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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눈물 범벅이던 강우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려왔다.

지금 그녀의 눈에 보이는 저 강인한 인상의 남자가... 정말 환각이 아닌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맞는 건지 의심스럽기마저 했다.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 5년 동안 수없이 그리워했던 그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된 마음과 달리 몸은 이미 이 상황을 인지한 듯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드디어... 드디어 왔네요. 드디어...”

한지훈은 품에 안긴 가냘픈 그녀의 등을 내려다 보았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확연히 마른 몸이 그 동안의 고생을 말해 주는 듯했다.

강우연의 눈물과 핏방울을 닦아주던 한지훈의 눈동자는 그녀의 총상을 발견하고 다시 차갑게 식어버렸다.

심장과 단 몇 센치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 정말 하마터면 죽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살의가 치솟았다.

“으악, 으흑흑...”

한편, 김태우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양예나의 등을 다시 꾹 밟았다.

비록 등은 찢어질 듯 아팠지만 양예나는 감동의 미소와 함께 한지훈과 강우연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몇 미터나 되는 곳에서 훌쩍 뛰어내려 강우연을 구하던 그 모습, 마치 영화속 멋진 남자주인공, 동화속 왕자님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양예나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설마... 저 남자가 고운이 아빠?’

“우연아, 드디어... 드디어 만났구나. 축하해. 이제 저 사람이랑 행복하게 살아. 다시는 이런 데 오지 말고... 영원히 행복하게...”

속삭이듯 이 말을 내뱉은 양예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한 듯 스르륵 눈을 감았다.

“탕!”

김태우의 총구에서 발사된 총알이 양예나의 두 다리를 관통했다.

“꺄아악!”

양예나의 비참한 비명소리가 건물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김태우는 저 멀리 서로를 안고 있는 한지훈과 강우연을 바라보며 악을 썼다.

“당장 잡아! 저 자식들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오라고!”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가 건물을 가득 채우고 김태우와 수십 명의 경호원들이 타워 팰리스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바로 눈에 들어온 강우연과 한지훈.

뭐 애틋한 커플이라도 되는 듯 서로를 꼭 안고 있는 모습이 유난히 눈꼴 사납게 느껴졌다.

“야, 너 뭐야! 누군데 갑자기 훼방을 놓고 난리야!”

기세등등하게 달려온 김태우가 바로 한지훈의 미간 사이에 총구를 겨누었다.

동시에 나무에 앉아있던 새들 역시 까악까악 불길한 울음소리와 함께 날아오르며 긴장감 넘치는 이 상황의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하지만 총구가 급소를 겨눈 이 급박한 상황에서도 한지훈의 시선은 오직 피투성이인 강우연에게 꽂혀있었다.

지난 5년간, 복수에 미쳐 존재 조차 잊고 살았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죄스러웠고 죄책감이 작은 가시처럼 그의 양심을 콕콕 찔러댔다.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벙긋거리던 한지훈이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우연아. 그 동안 연락 한번 하지 않아서 미안해... 우리 이제 집에 가자. 우리 고운이 만나러 가는 거야.”

한지훈의 품에 안긴 강우연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너무 힘들다. 이대로 그냥 자고 싶어... 이렇게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안겨본 게 얼마만이더라... 지난 5년간,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시간이 그냥 멈췄으면 좋겠다... 이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게.’

다음 순간, 공주님 안기로 강우연을 번쩍 안아든 한지훈이 발걸음을 옮기려 하자 투명인간 취급을 당한 김태우가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야, 내 말이 말 같지 않아? 지금 거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더 움직여 봐. 바로 쏠 거니까.”

김태우도 아예 바보는 아닌지라 지금 눈앞의 이 남자가 강우연이 지난 5년간 그토록 잊지 못했던 남자, 그 짜증 나는 계집애의 생부라는 것을 말이다.

꿈에서마저 부숴버리고 싶던 그 남자였는데... 실제로 만나면 죽여버리라 마음을 먹고 또 먹었었는데...

그 생각도 잠시, 한지훈이 고개를 돌린 순간, 그 서늘한 눈빛에 김태우는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저승의 염라대왕을 실제로 보면 저런 얼굴이지 않을까 싶은 모습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것은 자신보다 훨씬 하등한 것을 내려다 보는 경멸이 가득 담긴 눈빛, 손가락에 힘 조금만 주면 바로 짓이길 수 있는 벌레를 보는 듯한 그런 눈빛이었다.

