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진 변호사는 사건의 원인과 이유 그리고 과정과 결과에 대해서 상세히 알려줬다.김온은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친척들과 친구 중에서는 사업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씨 가문은 크고 이름있는 가문이었기에 청주에 있는 가온 그룹과 나씨 가문은 종종 서로 왕래를 했다. 그렇기에 김온은 NS 그룹이 나상준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주영 그룹과 합작하는 회사가 다른 회사라면 몰랐겠지만 NS 그룹과 합작하고 있다는 걸 안 김온은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계속 생각이 났다.주영 그룹과 NS 그룹은 이제 막 합작을 시작한 게 아니라 예전부터 합작을 해왔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NS 그룹에서 주영 그룹과 합작을 그만하자고 한 것도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사업에서 이익을 내려 하지 손실을 입히려 하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NS 그룹이 지금 지위가 매우 높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투자한 돈을 도로 거두어 드릴 수는 없었다.공교롭게도 차우미와 주혜민의 사건이 터진 후 주영 그룹의 안 좋은 소식이 터졌고, NS 그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영 그룹과의 협력을 바로 중단했다.이영진 변호사의 말을 들은 김온은 주영 그룹의 안 좋은 소식을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합작하는 사이에 한쪽에 문제가 생긴다면 다른 한쪽도 반드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바로 한쪽과의 관계를 청산하거나 함께 해결해나가는 방법이 있었다.주영 그룹과 나씨 가문은 사이가 좋았다. 가온 그룹과 나씨 가문의 관계보다 더 좋았기에 NS 그룹에서는 주영 그룹을 도와주는 게 맞았다.NS 그룹에서 도와줬다면 주영 그룹은 바로 일을 해결했을 것이다.그러나 NS 그룹에서는 주영 그룹과의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선택했다.김온은 NS 그룹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었다. 특히 주혜민과 나상준의 관계로 봤을 때 이런 상황에서 NS 그룹이 주영 그룹을 도와줘야 했지만 NS 그룹에서는 도와주지 않았다.NS 그룹은 무정하고 냉담했다.김온의 머릿속에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걸 동원해서 그 사람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그녀가 상처받는 것도 참을 수 없고 그녀가 억울해하는 것도 참을 수 없다.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차오른다.소문처럼 나상준이 주혜민을 사랑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영 그룹을 도와주는 게 맞았다.만약 차우미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바로 차우미의 앞에 서서 일을 해결해 주는 것과 같은 도리이다.그러나 이런 때에 나상준은 주혜민 앞에 나서서 그녀를 지켜주지 않고 오히려 멀리했다.특히 나상준에게는 도와줄 능력이 있었지만 도와주지 않았다.이 사실은 김온에게 한 가지 사실을 똑똑히 알려줬다. 나상준은 주혜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거였다.신경 쓰지 않는다면 그 소문들은 어떻게 퍼지게 된 걸까?이영진 변호사에게 일에 대해서 자세히 들은 김온의 마음속에 불가사의한 생각이 떠올랐다.그건 보복이었다.주혜민이 차우미를 괴롭혔기에 주영 그룹에 이런 문제가 발생하게 된 것이고 NS 그룹이 무정하게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며 모든 것이 차우미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이런 생각이 떠오른 김온은 자신의 생각에 깜짝 놀랐다.그러나 김온은 곧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그럴 리 없어.’나상준이 차우미를 위한다고 해도 자신의 사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는 없었다. 사업은 전쟁터와 같기에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이 점은 김온도 잘 알고 있었다.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나상준은 차우미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신경 쓰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들이 이혼한 상태였기에 나상준이 차우미를 위해서 이런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그러기에 이건 불가능한 일이었다.김온이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건 그의 마음속에 여전히 불안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김온은 차우미 맘속에 있는 나상준의 자리를 대체하고 싶었지만 이건 몹시 어려운 일이라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시간과 경력은 지워지기 매우 어려운 것이기
