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시영은 예전처럼 그를 졸랐다. “제발 말해줘. 그럼 다시는 이 얘기 안 꺼낸다고 약속할게.”케빈은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어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시영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더 과감하게 물었다. “꿈속에서 나는 어땠어? 열정적이었어, 아니면 순수했어? 혹시... 음란했어?”마지막 두 글자를 말할 때 시영의 발끝이 케빈의 다리를 슬쩍 스쳤다.케빈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영은 그의 이런 태도에 화가 나서 눈썹을 찌푸렸다.“내가 말하라고 했잖아, 못 들었어?”시영은 방금 자신의 말투가 기억을 잃은 케빈에게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꾸었다. “케빈 오빠, 왜 이렇게 날 화나게 만드는 거야.”케빈은 지금의 시영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되었든 그녀는 여전히 자신의 아가씨였다.케빈은 어렵게 입을 떼어 진실을 털어놓았다. “아가씨께서 꿈속에서 제 방안으로 들어와 어둠이 무섭다며 제 침대에 올라탔어요...”시영은 웃음을 참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뜨거운 귀를 살짝 스쳤다. “오빠가 이렇게 솔직하게 말했으니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게, 어때?”...잠시 후, 병실의 불이 꺼졌다. 케빈은 침대에 누워 눈을 질끈 감았다.끼익- 문이 살짝 열렸고 시영이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케빈이가 일어나 앉아있자 시영은 침대 옆에 엎드리며 말했다.“케빈 오빠, 너무 어두워서 무서워. 오빠 침대에서 같이 자면 안 돼?”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보게 된 시영은 예전처럼 순수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케빈은 자신이 알던 시영을 보는 듯했다. 그는 정말 꿈속으로 돌아간 느낌이 들어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이건 규칙에 어긋나요.”시영은 불쌍한 표정으로 말했다. “케빈 오빠, 정말 너무 어두워서 그래. 함께 자지 않으면 무서워서 죽을 것 같아.”시영은 케빈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침대로 올라탔다. 케빈이 반응하기도 전
창밖에는 바람이 몰아치고 습한 공기가 곧 쏟아질 폭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창문을 닫지 않아 물기 어린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빗방울이 침대 가장자리를 적셨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침대 위의 남녀는 서로 뒤엉켜 있었다. 케빈의 건장한 등에 가득한 상처는 마치 하늘을 가로지르는 번개 같았다. 시영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그 상처를 헤집으며 새로운 상처를 만들었다. 케빈은 잠깐의 고통을 느낀 후 곧 깊이 파고드는 가려움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마치 새 살이 돋아나는 것 같았다.케빈은 침대 위에 흩어진 검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유혹적인 웨이브 머리 너머로 어둠 속에서 갈망했던 달을 보았다. 그녀는 그가 항상 보호하던 시영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아래에서 매혹적인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혼을 빼앗는 요정 같았다. 어떻게 케빈을 미치지 않게 할 수 있었겠는가.마침내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폭우는 창문을 때리며 내리쳤다. 그것은 방 안의 광란과 혼란을 덮어버렸다. 케빈은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고 시영에게 입을 맞췄다. 그는 쉰 목소리로 시영을 반복해서 불렀다.“아가씨.”“아가씨.”그것은 케빈의 집착을 쏟아내는 것 같기도 했고 시영의 부름에 대한 응답 같기도 했다.열정에 휩싸여 시영은 케빈의 등을 다시 피가 나도록 긁었고 그의 목덜미를 물어 피와 살이 뭉개지게 만들었다. 케빈은 움직이지 않았고 저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시영이가 이를 다치지 않게 근육을 이완시켰다. 그리고 서툴게 시영의 등을 두드렸다. 한 번 또 한 번.두 사람은 번쩍이는 번개 속에서 눈을 마주치고 길게 울리는 천둥소리 속에서 서로 뒤엉켜 있었다. 극도의 환희 속에서 시영은 케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케빈은 시영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케빈은 시영을 단단히 안고 한 번 또 한 번 그녀를 두드렸다.희미한 기억 속에서 케빈은 몇 가지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두 사람은 같은 폭우
