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면 됐습니다. 그런데 강여름 씨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군요?”종잇장처럼 삐쩍 마른 그녀를 보자 최하준은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라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혼인 신고한 이래로 하루도 맘 편할 날이 없잖습니까! 강여름 씨가 죽으면 경찰이 가장 먼저 심문할 사람이 나라는 건 압니까?”“앞으로 이런 일 없을 거예요.”여름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걸 참으려고 창백한 입술을 꽉 깨물었다.최하준도 마음이 불편했다. 윽박 지르려던 건 아니지만 그래야 여름이 다시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을 것 같았다.“내가 사준 핸드폰은 어째서 그 집에 둔 겁니까?”“엄마한테 속아서 뺏겼어요.”“바봅니까?”“…맞아요, 이제부터 강바부탱이라고 부르시면 되겠네요.”“…….”이지훈이 “풉”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금세 병실 분위기가 좀 부드러워졌다.“됐어, 그만 자극하라고. 부모님한테 그런 일을 당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어.”여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최하준이 인상을 풀었다.“죽기 싫으면 이제 그 집 사람들한테서 멀리 떨어지십시오.”“하긴.” 이지훈이 끄덕였다.“앞으로 우리 하준이 밥 좀 부탁합니다. 보세요, 며칠 제수씨가 해주는 밥을 못 먹으니 성질이 점점 괴팍해지고 있지 않습니까?”“이지훈”최하준이 노려보자 지훈은 말을 멈췄다.여름이 참지 못하고 살짝 웃었다.“얼른 돌아가서 해줄게요.”“됐습니다. 본인 몸조리부터 합시다.”내내 딱딱한 목소리였지만 어쩐지 따뜻하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쭌,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한주그룹.한선우가 인터넷에서 그 뉴스를 본 지도 이틀이 지났다. 포털엔 이미 전문의의 진단서까지 공개돼 있었다.충격에 한동안 멍해 있던 한선우는 차를 몰아 강여경의 집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분노를 억누르며 따져 물었다.“여름이를 폐가에 두고 물도 없이 쉰 밥만 주셨다는 게 사실입니까?”“그게 말이 되나? 자넨 어려서부터 우리를 봐 왔잖나, 우리가 그런 사람인가, 어디?강태환은 울컥했다.
잠시 멍해 있던 한선우는 여름이 한 짓을 생각하자 금세 냉정함을 되찾았다.분명 여름이를 매우 좋아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전혀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다.“내가 방법을 모색해 보겠네.”강태환이 말했다.******여름은 입원한 지 3일 만에 퇴원했다. 요즘 병원에 너무 자주 입원했기 때문에 이제 더는 있고 싶지 않았다.컨피티움으로 돌아와 보니, 그동안 보살핌을 못 받아 야위었을 거라 예상했던 지오가 뜻밖에도 통통하게 살이 쪄 있었다.저녁에 돌아온 최하준은 여름이 지오에게 먹이를 주며 이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지오야. 다이어트 좀 하자. 네 배 좀 보라고, 임신한 것 같잖아.”최하준은 뜨끔했다.‘후우, 지오 배가 하루가 다르게 커지네. 곧 알게 되겠어.’어쨌든 집에 사람이 있으니 집에 돌아왔을 때 썰렁하지 않아서 좋았다.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여름이 이미 밥상을 다 차려 놓고 있었다.구해준 데 대한 보답인지 모두 최하준이 좋아하는 반찬들이었다.최하준은 한 번 쓱 보더니 찌푸리며 말했다.“찜이나 볶음 말고 이제 가끔 국물 있는 걸 하면 안 되겠습니까?”여름은 당황스러웠다. 전에 찌개를 끓여준 적이 있지만, 많이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아하지 않는 줄 알고 자주 하지 않았던 건데 오해였던가 보다.“알았어요, 특별히 먹고 싶은 거라도?”“사골국이나 삼계탕, 오리탕도 좋습니다. 인삼, 소꼬리, 동충하초, 이런 몸에 좋다는 거 좀 사 오십시오. 내 카드 쓰면 됩니다.”몸 보양 잘 하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거라는 의사 얘기를 대체 들은 건지 만 건지 답답했다. ‘아직 젊은 거 하나 믿고 이렇게 철이 없어서야.' “네.”여름은 순순히 대답했다.최하준이 말한 식재료는 모두 몸보신에 쓰는 것들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원래 몸에 좋다는 건 죄다 사다 먹는다고는 하지만, 어쩐지 뭔가 이상했다.식탁을 치우며 최하준이 오늘 반찬을 다 먹은 걸 보고서 그제야 깨달았다. 반찬이 지겨웠던 게 아니란 걸.‘맞다, 몸보신이 필