회성.사우스 호텔 스위트룸.회성은 연해 도시로 다섯 시면 날이 밝았다. 잠들어 있던 모든 것이 서서히 깨어나며 도시도 북적거리기 시작했다.이 시각, 스위트룸 침실.담요를 덮은 차우미가 소파에 웅크리고 누워 깊이 자고 있었다.언제 닫혔는지 모르는 커튼 사이로 밖의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빛이 두꺼운 커튼을 통해 방안으로 들어와 방안의 짙은 어둠을 몰아내고 사물을 어렴풋이 볼 수 있게 해줬다.나상준은 소파 앞으로 걸어가 몸을 숙여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사람을 안았다.어제 늦은 시간에 잠든 차우미는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나상준이 침대에서 내려오는 소리도 듣지 못한듯했고 심지어 안아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그러나 몸이 붕 뜨니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는 느낌을 받은 것인지 자고 있던 그녀의 몸에 움직임이 있었다.불안한 그녀는 몸을 움직이며 손을 뻗어 뭔가를 잡으려 했다. 손에 뭔가가 잡힌 그녀는 힘을 주어 꼭 잡았다.그런데 뭔가가 이상했다.잡은 무언가의 온기가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통해 그녀의 몸에 전해졌다. 깊이 잠들어 있던 그녀의 의식이 서서히 깨어났다.눈썹을 살랑이던 그녀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눈앞에 들어온 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짙은 눈썹은 한눈에 마음을 빼앗아 갈 것 같은 얼굴이었다.금방 잠에서 깬 차우미는 정신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기에 나상준을 보고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몽롱한 두 눈엔 피곤이 가득했다.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깬 것 같지 않았다.나상준은 차우미를 안고 침대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나 품 안에 있던 차우미가 부드러운 손으로 나상준의 팔을 잡자 그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그녀는 눈을 뜨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그는 멈춰 서서 차우미가 잠에서 깬 모습을 바라봤다. 반쯤 뜬 몽롱한 두 눈엔 평소에 있던 냉정함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를 답답하게 만들고
“조금 더 자.”나상준은 낮은 목소리로 차우미에게 말한 뒤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 주고는 샤워실로 걸어 들어갔다.모든 것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차우미는 침대에 누워 침착하게 욕실로 걸어 들어가는 나상준을 멍하니 쳐다봤다.‘꿈이 아니야?’자신이 누워있는 자리가 전에 나상준이 누워있었던 자리인지 따뜻했다.나상준의 특유의 향기와 함께 열기가 그녀의 옷을 통해 몸에 고스란히 전해졌다. 꿈이 아닌 현실인 게 느껴졌다.그렇다. 현실이다.모든 것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차우미는 입술을 벌린 채 말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자연스럽게 잠에서 깬 것이 아닌 갑작스럽게 잠에서 깨어난 차우미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었다. 머리가 매우 혼란스러웠다.‘침착하자, 차우미.’차우미는 두 눈을 감고 주위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차들의 경적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차우미의 귓가에 선명히 들려왔다. 욕실에서 들려오는 쏴 하는 물소리도 포함되어 있었다.시끌벅적한 소리에 차우미의 정신이 서서히 맑아졌다. 더는 머리가 혼란스럽지 않자 그녀는 눈을 떴다.이 시각, 차우미의 두 눈에 몽롱함은 보이지 않았다.차우미보다 일찍 깨어난 나상준은 그녀가 편히 쉴 수 있게 그녀를 안고 침실로 들어갔다. 씻으러 들어간 나상준은 더는 휴식을 취할 것 같지 않았다.차우미는 나상준의 컨디션이 어떤지 궁금했다.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욕실을 바라봤다. 조금 전의 그의 목소리가 어젯밤보다는 확실히 좋아진 것 같았다.그러나 아직도 쉬어있는 목소리가 어젯밤 밥을 먹을 때와 비슷했다.조금 전 나상준의 팔을 잡았을 때, 어젯밤처럼 그렇게 뜨겁지 않았기에 그녀는 그가 열이 조금 내렸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확신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어젯밤에 먹은 약이 효과가 있었다는 건 차우미는 확신할 수 있었다.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차우미는 시선을 거두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어젯밤에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