방금 전까지 기세등등하던 김태우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꼴에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덜덜 떨며 더듬거리면서도 말을 이어갔다.

“내가 누군지 알아? 금조그룹 김정필 회장이 우리 아버지야. 내... 내 털끝 하나 건드려 봐. 넌 물론이고 강우연, 그리고 너희 두 사람이 낳은 그 더러운 핏줄까지 전부 죽여버릴 거니까.”

온힘을 다해 이 말을 외친 김태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가 힘이라도 풀리면 안 되지 싶어 발끝에 힘을 꽉 주었다.

‘왜... 왜 이렇게 겁이 나는 거지? 굳이 아버지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저 자식이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어 봐. 지난 5년간, 연락 한 번 안 하고 잠수를 탔겠어? 쫄지 마, 김태우. 넌 금조그룹 유일한 후계자, 김태우야.’

한편, 피를 너무 많이 흘려 흐릿해지는 정신을 겨우 부여잡은 강우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놔요. 어차피 우리 두 사람 다 여기서 나가는 건 불가능이에요. 지훈 씨라도 가서... 우리 고운이 지켜줘요. 진심으로 아빠 보고 싶어 했으니까..”

총상도 입었겠다. 부상을 입은 채 함께 도망치다 한지훈에게 짐이나 되느니 차라리 한지훈이라도 도망치게 두는 게 나을 거란 생각에 한 말이었다.

‘지훈 씨라면... 우리 고운이 잘 키울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나 하나쯤은... 그냥 죽어도...’

하지만 한지훈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강우연을 더 꽉 끌어안았다.

“걱정하지 마. 고운이는 내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겼어. 치료도 잘 받고 있으니까 곧 깨어날 거야.”

그 말을 들은 강우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정말? 정말이죠? 다행이다... 흑...”

“으아아악! 내가 죽여버릴 거야! 다 죽여버릴 거야!”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질투의 불꽃이 활활 타올랐다.

하지만 그가 방아쇠를 당기려던 순간,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그의 팔이 홱 꺾이고 다음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방금 전까지 그의 손에 쥐고 있던 총은 어느새 한지훈의 손에 들려있었다.

“으아아악!”

놀라움 뒤에 느껴지는 건 바로 극심한 고통,

기괴하게 비틀어진 팔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주저앉은 김태우가 부들부들 떨며 한지훈을 노려보았다.

“왜? 날 죽이기라도 하려고? 우리 아빠가 금조그룹 회장이라고! 네가 감히 날 죽일 수 있겠어? 그... 그래. 돈, 돈 줄게. 그냥 곱게 보내주면 1억, 10억, 아니 100억도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제발...!”

하지만 총을 빼앗은 한지훈의 눈빛은 차갑기만 했다.

“그딴 짓을 저지르고도 살 수 있길 바랐어?”

“안 돼요... 안 돼. 저 사람 정말 금조그룹 회장 아들이라고요. 우리가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른 도망쳐요.”

지난 5년 동안 한지훈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걸 이뤄냈는지 알 리가 없는 강우연은 행여나 그가 이 자리에서 정말 사고라도 칠까 봐, 그래서 일이 더 커지게 될까 봐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김태우의 경호원들 역시 비수와 곤봉을 꺼내 한지훈을 향해 달려들었다.

“일단 도련님부터 엄호해!”

그들을 향해 달려드는 장정들을 바라보던 강우연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매서운 기세로 뛰어오던 남자들은 한지훈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거짓말처럼 그 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살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매서운 눈빛, 사냥감을 노려보는 살모사 같은 독기 어린 눈빛, 나름 싸움 좀 한다하는 이들이었기에 이 정도 기백은 아무나 함부로 가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차마 그 누구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뭘 멍하니 서 있어! 저 자식... 당장 죽여버려! 저 자식 목 따는 사람한테 내가 1억, 아니 10억 줄게!”

한쪽 구석에 널부러진 김태우가 마지막 기운을 짜내 소리쳤다.

‘뭐? 10억?’

