라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모를 거야. 이남주 그 계집애는 맨날 여기저리 돌아다니느라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거든. 난 내 며느리가 너처럼 단아하고 착한 딸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꿈에서까지 바랐어. 그런데 하늘이 이렇게 내 소원을 들어줄 줄은 몰랐네.”문현미가 이렇게까지 얘기하니 윤혜인도 그녀의 바람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 발그레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어머님.”“아이고, 그래, 우리 착한 며느리.”환하게 웃던 문현미가 손목에 끼고 있던 옥팔찌를 빼더니 윤혜인에게 건넸다.“내가 이 옥팔찌를 40년 동안 차고 있었어. 이젠 너에게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네.”“아… 아니에요! 이 선물은 너무 귀중한 거라서 전 받을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저는…”‘이준혁과 곧 이혼할 사이입니다.’그녀는 남은 말을 입 밖에 꺼내려고 하다가 괜히 문현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문현미가 윤혜인의 손을 꼭 잡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혜인아, 네가 손으로 칼을 막았을 때 난 정말 너무 마음이 아팠어. 네가 얼마나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으면 위험이 닥쳤을 때 저렇게 강인한 눈빛이 나올 수 있었을까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난 그 순간 너를 꼭 안아주고 싶었어. 그러니까 내 마음을 거절하지 말고 엄마가 앞으로 널 사랑해줄 수 있게 해줘.”문현미의 말에 꽁꽁 얼어붙었던 윤혜인의 마음이 따듯하게 녹아내렸다. 아빠 엄마가 없는 윤혜인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이 든 모습을 보였으며 작은 몸으로 연세가 높은 외할머니를 지켰다.그러다가 나중에 이준혁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는 이 소중한 인연을 조심스럽게 유지하느라 사랑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 보호받는 게 어떤 느낌인지조차 잊어버리게 되었다.이렇게 따듯한 거였구나…눈시울이 붉어진 윤혜인이 울먹이며 대답했다.“감사합니다, 어머님.”이때, 병실 문이 열렸고 이준혁이 걸어 들어왔다.그가 다시 돌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윤혜인이 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