시영은 케빈이 깨어난 후 그와 다시 시작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케빈의 기억 상실이 하늘이 주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관계를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시영은 더 이상 이전처럼 악담을 퍼붓거나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진짜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방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을지 궁금했기 때문이다.시영은 케빈이 기억을 잃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과거를 모를 것이며 자신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케빈은 모든 것을 알아차리고 말없이 그녀가 진짜 자신을 숨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케빈의 시선을 마주치자 시영은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시영은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 “케빈, 넌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다시 시작할 거니까 과거를 묻지도 찾으려고도 하지도 마. 알겠어?”케빈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보상으로 시영은 케빈에게 상상도 못할 쾌락을 선사했다. 이 밤이 지나면 죽는다 해도 케빈은 후회가 없을 것이다.아침이 되어 햇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케빈이 눈을 뜨자 시영은 소파에 앉아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다. 케빈은 급히 일어났는데 지난밤의 황홀함이 환상이었는지 현실이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시영은 케빈이 깨어난 것을 보고 립스틱 뚜껑을 닫고 머리를 정리하며 나른하게 말했다. “난 너 때문에 거의 죽을 뻔했는데 넌 오히려 늦게 일어났네.”시영의 말을 듣자 케빈의 머릿속에 지난밤의 광란한 장면들이 떠올랐다. 케빈은 입이 바싹 말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시영은 눈썹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거야?”시영은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아침의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시영은 케빈에게 귀엽게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어제 정말 잘했잖아. 아니야?”케빈이 숨을 쉬기 어려워하고 있을 때 시영은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가서 씻으면 나랑 같이 아침 먹을
식사 중 케빈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거의 나았으니 제가 운전해서 모셔다 드릴 게요.”시영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괜찮으니까 쉬고 있어.”아침 식사를 마친 후 케빈은 문 앞에서 시영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영은 외투를 입고 돌아서며 문 앞에 서 있는 케빈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짓을 보냈다.케빈이 다가오자 시영은 그의 옷깃을 다듬으며 말했다. “낮에는 내가 일해야 하지만 밤에는 내 시간이 전부 네 거잖아.”시영은 눈을 들어 케빈을 쳐다보며 유혹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잘 쉬고 있어. 안 그러면 밤에 어떻게 힘을 낼 수 있겠어?”케빈은 시영의 눈을 마주치자 숨이 달아올랐고 외롭던 가슴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알겠습니다.”시영이가 떠난 후 케빈은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간호사가 와서 그의 붕대를 교체해 줄 때까지.간호사는 붕대를 풀고 상처를 정리한 후 말했다. “몸은 거의 다 회복하셔서 더 이상 붕대를 감을 필요는 없습니다. 상처들은 될수록 물에 닿지 않게 조심하셔야 하고 후두부의 상처는 아직 주의하셔야 합니다.”간호사가 떠난 후 케빈은 욕실 안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상처들을 살펴보았다. 그중 일부는 싸움에서 생긴 상처로 보였지만 대부분 상처가 채찍이나 둔기에 의한 상처였다. 모두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가한 것이었다.케빈은 그 상처들을 보며 오랫동안 침묵했다. ‘내가 정말 10년 동안 아가씨와 만났었다면 왜 이런 상처들이 있을까?’ ‘아가씨와 만나지 않았다 해도 아가씨의 경호원인 나한테 이렇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지난밤 시영의 갑작스러운 광기를 떠올리자 케빈의 마음속에 하나의 답이 떠올랐다. 그는 아가씨의 경호원이기에 아가씨가 그를 때리고 괴롭히는 것은 상관없었다. 케빈이 신경 쓰는 것은 시영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였다.그의 현재 기억 속에서 시영은 순수하고 착했다. 심지어 자신이 시영을 구하려다 다쳤을 때 그녀는 울면서 사과했다.
