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심지안이 자기를 지켜보는 것을 눈치챈 듯 고개를 살짝 들고 미소로 화답했다.“대표님, 그럼 저는 두 분을 방해하지 않고 이만 나가보겠습니다.”말을 마치고 그녀는 허리를 굽히고 물러갔다.문이 닫히자마자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이전에 회사에서 저 여자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최근에 들어온 신입 사원이에요. 이전 재무 담당자가 횡령으로 감옥에 가서.”“연신 씨가 면접 보고 뽑은 거예요?”“아니요. 인사팀에서 뽑은 거죠.”성연신은 영문을 몰랐다.“왜요?”심지안은 약간 어색하게 말했다.“연신 씨가 저 직원을 다른 직원들과 좀 다르게 대하는 것 같아요.”성연신은 냉담한 얼굴에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어디가 다른데요?”“결벽증이 있잖아요? 방금 저 여자 머리카락이 당신 목덜미에 닿았어요.”“고작 그것 때문에요?”어리둥절해진 심지안은 치밀어오르는 화를 꾹 참고 빙그레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고작 그것 때문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생떼를 쓴다는 거예요?”결벽증이 심한 사람이 이렇게 거리감 없는 접촉을 좋아할까?실수로 닿았더라도 즉시 자세를 바꿔 피해야 정상이 아닌가?성연신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곧 폭발할 것 같은 그녀를 껴안고, 사랑스럽다는 듯 웃었다.“질투해요?”“네?”심지안은 그의 허벅지를 꽉 꼬집었다.“저리 가요! 누가 당신같이 마음이 쉽게 변하는 바람둥이를 위해 질투해요?”성연신은 아파서 신음을 냈지만 그녀를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으면서 서로의 숨결이 뒤엉켰다.“내 마음속에는 당신밖에 없어요. 맹세코 그 여자한테 아무 생각도 없어요.”그가 이렇게 진지하게 나오자, 심지안은 뽀얀 얼굴이 저도 모르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괜히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흘겼다.“그 여자에게 딴생각을 가져보지 그래요? 저는 지금 성씨 가문의 따님인데, 어떤 미남인들 얻지 못하겠어요? 정 안 되면 바꾸면 되죠.”우주의 양육권은 소송을 통해 쟁취하면 된다.어차피 우주는 지금 그녀를 좋아한다.
“아무 일도 없어요. 그냥 두 분에게 밥을 한 번 사드리고 싶었어요.”민채린은 식당의 환경을 보더니 말했다.“이렇게 작은 식당을 고를 줄은 몰랐어요. 진짜 저를 위해 돈을 아껴주네요.”심지안은 반신반의했다.“진짜요?”민채린이 고개를 갸우뚱했다.“네.”성연신이 수저를 꺼내 심지안 앞에 놓았다.“철수 씨를 찾으세요?”민채린은 눈에 어색한 뭔가가 스쳐 지나갔지만 이내 정상으로 돌아왔다.“그 사람을 왜 찾아요? 잘 알지도 못하는데.”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네, 그렇고 그런 사이일 뿐이니 잘 모르죠.”심지안도 은연중 그녀와 안철수의 얼키고설킨 관계를 들은 바가 있어 짓궂은 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맞아요. 둘이 잘 몰라요.”“오해하지 마세요.”민채린은 육회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저는 오늘 저녁 비행기로 떠나요. 지난번에 구해준 은혜가 있으니 감사 인사로 점심을 사는 거예요.”그녀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더니 목소리를 높였다.“하지만 지안 씨도 알다시피 제가 이유 없이 납치된 것이 두 분 때문이잖아요. 까놓고 말하면, 저는 그냥 지나가다 얻어맞은 행인과 같은 거죠.”좋게 말하면 송별 인사이고, 나쁘게 말하면 죄를 물으러 온 것이다.그녀는 얼렁뚱땅 넘어가는 사람이 아니다.심지안은 웃음을 거두고 그녀에게 오렌지 주스를 따라주었다.“무슨 그런 말씀을. 그때 우리도 채린 씨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고, 또 별탈 없이 무사히 돌아왔잖아요.”“별탈 없이 무사한 건 제가 운이 좋았다는 것을 설명할 뿐이에요.”“말해봐요. 뭘 원하는지?”성연신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그녀가 이렇게 나올 줄 진작에 예상한 듯 담담하게 물었다.민채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필요할 때 고청민을 지켜주세요.”성연신이 눈썹을 치켜올렸다.“필요할 때가 어떤 때죠?”또다시 음모를 꾸미다 들통났을 때? 아니면 성씨 가문에서 쫓겨났을 때?그러니까 나쁜 짓을 해도 가만두란 말인가?민채린은 그의 날카로운 질문을 피하지 않았다