차우미는 걸음을 멈추고 옅게 웃으며 나상준을 바라봤다.“몸은 좀 어때?”나상준이 머리를 닦으며 샤워가운을 입고 걸어 나왔다.그는 샤워 가운을 단정히 입고 허리끈도 잘 묶고 있었다.그는 앞에 서서 자신을 향해 웃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녀는 소외감과 낯선 사람에게 차리는 웃음이 아닌 그를 관심해 주는 모습이었다.그들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아주 가까워 진듯했다.나상준은 차우미의 눈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몽롱하지 않은 맑은 눈빛이었다.나상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낮은 목소리가 "응." 이라고 대답하자 차우미는 이내 웃으며 입을 열었다.“머리 말리고 옷 갈아입어. 난 가서 물 끓이고 있을게. 그거 마시면 목이 좀 괜찮아 질 거야.”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확실히 어젯밤보다는 많이 좋아져 있었다.말을 마친 차우미는 주저하지 않고 바로 침실을 빠져나갔다.나상준은 걸어 나가는 사람을 바라봤다. 그녀는 씻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흐트러짐 없이 깔끔했다.다만 평소 묶고 다니던 긴 머리를 묶지 않은 채 허리 뒤로 넘기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에 놓여 있었다.그는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거두고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차우미는 물을 끓인 뒤 컵을 씻었다. 그리고는 물을 식혔다.그녀는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물을 끓인 뒤 씻어 놓은 컵에 물을 두 잔 따르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고 아침을 주문했다.아침은 먹어야 했다. 나상준의 몸 상태와 자신의 몸 상태로 봤을 때 반드시 담백한 아침을 먹어야 했다. 차우미는 물이 식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나상준이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아침을 주문하려 했다.나상준이 나오지 않자 차우미도 딱히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출근해야 했다.어젯밤 밥을 먹을 때 룸에서 말했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원래 그녀는 오늘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해결 방안을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지금 나상준의 몸 상태로 보았을 때 그를 데리고 병원에 한 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그래서 그녀는 오늘 오
겨울의 한기가 아직 가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네 시를 넘기자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비가 내리면서 아지랑이가 피어올라 봄의 시작을 알리며 아늑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초봄의 시작을 알렸다.시내의 어느 유치원.사무실을 나온 차우미는 처마 밑에 서서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느릿느릿 우산을 펴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오늘은 시댁에 가족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시할머니는 가족간의 우애를 가장 중요시 여기는 분이었다. 나 회장이 돌아가신 뒤로 가문에는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하루는 꼭 시간을 내서 본가로 돌아와 저녁을 같이 하는 풍습이 생겼다.이 풍습은 차우미가 NS그룹 며느리가 되기 전부터 이미 오십 년이나 전해져 내려온 풍습이었다.아침부터 비 온다는 예고는 있었지만 오후에 뒤늦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저녁이 되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조용히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시간을 확인해 보니 다섯 시가 다 돼가고 있었다. 나상준은 며칠째 출장 중이었다. 아침에 나상준의 비서인 허영우에게 문자를 보내 확인했을 때는 예정대로 세 시 사십 분에 공항에 도착한다고 했다.네 시가 넘었으니 아마 지금쯤은 도착했을 것이다.차우미는 방향을 틀어 주차장을 벗어났다.청주에 있는 시댁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에서 한 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차우미는 직접 시댁으로 가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나상준이 집에 도착하면 그와 같이 시댁으로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관강동은 청주의 유명한 부유층들이 사는 주택가였다. 나상준과 차우미가 결혼생활을 시작한 곳이었다.창 밖에서 바람이 불어오자 금방 싹을 피워내기 시작한 비에 젖은 나뭇가지들이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차우미는 익숙한 길을 따라 저택으로 들어가서 검은색 롤스로이스 뒤에 차를 세웠다.차가 도착한 걸 보니 그가 돌아온 모양이었다.시동을 끈 그녀는 핸드백을 챙겨 집으로 들어갔다.“일단 그렇게 알고 진행해.”커다란 거실 창문을 통해 커튼 사이로 거실에 앉아 담배를 피우
