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망설이던 부시혁이 전화를 받았다.“시혁 씨, 미팅은 끝났어?”수화기 저편에서 고유나의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응.”“그럼 백화점으로 와서 나랑 어머님 픽업 좀 와줄래? 쇼핑하러 나왔는데 갑자기 비가 내리네. 박 기사는 민혁이 데리러 갔거든. 부탁 좀 하자.”부시혁은 조수석에서 잠 든 윤슬을 힐끗 바라보더니 대답했다.“그래. 15분 뒤에 도착할 거야.”“그래, 조심해서 와.”윤슬이 쓰는 향수 냄새로 물든 차를 둘러보던 부시혁은 또 왠지 모르게 치미는 짜증에 미간을 찌푸렸다.우산을 펴고 차에서 내린 부시혁이
“유나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갑자기 어두워진 고유나의 표정을 눈치챈 왕수란이 물었다.고유나는 바로 휴대폰을 다시 핸드백에 넣고 별일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아니에요. 엄마가 언제 집에 들어올 거냐고 물으시네요. 차에서 내리면 따로 전화드리려고요.”고유나의 말에 왕수란은 별다른 의심 없이 부시혁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왕수란이 그녀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다시 휴대폰을 꺼내 친구가 보낸 문자를 확인했다.문자의 요지는 마침 오늘 한일 펜션에 있었던 친구가 미팅 중인 부시혁을 발견했
윤슬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성준영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소파에 기댔다.“우리 두 그룹도 사업 파트너잖아요? 이럴 때 서로 돕고 그러는 거죠.”하지만 성준영의 말을 윤슬이 곧이곧대로 믿을 리가 없었다.“성준영 씨, 우리 오늘이 두 번째 만남이에요. 서로에 대해 잘 모른다는 말이죠. 비즈니스도 각자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하기로 한 거고요. 지금 천강그룹의 상황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요. 다들 피하는 시한폭탄 같은 회사에 더 좋은 하청업체를 소개해 주겠다... 그 말을 제가 믿을 수 있을까요?”성준영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터
하지만 윤슬은 더 이상 부씨 집안 며느리가 아니었다. 왕수란의 말도 안 되는 폭력을 견딜 필요가 없다는 걸 의미했다.윤슬은 왕수란의 손목을 낚아챈 뒤 거칠게 뿌리쳤다. 생각지 못한 윤슬의 반격에 왕수란은 발목을 삐끗하더니 중심을 잃고 그대로 털썩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아이고, 회사 대표가 사람을 때리네.”“사모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말로 하시죠.”윤슬의 맑은 눈동자에 언짢음이 서렸다.“또다시 폭력을 행사하신다면 저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당당한 윤슬의 모습에 왕수란의 얼굴은 분노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옷매무새를 정리한 윤슬은 또각또각 경비원들을 향해 걸어갔다.“사모님이 오늘 컨디션이 안 좋으신 것 같네요. 밖으로 모시세요.”“야! 이거 안 놔? 내가 누군 줄 알고! 내가 오늘 저 계집애 죽여버릴 거야!”경비원들의 손에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왕수란은 욕설을 멈추지 않았다.왕수란이 끌려나갔으니 상황 종료, 모여들었던 직원들도 눈치껏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죄송합니다”윤슬은 옷소매에 묻은 커피 자국을 티슈로 닦으며 싱긋 미소 지었다.“우스운 꼴을 보였네요.”잠시 후, 엘리베이터, 묘한 표정으로 윤슬을 바라보던 성준영은 기
부시혁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준영의 질문은 멈추지 않았다.“그런데 천강에 망고는 왜 보낸 거야?”부시혁이 미간을 찌푸렸다.“그게 무슨 소리야?”이에 성준영은 재잘재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부시혁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 그는 말없이 바로 햇빛 가든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상황을 알아보겠다던 담당자가 부랴부랴 사과를 건넸다.“죄송합니다. 저희 쪽 직원이 대표님께서 이혼하셨다는 사실을 몰랐나 봐요. 그래서 올해도 윤슬 씨 주소로 보낸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부시혁의 옆에 붙어 통화 내용을 전
항상 우아하고 고고한 모습만 보여주던 부시혁 대표에게 저런 악독한 어머니가 있다는 사실에 다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하지만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직원들 중 윤슬에게 악감정을 품고 있는 이들이 찍은 영상의 앞부분은 잘라버리고 공유하기 시작했다. 왕수란이 악을 쓰는 모습은 완전히 편집되고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전 시어머니에게 예의 없게 구는 윤슬의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게다가 이 영상을 시작으로 윤슬와 남자 모델이 아주 오래전부터 내연 관계였으며 그 관계가 들통나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부씨 집안에서 쫓겨난 것이라는 음모
“그러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네...”일찍 세상을 뜬 큰 딸 생각에 흰 국화꽃 다발을 든 채연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곧 오열하기 시작했다. 자식을 먼저 앞세운 부모는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큰 딸을 잃고 큰 딸에게 줄 사랑까지 모두 둘째 딸인 고유나에게 쏟았지만 해마다 기일이 될 때마다 다시 큰 딸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채연희였다.“그만 울어.”고요천은 채연희를 품에 안은 채 위로했다.“오늘은 유정이 기일이기도 하지만 유나 상견례 날이기도 하잖아. 유정이도 하늘에서 보면 분명 기뻐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