심지안이 의아해하며 눈을 크게 떴다.“성형한 게 확실해요?”“네,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아주 자연스럽지만 저는 의학을 공부했기 때문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어요.”게다가 의사가 능력자였는지 수술이 성공적으로 잘됐다.심지안이 뭐라고 말하려는데 성연신이 쌀쌀하게 말했다.“남의 뒷담화하지 마세요.”순간 심지안은 미간을 찌푸렸다.민채린도 어리둥절해하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성 대표님은 좀 오지랖이 넓은 것 같네요.”“내 직원이에요.”그 여자의 명성을 지켜주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로 들렸다.심지안은 이 말을 듣고 더 불쾌해졌다. ‘내 직원’이라는 말이 ‘내 여자’와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 그녀는 즉시 받아쳤다.“왜요? 우리가 틀린 말을 했어요? 성형했으면 했지, 그렇다고 말도 못 해요?”뒷담화하는 건 물론 나쁘지만 평생 가십 몇 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사람들에게 퍼뜨리고 다니거나 나쁜 시선으로 보지 않으면 되는 것이 아닌가?성연신은 문제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채 어이없는 말투로 말했다.“제가 당신을 건드렸나요? 우리가 부부인데 왜 제 편을 들지 않고 다른 사람의 편에 서요?”그는 자신이 민채린에게 선을 지키라고 한 것은 잘못이 없다고 생각했다.민채린이 으쓱거렸다.“애인 앞에서도 원칙이 먼저군요.”심지안이 짜증을 냈다.“가스라이팅하지 마세요.”그러자 성연신은 입을 다물었다.민채린은 긴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근데 성 대표님은 직원을 위해 나서는 사람이 아닌데, 왜 저 여직원에 대해 이렇게 신경을 쓰죠? 힘들게 얻은 여자가 질투할까 봐 두렵지 않아요?”성연신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괜한 걱정이에요. 지안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쳇, 알랑방귀를 잘 뀌네요.”성연신은 더 이상 그녀를 상대하지 않고 심지안을 데리고 가려 했다.심지안은 그가 내민 손을 홱 뿌리치고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길가의 택시에 탔다.“피곤해요. 돌아가 쉴래요.”성연신은 택시가 점차 멀어져 가는 것을 바라보며 어리둥절
직원들은 등 뒤로 갑자기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고개를 돌려 심지안을 보자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사... 사모님!”심지안은 그들을 무시하고 바로 위층으로 올라갔고, 직원들은 멍한 표정으로 그 자리에 남았다.“우리 큰일 난 거 아니에요?”“큰일 정도가 아니지,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네요.”“난 정말 의도한 게 아니었는데... 이 주둥이가 문제네요. 연다빈이 예쁘긴 하지만, 사모님보다는 당연히 못 하죠...”연다빈의 얼굴은 조금 더 성숙한 느낌이 있어서 예쁘긴 하지만 실제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성숙한 분위기를 풍겼다. 반면에 심지안은 단순히 예쁜 얼굴로, 어떤 메이크업이든 소화할 수 있는 얼굴이었다. 밝고 우아하고, 귀엽기까지 한 완벽에 가까운 얼굴이었다.“하... 무심코 한 말이었지만, 사모님 귀에 들렸으니 우리는 끝장이겠네요. 그냥 빨리 짐 싸서 퇴사 준비나 합시다.”사무실.성연신은 심지안이 돌아오는 것을 보고 놀라움과 기쁨이 가득 찬 눈빛으로 마우스를 내려놓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심지안은 그를 완전히 무시하고 책상에서 태블릿을 집어 들고 돌아서려 했다.성연신은 그녀의 하얗고 가는 손목을 잡으며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왜 토라졌어요? 무슨 일 있어요?”“알고 싶어요?”“말해봐요.”성연신은 심지안이 항상 독립적인 것을 알기에, 정말 긴급한 상황이 아니면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심지안이 그렇게 힘들게 모든 것을 짊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고, 그녀가 자신을 의지하길 바랐다.심지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별일 아니에요. 단지 당신이 다른 여자를 도와주는 모습을 봤을 뿐이에요. 이렇게 급히 돌아온 게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인 줄 알았거든요. 제가 착각했어요.”성연신은 심지안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설명했다.“정말 우연히 보고 도와준 것뿐이에요.”“오... 도와준 거라고요?”심지안은 비꼬는