말 하는 중에 커다란 손이 여름의 입을 막았다.최하준의 손에서 마른 소나무 향기가 시원하게 났다. 그윽하니 좋았다.하지만 너무 뜨거웠다, 으아!“그만.”안경 렌즈 뒤, 남자의 눈 밑으로 빛이 반짝였다.여름은 얼굴이 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최하준이 손을 치우자 그제야 죽을 책상에 놓고는 말했다.“오래 일하길래 배고플 것 같아서요.”다진 쪽파가 송송 뿌려진 죽이 최하준의 식욕을 당겼다.“강여름 씨, 날 찌워서 잡아먹을 계획입니까?”“아뇨, 몸매는 지금 딱 좋은데요.”여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하지만 쪄도 난 상관없어요. 쭌 좋다는 여자가 없어지면 나한테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최하준은 여름을 한 번 쳐다보더니 입가에 싫은 티 역력한 웃음을 지었다.“됐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입원하는 여자는 못 데리고 삽니다.”“뭐 상관없어요. 내가 곧 돈 벌어서 부양할 테니.”여름이 큰소리를 쳤다.“내가 눈감기 전에 그런 날이 오려나….”최하준은 숟가락을 들어 죽을 저었다.완전히 무시당한 여름은 찝찝한 기분으로 서재를 나왔다.‘날 무시했어? 두고 봐, 증명해 보일 테니.’******새벽 1시.여름은 악몽에서 깨어났다. 머리가 온통 땀에 젖어 있었다.얼른 등을 켰다. 등불의 따뜻한 기운에 차츰 마음이 안정됐다.또 그 어두컴컴한 폐가에 갇히는 꿈을 꿨다. 오싹한 소리가 들려오는 밤이었다. 여름은 두려움에 몸을 웅크렸다. 도저히 혼자 잠이 들 엄두가 나지 않았다.한참을 망설이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나가 초조하게 안방 문을 두드렸다.“누구야?”한밤중에 깬 최하준의 목소리에는 심한 짜증이 베여있었다.“나예요.”안에선 한참 적막이 흘렀다. 여름이 거의 포기하려고 할 때쯤 방문이 휙 열렸다.머리에 까치집이 진 최하준이 문에 서 있었다.“날 설득할 만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겁니다.”여름은 눈을 깜빡이며 잘못 채워진 최하준의 잠옷 단추를 보고 있었다. 급하게 입고 나왔음이 분명했다.“무서워서….”힘없이 눈을 드는 여름의 얼굴은
“지금 한 말 잊지 마십시오.”최하준은 무표정하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갔다.여름은 쪼르르 달려가 최하준의 침대 옆에 이불을 깔았다.최하준은 처음엔 잠깐 경계했으나 여름에게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걸 보고는 곧 잠들었다.그러다 얼마나 잤을까, 울음소리에 잠이 깼다.“열어줘요… 제발… 문 좀… 너무 추워… 무서워… 무서워.”최하준은 일어나 앉았다.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비추고 있었다. 몸을 웅크리고 누워 두 손으로 귀를 막고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름의 모습이 달빛에 어렴풋이 보였다.“일어나요, 꿈입니다.”최하준이 침대에서 내려와 여름의 손을 귀에서 뗐다.그러나 여름은 악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계속 웅얼거렸다. 조그만 얼굴이 핏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창백했다.별수 없이 최하준은 여름을 품에 안고 어깨를 도닥였다.“걱정 말아요. 괜찮아요….”부드럽고 따뜻한 남자의 목소리에 잔뜩 긴장해 있던 여름의 몸이 스르르 풀리기 시작했다.어깨와 뺨에 검은 머리카락을 흐트리고 품에 폭 안긴 작디 작은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몸에선 화려하진 않지만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는 아니었다. 집에서 쓰는 샴푸 향이다.전에는 그 샴푸 향이 이렇게 좋은지 몰랐었다.향기에 취한 채 최하준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원래는 여름이 잠이 들면 내려놓을 생각이었으나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날이 밝아 있었다.두 사람은 베개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여름은 몸 반쪽을 최하준의 가슴에 기대고 달게 자고 있었다, 평온한 웃음을 띤 채.최하준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마치 달달한 신혼부부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잠시 후, 그는 이불을 살살 걷어냈다.그리고 여름의 잠옷 앞 섶이 거의 다 풀려 있는 것을 보았다. 마침 그때, 여름이 스르르 눈을 떴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여름의 동공이 확장됐다.자신이 최하준의 품에 누워있다는 걸 깨달은 여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한쪽으로 피했다.“아니, 왜 남이 침대에 들어와 있어요?”“…….”최하준은 어이가 없어 웃