거금의 유혹에 경호원들 중 누군가가 먼저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선 한지훈의 킥에 맞은 남자는 퍽 하는 굉음과 함께 십여 미터를 나가떨어져 주차된 차량에 부딪혔다.

“으아아악!”

혼자서 공격해선 승산이 없다는 판단에 경호원들이 동시에 달려들었지만 모두들 단 한 번의 공격에 나가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엉금엉금 기어 먼 곳으로 대피한 김태우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침을 꿀꺽 삼켰다.

‘저... 저 자식 뭐야. 뭐, 용병 이런 거야? 무슨 싸움을 저렇게 잘해!’

이 급박한 상황에서 김태우의 머리를 가장 먼저 스친 생각은 바로 이대로 있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다였다.

여전히 극심한 고통이 밀려오는 팔을 부여잡은 김태우가 비굴하게 일어서며 바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탕!”

하지만 그를 곱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던 한지훈이 쏜 총알은 정확히 그의 다리를 명중했다.

“으아아악! 너 뭐야! 가까이 오지 마! 저리 가! 저리 가라고!”

다리에서 줄줄 흐르는 피가 어느새 작은 웅덩이를 만들고 핏더미에 그대로 꼬꾸라진 김태우는 사신처럼 스르륵 다가오는 한지훈을 바라보며 기겁했다.

하지만 김태우의 비굴한 애원에도 한지훈의 마음은 점점 차갑게 굳어만 갔다.

‘김태우... 내가 널 어떻게 이대로 보낼 수 있겠어. 내 딸을 사지에 몬 것도 모자라 내 여자까지 죽일 뻔한 너를 어떻게...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이고 싶지만... 그러진 않을 거야. 이대로 죽는 건 너무 아쉽잖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뭔지 보여줄게. 넌 물론이고 네 가족들까지 너와 함께 지옥으로 떨어질 거야...’

“안 돼! 안 돼요, 지훈 씨! 제발 진정 좀 해요.”

이때 강우연이 한지훈 앞을 막아섰다.

“저 사람 재벌집 아들이라고요. 금조그룹 회장이면 말 한 마디로 나랑 당신 우리 고운이까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버릴 수도 있어요. 제발... 제발 그냥 보내줘요. 나 더 이상 지훈 씨랑 우리 고운이 위험해지는 거 싫어요...”

하지만 강우연을 꼭 껴안은 한지훈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우연아, 저 자식... 지금 내가 곱게 보내준다 해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날 믿어. 내 방식대로 깔끔하게 해결 할 테니까.”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비수를 주운 한지훈이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도망치려고 바닥을 기는 김태우의 뒤를 천천히 쫓았다.

터벅터벅.

한지훈의 발걸음 소리를 느낀 김태우가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더 빨리 움직였지만 아무리 발버둥쳐도 독 안에 든 쥐 신세일 뿐이었다.

그리고 곧 한지훈의 손에 들린 비수가 김태우의 사지를 관통했다.

“으아아악! 야, 너 미쳤어.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뭔데 감히 나한테 이런 짓을. 이러고도 네가 무사히 살 수 있을 것 같아. 너뿐만 아니라 네 여자, 네 딸까지 전부 죽을 거야.”

김태우의 귀신 같은 처참한 울부짖음이 건물을 가득 채웠다.

한편, 차마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볼 수 없었던 강우연은 두 눈을 막은 채 다급하게 외쳤다.

“지훈 씨, 얼른 가요. 금조그룹 사람들이 들이닥치면 그땐 정말 끝이에요. 제발, 어서요!”

가녀린 팔로 자신의 등을 미는 강우연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지훈은 왠지 기분이 묘해졌다.

‘금조그룹? 그딴 그룹 따위 트럭째로 덤벼도 두렵지 않지만 우연이한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윽...”

그때, 갑작스레 힘을 주어서인지 강우연이 비명소리를 흘리며 뒤로 넘어갔다.

“우연아, 괜찮아?”

허둥지둥 그녀의 허리를 잡은 한지훈의 질문에 강우연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애원했다.

“얼른 가. 제발... 우리 고운이 아빠까지 잃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저 멀리서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강우연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우리 조카를 이렇게 만들고 어딜 가!”

타워 팰리스 앞에 수많은 차들이 멈춰서더니 족히 백 명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 차례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검은 코트에 시가 담배를 입에 문 중년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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