장장 3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지속해오던 출장 생활이 드디어 막을 내렸다. 날짜를 앞당겨 돌아온 심지안은 한달음에 남자친구 강우석의 집으로 달려갔다.그녀는 강우석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줄 생각에 잔뜩 들떠있었다.하지만 그녀가 지문을 찍고 안으로 들어간 순간, 여기저기 혼잡하게 널려 있는 옷 거지들이 눈에 들어왔고 침실 쪽에선 야릇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그렇다. 그녀가 배신을 당한 것이다!심지안은 온몸이 얼음장같이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녀는 제멋대로 요동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힘겹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걸어 나갔다.그 순간 문 앞에 서 있던 여자가 꺅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옆에 있는 이불로 자신의 알몸을 감쌌다.당황스러움에 어찌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을 마주한 심지안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 같았다.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역겨움이 토사물을 타고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그녀는 벌어질 수 있는 모든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강우석이 바람을 핀 상대가 하필이면 자신의 이복언니라는 이 소름 끼치는 상황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설명해봐.”“지안아...”강우석은 감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한 채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입을 열었다.“넌 정말 좋은 여자야. 하지만 나한테 더 어울리는 건 연아야.”성격, 외모, 배경... 연아는 그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조건을 갖고 있다. 예쁘고 온화하며 섹시하다. 또한 일적으로도 강우석에게 힘을 보태줄 수 있고 그가 높이 날도록 날개를 달아줄 수 있는 사람이다.반면 심지안은 몸에 손조차 대지 못하게 하는 냉혈녀일 뿐만 아니라 심씨 집안에서의 지위 또한 심연아에게 한없이 미치지 못한다. 두 사람 중 저울추의 방향이 어디로 기울어질지는 너무나도 자명한 일이었다.심지안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자신만을 사랑하고 바라보았던 사람을 아프게 바라보았다.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심연아가 펑펑 울
남자는 심지안을 한 번 흘끗 보고는 냉정히 시선을 거두었다.심지안은 남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낮은 목소리로 진유진에게 말했다.“너 먼저 돌아가. 난 가서 저 사람의 연락처를 알아낼 거야.”진유진이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저 사람에게 강우석의 일을 얘기라도 하려고?”“내가 직접 처단하는 게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 혼내는 것보다 훨씬 더 통쾌하지 않겠어?”심지안이 취기가 올라 몽롱해진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진유진은 영문을 몰라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자리에 돌아가 앉은 뒤에야 그녀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다.진유진이 보기엔 강우석의 삼촌도 멋있긴 하지만 분명 그와 마주 앉아있는 이름 모를 남자가 더 매력적이었다. 하여 그녀는 심지안이 강우석 그 쓰레기 자식에게 대한 복수 때문에 눈이 멀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심지안은 술기운을 빌려 질끈 묶었던 머리를 휘리릭 풀어헤치고는 술 한 잔을 들고 남자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그때, 돌연 탁자 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곧바로 핸드폰을 쥐고 심지안의 옆을 스치고 지나가 밖으로 나가버렸다.심지안은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이렇게 간다고? 그녀가 아직 입을 떼지도 않았는데?그녀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순간 머리에 강우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어 그녀는 이를 꽉 깨물고 한 발 한 발 남자의 뒤를 따라나섰다.남자는 술집에서 나간 뒤 롤스로이스 차에 올라탔다. 심지안은 차 옆으로 다가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차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이어 창문이 스르륵 내려왔고 뒷좌석에서 무표정하고도 오만한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바깥의 조명은 술집보다 밝아 그의 얼굴을 더 또렷이 볼 수 있었다. 흠잡을 곳 없는 준수한 이목구비에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그야말로 현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 그 자체의 외모였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자 심지안이 입을 열었다.“핸드폰 잠깐 빌릴 수 있을까요? 제 핸드폰은
