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묵고 있는 요양원은 비밀리에 운영되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입원하게 된 환자들 모두가 비밀유지 계약서에 사인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모든 환자들은 모두 번호로 불리고 있었으며 이름이 없었다. 조수아는 남자의 번호인 99번만 기억했고, 남자도 그녀의 번호인 11번만 알고 있었다. 그는 심지어 조수아의 얼굴도, 목소리도 알지 못했다. 혹시라도 나중에 망망인해 속에서 두 사람이 서로 스쳐지난다 해도 남자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셈이었다. 그때의 기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계속해서 조수아의 뇌리에 떠올랐다가
육문주는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조수아가 지난번 일로 아직까지도 속을 끙끙 앓고 있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육문주는 사건의 진말을 알아내려고 사람을 시켜 증거 확보에 착수했었다. 그러나 정체 모를 사람이 중간에서 그 증거를 가로채가는 탓에 결국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육문주에게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조수아는 차갑게 입술을 휘었다.“대답하지 않아도 돼. 답을 이미 알 것 같으니까. 다들 나가. 누구도 이번 일에 관여하지 마.”그때 문가에서 연성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육 대표님께
“조수아, 이리 줘.”“아직도 나한테 준 상처가 부족해서 그래? 꼭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상처를 헤집어야겠어?”그녀가 이런 반응을 보일수록 육문주는 꼭 영상을 보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더 섰다. 조수아의 반항에도 억지로 그녀의 손에서 U디스크를 뺏은 육문주는 그걸 컴퓨터에 연결하고 영상을 재생시켰다.송미진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나자마자 안혜원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미진아, 왜 그래! 문주야, 미진이가 쓰러졌어. 얼른 미진이를 의사한테 데려다 줘!”고개를 돌린 육문주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진 송미진을 발견했
그녀의 말에 육문주의 동공이 순식간에 수축했다. 그윽한 눈매가 살얼음이 낀 호수처럼 어둠속에서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다.“그것만 빼고 다른 걸 마음대로 말 해.”“내가 원하는 건 그것밖에 없는데? 말을 뱉었으면 약속한대로 해야지.”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불쑥 아래로 향했다. 커다란 몸집이 그녀를 아래에 가둔 채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얼굴을 향해 쏟아졌다. “조수아, 그렇게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어?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고 싶어 그렇게 안달났냐고!”조수아는 감정변화 없이 답했다.“당신 마음대로 생각해.”육문주의 음성이 싸늘하
조병윤이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답했다.“예전에 물에 빠졌다가 죽을 뻔했던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부터 물을 무서워하기 시작했죠.”그는 조수아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 약은? 날 봤으면 빨리 약부터 꺼냈어야지. 아무튼 둘이서 스킨십하느라 바빠서는. 역시 젊은이들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니깐.”조병윤은 조수아의 손에서 약을 받아든 뒤 바로 두 알을 까서 입으로 삼켰다.육문주는 그가 이 화제를 입에 올리기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일로 조수아가 그때 당시에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을지 미루어 짐작이 되는 부
곽명원이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렇지 않아도 우리 와이프가 나한테 경고하더라고. 너한테 한 마디라도 잘못 털어놓았다간 나랑 이혼할 거라면서. 내가 들은 건 딱 이 한 마디야. 넌 진실을 알 자격이 없대. 미안하다, 친구야.”육문주가 뭐라고 더 덧붙이기도 전에 곽명원은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꽉 다문 잇새로 단마디 욕설이 비집고 나왔다.차에 시동을 걸고 떠난지 얼마 안 돼, 조수아는 연성빈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선배, 무슨 일이에요?”“진규민이 도망쳤어. 모레 있을 법정에서 유일하게 내놓을 수 있는 증인이
육문주는 심장이 찢겨 나갈 것처럼 아팠다. 윤곽이 분명한 얼굴에 전에 없던 실망감이 떠올랐다. 얇은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려 한참을 아무런 소리도 내뱉지 못했다. 한참을 조용히 조수아를 쳐다보던 그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조수아, 우리 그냥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거야? 매일 나랑 이렇게 날 세우는 거 피곤하지도 않아?”눈물로 글썽이는 얼굴이 입가에 조소를 그렸다.“그럼 사람 시켜서 나 기억상실증 걸리게 만들던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아무리 문주 씨를 불러도 당신을 찾을 수 없었던 그때의 고통을 잊게 하고, 3년
검은색 정장을 빼입은 육문주가 서늘한 표정으로 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진규민이 서 있었다. 그윽한 눈빛이 조수아의 몸에 몇 초간 머물렀다. 진규민을 법정에 넘긴 육문주는 비어 있는 방청석을 찾아 자리에 착석했다. 증인석에 이끌려 도착한 진규민은 쇠약해진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판사님, 저는 육엔 그룹 기술부의 진규민이라고 합니다. 그날의 사건을 담은 영상을 제가 지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영상을 지우라고 한 건 조수아 씨가 아니라 육엔 그룹의 부대표님이신 안혜원 이사님입니다. 그분께서 저한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