시댁은 청주시 남부의 교외에 위치해 있었다. 번화한 시내와 떨어져 산과 들을 등지고 지은 호화저택은 요양하기 최적인 곳이었다.차가 서서히 정원으로 들어서자 가족들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날은 이미 저물었고 저택에서는 밝은 불빛이 새어 나왔다. 빗소리와 가족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어우러져 아늑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다.최우미는 곱게 포장한 쿠키를 들고 나상준과 함께 차에서 내렸다. 집 안에서 어린 소녀가 뛰어나오더니 앳된 목소리로 그들을 맞아주었다.“큰아빠, 큰엄마!”최우미는 미소 띈 얼굴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박스를 아이에게 건넸다.“열어봐.”아이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더니 환호를 질렀다.“와! 백설공주랑 일곱 난쟁이다!”최우미는 동화이야기를 좋아하는 아이들 취향을 고려해 동화 속 캐릭터를 닮은 쿠키를 만들어 아이에게 자주 선물하고는 했는데 여느 베이커리 전문가와 비해도 전혀 뒤쳐지지 않았다.“마음에 들어?”“네! 너무 마음에 들어요! 감사합니다, 큰엄마!”“마음에 들었으면 됐어.”가족들은 이미 모두 도착해서 최우미와 나상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지각했다고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둘은 가족들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전하고 자리에 앉았다.나상준의 할아버지인 전대 회장님은 아주 일찍 돌아가셨다고 했다. 네 아이와 함께 졸지에 든든한 가장을 잃었지만 이혜정 여사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녀는 홀로 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네 아이를 돌보고 회사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로 회사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빚더미에 허덕이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나 회장이 사망한지 불과 3년이 되던 해에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막내아들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남편을 잃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자식까지 잃은 이혜정 여사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는 대신, 다시 일어서서 홀로 아이들을 길러냈고 지금의 NS를 대기업으로 성장시켰다.장남인 나상준의 아버지 나명덕은 슬하에 1
“따라와.”문하은은 싸늘하게 한마디 던지고 홀로 위층으로 올라갔다.차우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시어머니를 따라갔다.시댁은 전형적인 전통식 궁전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기왓장 하나하나 신경을 썼고 목재도 은은한 나무 향이 풍기는 원목 자재를 사용했다.시할머니는 원래 청주에서 잘나가는 재벌가의 딸이었으나 경제위기가 찾아오면서 가문이 몰락하여 당시는 아직 평범한 직장인에 불과했던 나동석과 결혼했다고 했다.빗소리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차우미는 문하은을 따라 서재로 들어가 열린 창문을 닫았다.방 안에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앉아.”문하은이 먼저 자리에 앉고 차우미는 그녀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네가 우리 집에 시집온 지도 벌써 3년이 돼가는구나.”문하은은 대대로 교수를 배출한 학자 가문의 출신이었다. 그녀가 나명덕과 결혼할 당시, 이혜정 여사는 이미 혼자 힘으로 NS그룹을 일으켜 세웠기에 그녀와 나명덕의 결합은 잘 어울리는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었다.이혜정은 돈보다는 자라온 가정환경을 더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이 집에 3년을 살면서 눈칫밥에는 이골이 난 차우미였기에 문하은이 자신을 따로 불렀을 때 무슨 말을 할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자식 문제.그녀와 나상준은 결혼한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아이가 없었다. 품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어머니였기에 3년 동안 심한 말 한번 하지 않았지만 은근히 눈치를 준 것도 사실이었다.“네, 어머니.”남 얘기하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시어머니 앞에서 차우미는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문하은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참았던 불만을 토로했다.“처음부터 난 이 결혼 반대했다. 집안이나 학벌 어느 것 하나 우리 상준이에 비해 많이 떨어졌으니까. 하지만 어머님이 널 지목했고 상준이도 불만이 없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어.”“하지만 3년 동안 기쁜 소식 한번 없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니?”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란 문하은이었기에 책망하는 말조차도 차분하고 부드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