“됐어요. 나한테 뭐라고 할 순 있지만 여자라서 그런 걸 가지고 뭐라 하면 안 되죠.”“좀 하면 어떻습니까?최하준의 말투에 화가 가득했다.“아 진짜….”여름은 열이 확 뻗쳤다. 갑자기 최하준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았다.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하준은 깜짝 놀랐다.‘설마 강제로 키스라도 하려는 거야?’머릿속은 젤리처럼 도톰한 여름의 입술로 가득했다. 그런데 더 생각할 새도 없이 뺨에서 갑자기 극심한 고통이 느껴졌다.이럴 수가… 꼬집었다.최하준은 여름을 힘껏 밀쳐냈다. 꼬집힌 자리를 문질렀다.젠장, 정말 아팠다.“강여름 씨! 내가 당신을 어쩌지 못할 줄 알고 이러시나 본데?”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제정신이 돌아온 여름은 몸이 떨렸다. 어쩌자고 이런 황당한 짓을 저질렀을까?“어… 내 얘기 좀 들어봐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쭌을 사랑해서….”여름은 더듬거리며 변명거리를 찾았다.“그런 말도 있잖아요. 꼬집어주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다고.”최하준이 다가와 이를 꽉 물며 말했다.“누굴 바보로 아는 겁니까?”“그럼 쭌도 한 번 꼬집어요.”여름은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날 사랑하는 만큼 꼬집어요. 사랑하는 만큼 세게 꼬집기!”“…….”최하준은 30년 인생 처음으로 욕이 나오려 했다.‘진짜 이런 식으로 도발해도 내가 어쩌지 못할 줄 아나 본데?’최하준이 왼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꽉 잡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여름의 뺨을 꽉 꼬집었다. 핑크빛 뺨은 찹쌀 모찌처럼 부드러웠다. 그대로 놓고 싶지 않았다.아악!최하준은 보드라운 얼굴이 빨갛게 된 걸 확인하고서야 놓아주었다.“이제 잊지 마십시오. 벌입니다.”여름은 아픔을 참고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아뇨, 이건 당신이 날 사랑한다는 증거죠.”“꿈 깨시죠.”차가운 웃음과 함께 최하준은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얼굴에 벌건 자국이 거울에 비췄다. 당장 나가서 어떻게 해주고 싶었다.망할.평상시라면 마스크를 써도 된다. 하지만 오늘은 재판에 출정해야 한다. 어느 변호
이지훈이 따끈한 커피를 한 잔 들고 와 최하준과 구민상에게 건네며 달랬다.“여긴 무슨 일이야?”최하준이 무신경하게 말했다.“나 참, 나도 오늘 2호 법정에서 재판 있어. 나한테도 관심 좀 가져주지?”이지훈이 투덜댔다.“그런데 그 마스크는 뭐야? 감기 걸렸어?”“…….”“남한테 전염될까 봐? 그런 세심한 구석이 있었어? 동성 오더니 철 좀 드는구나”10분 후, 법정 심문이 막 시작되려 할 때 최하준은 마스크를 벗었다. 퍼런 멍자국을 보고 이지훈은 커피를 뿜을 뻔했다.“이게 뭐야….”“부딪혔어.”침울하게 한 마디 내뱉고 최하준은 법정으로 서둘러 들어갔다.이지훈은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누굴 바보로 아나, 여자에게 꼬집힌 자국이 분명했다.‘저 재미없는 녀석이 이렇게 망가진 모습이라니, 이따가 몰래 찍어 단톡방에 올려야겠다,’……여름은 집에서 며칠 쉬었다. 얼굴에 멍자국이 사라지고 나서야 다시 일을 찾으러 나섰다.하지만 결과는 모두 좋지 않았다.“죄송합니다. 표절한 디자이너는 채용할 수 없습니다.”“강여름 씨, 이미 이쪽 바닥에 소문이 파다해요. 아무도 뽑지 않을 거예요.”“TH에서 업계에 쭉 통보했거든요. 그런데 누가 겁도 없이 강여름 씨를 뽑겠어요?”“…….”지원했던 회사를 나서며 강여름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분노가 치밀었다.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는데 이제 일자리마저 찾을 수 없다니.‘이제 어떻게 한다? 업종을 바꿔야 하나?’“빵빵!”옆에서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리는데 여름이 반응이 없자 누군가 소리 질렀다.“여름! 오랜만이다.”여름은 멍하니 고개를 돌렸다. 옆에 있던 고급 SUV에서 훈훈하게 생긴 얼굴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선배, 어떻게 여기 계세요?” 놀랍게도 유학 시절 선배 도재하였다. '재하 선배를 여기서 만나게 될 줄이야!'“우리 회사도 이 건물이야. 여기서 나오던데 무슨 일이야?”도재하는 차를 세운 뒤 타라고 손짓했다.여름은 차에 올라, 쑥스럽게 말했다.“입사 지원하러 왔는데