심지안은 환각이라도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남자는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심지안은 결심이 선 듯 눈을 반짝이며 결연히 말했다.“서로 숨기지 않는 게 좋겠네요. 전 성 불감증이에요.”오늘 목격했던 그 광경을 생각하니 그쪽으론 트라우마까지 생겨버린 심지안이었다.남자가 조금 놀란 듯 눈빛이 흔들렸다. 이어 그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심지안은 허리를 곧추 세우고는 일말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히 그의 시선을 받아들였다.이어 남자가 말했다.“타요.”차에 앉은 심지안은 흥분감을 애써 누르며 진유진에게 문자를 보냈다.「유진아, 날 기다릴 필요 없어. 나 강우석의 삼촌이랑 부모님을 뵈러 가는 중이야!」「??? 역시 넌 대단해. 속도가 빠르다 못해 로켓도 따라잡겠는걸?」병원 VIP 병실.성수광이 침대에 누워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흥분이 가득 섞인 얼굴로 심지안을 아래위로 훑어보고 있었다.“이 아가씨는...”남자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심지안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할아버님, 전 손자분의 여자친구예요. 오늘 너무 급하게 오느라 선물도 준비하지 못했어요.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세요.”성수광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말 저놈의 여자친구라고요? 난 한 번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사실 저희 두 사람은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요. 또한 제가 일 때문에 출장도 몇 번 다녀와야 했던 탓에 뵙고 인사드릴 기회가 없었어요.”심지안의 예의 있고 애교 섞인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조금 전 함께 밖에서 밥을 먹다가 할아버님께서 몸이 편찮으시다는 걸 알았어요. 너무 늦게 찾아와 죄송해요.”깔끔하게 뻗은 눈썹, 별이라도 박아놓은 듯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백옥같이 하얗고 투명한 피부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어 단번에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 그리고 고급스러운 트렌치코트 아래로 드러난 가늘고 매끈한 발목까지, 한눈에 봐
은옥매가 심지안의 곁을 스쳐 지나가며 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위로하는 척 말했다.“지안아, 화내지 마. 내가 이미 네 언니를 혼내줬어. 언니로서 응당 동생에게 양보해야지.”“지안아, 미안해. 나 내일 바로 우석이한테 가서 약혼을 취소하자고 말할게.”심연아는 연민을 잔뜩 불러일으키는 그렁그렁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며 상처받은 얼굴로 말했다.“감정이라는 거 마음대로 할 순 없지만 넌 그 사람을 좋아하고 있잖아. 네 언니인 내가 그 사람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안 되는 거였어...”심지안은 그녀의 역겨운 말에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가까이 지냈다는 건 침대에서 함께 뒹굴 정도로 가까이란 뜻이야?”“너 그게 무슨 막말이야!”심전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약혼은 예정대로 진행할 거야. 청첩장도 다 보냈는데 취소하라고? 난 그런 창피는 당할 수 없어.”“제 말은 모두 사실이에요!”심지안이 눈물이 가득 차올라 붉어진 눈으로 은옥매를 가리키며 한글자 한글자 내뱉었다.“심연아도 저 사람처럼 다른 여자의 남편을 빼앗는 취미가 있어요. 대체 왜 저런 사람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건데요!”말이 끝나기 바쁘게 심전웅이 심지안의 뺨을 후려갈겼다.감당할 수 없는 힘의 충격에 심지안은 머리에서 윙윙 소리까지 들려왔다.그 모습을 본 은옥매의 눈동자에 잠시 흐뭇함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감추고는 당황스러운 척 심전웅을 막았다.“이러지 말고 말로 하세요!”“저런 애를 감싸긴 왜 감싸. 집안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 집에서 얌전히 있으려면 있고 아니면 당장 꺼져. 죽은 네 엄마처럼 보기만 해도 짜증 나니까.”심전웅은 분노에 씩씩거리며 일그러진 표정으로 심지안을 노려보고 있었다.그의 눈빛은 딸을 보는 아버지의 눈빛이 아닌 한 맺힌 원수를 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지안이는 아직 어리니까 당신이 이해해요. 당신 내일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요. 어서 나랑 같이 들어가서 자요.”은옥매는 심연아에게 눈짓하며 말했다.“지안이를 잘 위로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