두 사람이 떠나는 뒷모습을 보자 장현정은 화를 내며 말했다. “시영의 저 말은 도대체 무슨 뜻인 거지? 정말로 케빈과 만나려는 건 아니겠지?”민용국은 한숨을 연달아 쉬며 말했다. “시영이도 너무 고생하면서 살았으니 이제 시영이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자.”“시영이가 그동안 고생했기 때문에 절대 평범한 사람과 만나선 안 돼. 만약 시영이가 보디가드와 만난다면 사람들은 우리 시영이가 그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보디가드와 결혼했다고 생각할 거야! 우리 민씨 가문의 아가씨, 백제 그룹의 부대표가 보디가드와 결혼하다니, 이 일이 알려지면 시영이는 웃음거리가 될 거야!”민용국은 그 말에 설득되었다. 그는 시영의 선택을 존중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충동적인 결정을 한 것일까 봐 걱정했다. 민용국은 초조하게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하지만 시영의 성격은 당신도 알잖아. 겉으로는 친절하지만 시영의 결정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엄마로서 장현정도 시영을 잘 알고 있었다. 장현정은 고민 끝에 말했다. “그러면 먼저 케빈의 의사를 알아보자. 케빈이가 떠나준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거야.”...침실 안.케빈은 문 앞에 서서 어지러운 방 안을 보며 조용히 들어갔다. “아가씨, 저녁을 가져올까요?”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병 하나가 날아오더니 시영이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아까 아빠가 너를 오빠로 받아들이자고 말했는데 케빈 넌 어떻게 대답했지?”“모두 아가씨의 뜻을 따르겠습니다.”시영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 뜻을 따른다고? 내가 동의하면 너도 동의한다는 거야?”“네.”케빈의 한결같은 태도에 시영은 화가 더욱 치솟았다. 그녀는 케빈을 가리키며 말했다.“내가 너를 오빠로 받아들이면 우리 사이에 다른 가능성은 없어질 거야. 그래도 상관없어?”케빈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아가씨의 요구라면 따르겠습니다.”짝-시영은 다가가 케빈의 뺨을 때렸다. “다시 대답해!”“아가씨의 요구라면 따르겠습니다.”또 한 번 뺨을 때렸다.
어두운 거실, 일렁거리는 캔들 불빛이 한데 뒤섞여 있는 남녀를 희미하게 비추고 캔들의 아로마 향과 남녀의 밤꽃 냄새가 한데 섞여 야릇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남자의 큰 덩치에 가려진 여자의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웠고 남자가 몸을 파고들 때 잇새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그러던 그때, 남자는 순간 멈칫했다. “처음이야?”그리고 그 나지막한 한 마디는 권하윤을 아픔 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만 곧이어 무한한 두려움이 아픔을 대신했다. 익숙한 듯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를 끝없는 나락으로 끌어내렸다.자기를 범하고 있는 남자가 약혼한 남자친구가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 사람들마다 기피하며 두려워하는 존재, 민도준.거대한 공포가 그녀를 순간 잠식했다. 몸이 굳어진 채 알코올에 마비된 머리로 이 일의 시작을 더듬어봤다.아침에 분명 민승현과 약혼식을 올리고 지금쯤 첫날밤을 맞이해야 했는데…….분위기를 잡고 있던 그때, 민승현이 사촌 여동생의 전화를 받고 나가버렸다.심지어 그를 붙잡으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굶주렸냐며 모욕을 하고 말이다.혼자 남은 방에서 와인 한 병을 때려 마시고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 민승현이 다시 돌아온 기억이 난다.하지만 나가기 전과는 달리 유독 끈질기고 집요했다. 바로 소파에서 그녀를 밀쳐 눕히더니 이 행위가 시작됐다.또렷한 기억이 권하윤의 뇌를 비집고 들어왔고 점차 돌아오는 이성에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당, 당신…….”여자를 두 팔로 가두고 있던 남자가 입꼬리를 씩 올렸다. 깊은 아이홀, 날카로운 눈매, 높은 코, 그리고 그 아래에 있는 얇은 입술. 누가 봐도 신의 완벽한 작품이다. 하지만 입술이 살짝 열리더니 그 사이로 약간 장난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왜 그래? 예비 제수씨?”호칭을 듣는 순간 권하윤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있는 힘껏 남자를 밀치고 맨발로 침대에서 도망치더니 남자를 가리키며 입술을 떨었다.“당, 당신이 왜…….”민도준은 느긋하게 일어서더니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마셨다 내