‘뭐가 ‘또’야?’여름은 억울했다.‘내가 요즘 만날 집에서 밥만 했지 한 발자국도 안 나갔다고, 어?’“그냥 전에 같이 유학했던 선배랑 밥 한 끼 먹으려는 거예요.”최하준이 웃었다.“그러니까 이번엔 대학 동문이란 말이죠, 지난번엔 고등학교 동창들한테 당하더니.”“어쨌든, 그런 줄 아세요.”여름은 더 열 받고 싶지 않아 그냥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이 씩씩거리는 걸 보고 도재하는 궁금해졌다.“새 남친? 아니면 남편?”여름은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그럴 리가요, 제 룸메이트예요.”‘호적상으로 남편이긴 한데 그 사람은 절대 인정 안 하거든요. 유명무실이랄까.’도재하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꼭 부부끼리 하는 대화 같아서.”“그, 그런가요?”여름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럴 리가, 최하준과는 늘 이런 식으로 대화했는데 같이 살다 보니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건가 싶었다.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저녁을 9시까지 먹은 후 도재하는 컨피티움 입구까지 바래다줬다. “잊지 마, 내일 아침부터 출근이야. W팰리스 리모델링 건 오더 받은 게 있거든. 내일 가서 실측 좀 해줘.”“네!”여름은 손을 흔들다가 도재하가 탄 차가 떠나고 나서야 몸을 돌렸다.최하준이 계단 위에서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품 안에는 졸린 눈의 지오가 늘어져 안겨 있었다.“선배라더니, 남자였습니까?” 최하준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찌나 눈을 구겼는지 파리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 자기 저녁 식사는 형편없었는데 여름이 남자랑 맛있는 거 먹으며 시시덕거렸을 걸 생각하니 왠지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 학교 선배….”최하준이 말을 끊었다.“강여름 씨, 처음에 당신이 결혼하자고 한 겁니다. 경고하는데 아무리 계약 결혼이지만 행동 좀 주의해 주시죠. 와이프 바람 났단 소린 듣고 싶지 않습니다.”웃고 있던 여름의 얼굴이 굳어졌다.“뭘 그렇게 오버해요? 선배랑 밥 한 끼 먹은 거 가지고. 당신 눈에는 내가 그렇게 막돼먹은
아직 꽁해 있던 여름은 거절했다.“죄송한데 난 지오 시터지, 당신 도우미는 아니죠.”‘당신’이란 두 글자에 무척 힘이 들어가 있었다. 최하준은 묘한 웃음을 지으며 나른하게 말했다.“강여름 씨가 말끝마다 말하던 사랑이란 게 이런 겁니까?”“…….”‘사랑은 개뿔. 난 외숙모란 자리를 사랑했던 거라고요, 아시겠어요?’여름은 툴툴거리며 냉장고를 열어 국수 재료를 꺼냈다.열린 미닫이문 틈으로 여름의 모습을 지켜보는 최하준의 마음은 복잡했다.이제 여름이 한 음식이 아니면 입맛이 돋지 않았다. 음식에 마약이라도 넣은 게 아닐까 싶었다.******다음 날 아침 식사 후.최하준은 소매 단추를 잠그며 외출 준비를 하다가 여름도 아이보리색 재킷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았다.안에는 진한 핑크색 셔츠에 아래는 체크무늬 롱스커트에 스타킹을 신었다. 심플하면서 세련된 룩에 볼륨 있는 몸매가 돋보였다.옅은 화장에 귀에 걸린 진주 귀걸이가 너무 아름답고 생기발랄해 보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러나 곧, 자신은 나갈 것이란 데 생각이 미치자, 자신을 위해 꾸민 것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되었다.“또 데이트 갑니까?”불쾌감을 꾹꾹 누른 목소리였다.“아뇨, 출근요. 어제 취직했어요. 퇴근한 다음에 밥할게요. 저녁에 지오 산책도 시키고.”최하준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러나 여름이 하는 일은 탐탁지 않았다.“또 전단 돌리러 갑니까”“아니요. 이번엔 수석 디자이너예요”여름은 “흥” 하고는 핸드백을 집어 들고 먼저 집을 나섰다.최하준도 곧바로 나서 함께 엘리베이터로 들어갔다. 거울에 비친 막 피어나는 꽃봉오리 같은 여름의 실루엣을 보며 물었다.“데려다 줄까요?”왠지 목이 다소 건조한 느낌이었다.“괜찮아요.”여름이 단호하게 거절했다.“내가 운전해 가려구요. 가다가 만원 전철에서 눌리고 싶진 않거든요.”“…….”지하철역까지만 데려다 주는 게 싫다는 뜻인가?여자를 바래다 줘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최하준은 이쪽으로 눈치가 영 꽝이다.8시 반