아름다운 별장 앞. 권하윤은 그 자리에서 맴돌며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있다. 마치 발이 바닥에 붙은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그때 마침 안으로 들어가고 있던 민도준이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등불이 그의 어개에 흘러내리는 순간 그가 마치 어둠 속 유일한 따스함이라는 느낌마저 들었다.“무서워?”여기까지 오는 사이 권하윤은 이미 말짱한 정신으로 돌아왔고 방금 전 목까지 뚫고 올라왔던 충동이 이미 사라졌다.권씨 가문에서는 그녀가 민승현과의 관계가 틀어지기를 원하지 않고 있다. 고리타분한 조선시대 마인드 때문인지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데려와도 웃으며 맞이해야 한다나 뭐라나.게다가 민씨 가문, 권씨 가문 외에도 그녀에게 채워진 수많은 족쇄를 생각하니 권하윤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오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이만하죠.”어렵사리 꺼낸 말에 민도준은 나지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는 권하윤의 귀를 뚫고 들어와 가슴을 쿡쿡 찔렀다.거절하는 말을 듣고도 민도준은 바로 떠나지 않고 담배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곧바로 빨간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다들 권씨 집안 여자들이 천성적으로 남자 뒷바라지를 잘한다던데 정말 그런가 보네.”담배를 문 입이 천천히 호를 그렸다. 마치 상대방이 상처를 받는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 느긋한 태도다.“설마 민승현 그 자식이 당신 앞에서 다른 여자를 안아도 콘돔을 건네줄 건가?”제대로 자극받은 권하윤은 입을 꾹 다문 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별장으로 향했다.그 뒤에 있던 민도준은 씩 웃더니 담배를 버리고 뒤따랐다.문 앞에서 자기를 보고 놀라는 경비원을 보고 뭔 말을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을 그때, 매캐한 담배연기와 뒤섞인 남자의 향기가 뒤에서 권하윤을 감쌌다.“문 열어.”민도준을 본 경비원은 아무 말도 없이 문을 열었다.그제야 민도준의 지위가 실감이 났다. 흐릿하게나마 민승현이 경고했던 말이 떠올랐다. 민씨 가문에서 그의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가장 조심해야 할 사람이 민도준이라고 했던 말이.‘굳이
권하윤은 무의식적으로 창밖을 살폈다.밖은 어두컴컴한 데다 폭우까지 쏟아져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민승현이 날 따라올 리가 없지. 도둑이 제발 저린다더니 내가 그 꼴이네.’하지만 권하윤이 뭐라 대답하려던 찰나 옆에서 손이 불쑥 나타나 핸드폰 종료 버튼을 눌렀다.눈살을 찌푸리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민도준이 권하윤의 턱을 잡고 자기 쪽으로 돌리더니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연기를 그녀의 입에 불어넣었다.“콜록콜록…….”그리고 권하윤의 창백하던 얼굴이 기침 때문에 발갛게 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이제야 볼만하군.’하지만 그때. 민승현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민승현:?][네가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어? 너 어디야?][20분 줄 테니까 당장 내 앞에 나타나. 안 그러면 네 집식구한테 전화해서 너 데려가라고 할 테니까!]‘민승현이 집에 도착했나? 지금껏 나한텐 관심도 없었으면서 화는 왜 낸대?’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에 권하윤은 아직도 목구멍을 자극하는 매캐한 냄새도 신경 쓸 새 없이 문 손잡이를 잡았다.하지만 문을 열려는 순간 민도준에게 잡히고 말았다.“어디 가려고?”“저 돌아가야 해요.”권하윤은 화가 났지만 마음을 한껏 가라앉히고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민도준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하지만 민도준의 시선이 집요하게 그녀를 위아래로 훑었다.“그 꼴로 가려고? 나랑 잤다는 거 티 내고 싶은 거야?”남자의 말에 고개를 숙여 봤더니 옷은 이미 쭈글쭈글해졌고 몸에는 온통 키스마크가 나있었다. 그 모습을 민승현한테 들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혹시 저 가까이에 있는 백화점에 내려줄 수 있어요?”“…….”싫은 티를 팍팍 냈지만 민도준은 결국 그녀를 실은 채 백화점으로 향했다.백화점에 도착한 뒤 꿈쩍도 하지 않는 민도준을 힐끗 살핀 권하윤은 눈치껏 차에서 내렸다.하지만 바닥에 발이 닿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져 털썩 주저앉았다.민도준은 그런 모습을 보면서도 도와주기는커녕 차 창문을 내리며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